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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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야 누구에게나 지지자와 안티가 있기 마련이지만,
유시민 전 장관처럼 지지자와 안티가 극명하게 구분되는 정치인 전현직 대통령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시민 전 장관에 대하여 ‘정치인 유시민’보다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저자 유시민’이 더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인데,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입시공부에 지쳐있던 고등학교 시절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대학에 들어와 ‘책 좀 많이 볼까’하고 야심차게(!) 독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첫 번째로 읽은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한민국 개조론]을 읽으면서 어쩌면 상반될 수도 있는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첫째는 ‘역시 그는 살아 있구나’하는 감정이었다.
흔히 국민들은 그와 이념적 지향성을 같이하는 조직으로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적인 사회단체를 생각하고,
반대로 정치적 대척점에 한나라당과 조중동 언론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러나 유시민 전 장관은 이들에게 “책임성 없는 진보, 일관성 없는 보수”라는 가차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그 뿐만 아니라 헌법에 의해 국가의 권력 원천이라 칭해지는 국민들에 대해서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눈 좀 똑바로 뜨고 사십시오!”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둘째로 느낀 감정은 좀 애매한데...
현실 정치과 행정에 참여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타협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뭐랄까. 일반 국민이 접하기 힘든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그전까지의 모습에서 다소나마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하면 맞을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이 ‘타협’이란 것이 유시민 전 장관이 추상적인 구호에서부터 현실성을 획득한 소산임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 전 장관이 제시한 논리대로라면
지금 MB정부를 비판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다.
사실 MB정부, 또는 현재의 공무원들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런 정보의 불균형성 속에서 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도록 하는 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을 ‘왕’으로 칭하고 있다.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왕이라... 무척 듣기 좋은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왕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에 따라,
주위의 간신 모리배들과 아첨꾼들의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않고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왕이란 자리는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는 조선시대 절대왕권에 대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언을 쏟아낸
남명 조식 선생을 본으로 삼아서 현대 민주주의의 ‘왕’인 국민들을 향하여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때론 눈물겨운 울부짖음으로, 때론 질책으로, 때론 쓴소리로 호소한다.
이 호소는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한, 대한민국의 주인을 ‘개조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인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국가전략임을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대한민국이 선진통상국가와 사회투자국가의 통합을 향후 국가발전의 전략틀로서 주장한다.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선택한 통상국가의 틀이 40여년간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가 그 틀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에는 너무나 늦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기왕이며 선진적인 통상국가가 되어야 하며, 그런 취지에서 한미 FTA도 추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선진통상국가는 대내적인 사회투자국가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와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개발의 이익을 고스란히 소수의 재벌과 권력자에게만 분배했던 개발독재의 구습을 타파하고,
대한민국의 인적자질 향상과 다음 세대의 형평성 있는 출발을 위한 국가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체적인 전략틀 하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력답게 저자는 우리의 보건복지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과 비효율성을 타파해야 함을 역설한다.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높고, 안정된 일자리의 욕구는 높으면서도 ‘고용없는 성장’을 지속해온 우리 사회에서 사회서비스 시장을 통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주장한다.
모랄 해저드(moral hazard)와 급격한 재정부담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의료급여제도의 개선은 결코 차별적인 것이 아니며, 무상의료제도은 실현가능성이 없음을 말한다.
다국적 제약기업과 미국 정부의 요구보다는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고 국민의료비의 안정을 가져오는 약가정책이 선별등재목록이었으며, 이를 관철한 것이 한미 FTA의 의약품 분야 협상결과였음을 술회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도래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즉, 노인부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적연금제도에 대해서는 국민적 저항이 있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면적인 개혁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보건의료에 다소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적 입장에서 본다면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당시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금의 경제위기 시기를 맞아서
이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라는 단서조항을 달더라도 저자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보건복지정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유시민 전 장관에게 ‘충신’이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으련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사리사욕을 돌보지 않고, 선공후사를 실천하여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사람에게 ‘충신’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나는 그의 용기와 실천력, 솔직함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좀 더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만약 내가 사는 지역구에 출마한다면 당연히 한 표를 찍어드릴 용의도 있다.
우선 바라기는 유시민 전 장관과 같은 용기와 소신이 우리 정치계와 국민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지한 논의의 주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고,
그 논의가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타협하고 협력하는 모습으로 열매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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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 -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 아토스 산으로 가다
크리스토퍼 메릴 지음, 김경화 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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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장을 펼치고 보이는 첫 번째 사진부터 묵직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해안처럼 보이는 곳, 절벽 중간에 위치한 수도원 건물들.
한 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무게를 안고 퇴락해 있었고, 흑백 필름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황폐하고 쓸쓸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습니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숨은’이라는 단어는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분명합니다.
왜 저자인 크리스토퍼 메릴은 ‘숨은 신’이란 말을 썼는가, 왜 신이 숨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신이 숨었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신이 스스로 숨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욕망과 도락으로 신을 가리고자 하였거나,
인간의 열정으로 신을 이용하고, 인간의 의지에 신의 뜻을 대입하여 그 뜻을 가로챈 일은 많았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메릴이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아토스에 첫 순례의 발을 디딘 시기가 바로 인간의 욕망과 열정이 신의 뜻을 가려서 ‘숨긴’ 시기였습니다.

저자가 순례를 시작하기 직전에 종군한 발칸 전쟁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입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이웃을 학살하는 현장에, 과연 신은 그 자리에 계신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의문은 십자군전쟁이나 기타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된 폭력 앞에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종교차별적 학살, 인종학살이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될 때,
참된 신의 뜻은 숨겨지고, 보편적 사랑의 신은 맹목적이고 자민족만을 편애하는 신으로 왜곡됩니다.
밀로세비치가 신의 백성인 세르비아인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유고연방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아리아 민족의 고결함을 위하여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던 히틀러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자는 종교적 환경에서 자랐고 예수회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도 열정이 과하여 신의 뜻을 ‘숨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서로의 일에 대해 가진 정열(passion)이 돌변하여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고백합니다.
가정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을 때, 각자의 정열이 미움과 다툼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쇠락해 보이는 성지 아토스는
현재 인류 전체가 놓여 있는 자리, 각 개인이 놓여 있는 자리에서 그 참된 모습이 점차로 희미해지고 있는 현대의 종교, 현대의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외치면서 교회의 권위에 충실하여 마녀사냥을 일삼던 대심문관이
실제 강림한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가두고 장황하게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선언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사악한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할 테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코소보 난민들을 학살하는 세르비아 군대에서 신의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대심문관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토스에 신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잠들어 있는 신을 깨우고, 숨어 있는 신을 찾아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로서 저자는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회개에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찾아내는 것 못지 않게 그 회개가 철저하고 엄격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내가 속한 국가, 민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면서 나의 순수성과 무오성을 강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형제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내 눈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저자의 회개는 무척이나 솔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동방정교의 성지를 순례하고 있으면서도 역사상에 나타난 동방정교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동방정교의 역사를 살피면서 어떻게 권력과 결합하여 민초들을 억압하였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였는지를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성찰은 제1장에서 때론 사회를 향해, 때론 자기자신을 향해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례 가운데 자신의 개인적인 피폐함의 원인도 결국에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이후 찾아오는 ‘정화(淨化)’는 말 그대로 카타르시스(catharsis)입니다.
회개는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인간 사회의 모순을 소멸시키고 본래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죄의 근원으로 언급하였던 정열(passion) 개념의 변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으로 변질되어 버린 정열(passion)이란 말의 어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자로서 가장 낮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몸소 겸손함을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受難).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정열이 없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사역은 모두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열이 어느 쪽으로 발산되느냐, 그 속에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낮아짐, 비움이 있느냐,
즉, 우리의 정열 가운데 성스러운 변화가 있느냐가 ‘숨은’ 신을 우리 앞에 나타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크리스토퍼 메릴의 가정에 새로운 아기가 생기게 된 것은 회개와 정화로 인한 구원의 증표입니다.
황량하고 어두웠던 개인의 인생에서 새로운 인간 본성을 깨우친 크리스토퍼 메릴,
그리고 새로운 가족관계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아기의 잉태.
바라기는 전세계에 만연한 전쟁과 폭력, 차별과 독선, 맹목적 신앙에도 회개와 정화의 구원이 퍼져나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성산을 순례하면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그저 나의 죄 많음을 더 깨달았을 뿐이지요.” 내가 대답한다.
                                “당신은 나아지고 있군요.” 수사가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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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감동한 논어
사쿠 야스시 지음, 장원철.박홍규 옮김 / 김영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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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목은 들어봤을 책 [논어],
그리고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있을 공자.
그러나 실상 고백하자면 고등학교 한문이나 국민윤리 시간에 몇몇 문구를 배웠을 뿐 이제까지 논어를 모두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생이 감동한 논어]라는 제목에서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수업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에서
한문은 그다지 환영받는 과목이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입시열기가 우리 못지않은 일본에서는 한 가지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한문교사의 [논어] 수업이 ‘최고로 재미있는 수업’으로 뽑힌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업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오게 되었다니, 그 감동과 재미의 비법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이, 그리고 [논어] 수업이 재미있었던 일차적인 비법은 무엇보다 고전이 주는 묵직한 이름값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논어]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번역본과 해제, 해설서 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논어]는
고전적인 순서, 즉, 제1편 학이(學而), 제2편 위정(爲政)에서부터 시작하여 제20편 요왈(堯曰)의 순서를 따르면서 중요한 용어나 인물에 대한 주석을 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구성이 학문적 엄정함이란 측면에서 가치가 높겠지만,
어쩌면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귀중한 인류의 유산인 [논어]를 멀리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한문 교사였던 사쿠 야스시는 이런 전통적 순서를 모두 해체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만든 범주, 즉, 인생의 목표, 가족과 사랑, 가르침과 배움, 도덕의 힘 등의 대주제를 설정하고,
그 아래 소주제를 정하여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 공자의 말을 다시 모아놓았습니다.
이런 작업으로 인해서 [논어]의 해석이 독특해지고, 신선함과 참신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학이(學而)’편의 유명한 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뒤에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해 보라.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세상이 내버려두겠는가!”라는 말을 덧붙여 해석해 냅니다.
이와 같이 기존의 해석과는 다르게 저자의 해석을 통해 보다 풍부해진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물론 저자는 본인의 해석 다음에는 전통적인 해석을 붙여놓아서 자신의 해석만을 고집하지 않는 열린 책읽기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업시간을 상상하면서 보면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보다보면 자꾸만 몇 년 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교육방송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겹쳐져 생각났는데,
아무래도 사쿠 야스시 선생 역시 딱딱하게 보이는 [논어]의 내용을,
그것도 대학진학을 위해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과목을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좀 더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수업을 진행했겠죠.
[논어]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런 스승의 노고만큼은 잘 전달되었습니다.

이 책이 생동감을 가지게 된 또 한가지 중요한 비법은
[논어]의 인칭을 변화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본래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 형식으로써, 공자의 말에는 ‘자왈(子曰)'이란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3인칭 시점의 책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자는 공자의 말을 따와 이를 1인칭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마치 그 자리에서 공자님 말씀을 듣는 듯한 생생함을 부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 또는 원시유가 사상이 현재에 주는 함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는
유가사상이 가진 폐쇄성과 신분질서에 안주하려는 보수성, 남성과 성인 중심의 문화 옹호 및 차별성 등을 지적하며
유교문화 속에 숨은 봉건적인 인습을 폭로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으며, 향후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유가사상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지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극복지점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그 지점이 공자의 생각, 즉, 원시유가사상이 아닌가 합니다.

과거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몇 줄 읽었던 [논어]는 그야말로 수박겉핥기였습니다.
이번에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는 그렇게 사방으로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고,
유가사상 역시 무조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당시의 사회체제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보이기는 하지만,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은 약육강식과 힘=정의라는 등식이 통용되던 춘추전국시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무척이나 상식적이면서 진보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공자는 폐쇄성과 차별성을 내포하거나 지배집단 또는 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꽁생원처럼 현실도피적인 삶을 영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힘이 곧 진리였던 시대 속에서 땅에 떨어진 생명존중과 인간으로서의 길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강조한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정치가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후대에라도 달성하고자 원했던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의 부국강병 원칙 속에 공자의 뜻은 이룰 수 없었고,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통해 유교는 명맥을 잇는 것 조차 위협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가사상이 결국 살아남은 것은 한나라 이후 지배층에 그 이념이 잘 부합된 점도 물론 있지만,
공자가 처음 가르쳤던 인간애와 진보성을 가지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상식’이 그 사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한무제 이후 유교가 제도권에 편입되어 질서와 체제를 옹호하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또한 송나라 주희 이후 정차 형이상학적 철학에 중점을 둔 학문으로 변모하면서,
원시 유가사상의 건강함이 점차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좋든 싫든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유교의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현대는 어떻게 보면 모양만 다소 달라졌다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러한 시기에 인류가 그동안 쌓아 온 지혜는 어떻게 해결점을 찾아낼 것인지...
원시 유가사상, [논어]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다 꼼꼼한 논어 읽기에 도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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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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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첫 번째를 차지하는 [햄릿].
워낙 유명한 책인만큼 [햄릿]에 대한 책은 무수히 많은 번역본과 해설서가 존재한다.
게다가 [햄릿]은 다른 작품들의 마르지 않는 원천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직접적인 소재로 삼은 경우는 물론이고,
간접적으로 [햄릿]의 모티브나 여러 장면을 이용한 작품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저자인 셰익스피어의 실제 집필여부와 다른 작품의 존재 등은 추리소설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햄릿]은 읽을 때마다
빈틈없는 상황 연결과 화려하면서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아포리즘을 접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능력에 감탄 또 감탄하게 되는데,
이번엔 다음과 같은 햄릿의 대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왜 이 작품이 무수한 세계문학 가운데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 원하시어
                                       저로 이 일을, 이일로 저를 벌하시니,
                                        제 스스로가 천벌이자 그 집행관이
                                                      되어야 합니다.

숨어서 자신의 말을 엿듣던 폴로니어스를 찔러 죽인 후,
마치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흐르는 강물처럼, 비바람 가운데 번쩍이는 번개처럼 격렬하게
햄릿은 어머니 거트루드를 향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불구대천지 원수인 삼촌의 죄악과
그 죄악을 분별하지 못한 채, 원수와 결혼한 어머니의 더러움을 질타한다.
그리고 복수에의 다짐과 그 복수로 인해 다가올 자신의 파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절규한다.

햄릿은 모든 갈등의 선이 만나는 꼭지점으로 자꾸만 몰려간다.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복수와 살인은 죄악이라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갈등.
어머니의 무지와 불결함에 대한 혐오와 낳아 준 분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내면의 갈등.
햄릿은 이 갈등의 꼭지점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지만,
어느 쪽으로든 발을 떼면 바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까지 모조리 붕괴시킬 위험성을 알고 있고,
또한 그 때문에 고뇌하며 마음의 고통을 감내한다.

어쩌면 이 모습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또는 말하지 못하는 중첩된 갈등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 갈등을 품고 갈 것인지, 해소할 것인지, 또한 해소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 해소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뇌해야 하는 우리의 모습과 말이다.

흔히 ‘햄릿형 인간’이라고 하면,
우유부단하고 실천에 약한 인간형, 그래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까지 가진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머니 앞에서 절규하는 햄릿,
아버지가 살해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 범죄자와 결혼하며,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미친 척 해야 하며,
결국에는 복수가 당위임에도 인간적인 착한 본성과 복수에 따른 천벌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햄릿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햄릿형 인간’이란 우유부단한 인간이라기보다
자기를 얽어매고 있는 운명의 틀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그리고 그 운명의 틀을 지고 시시각각 파멸의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햄릿]이 세계문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어떤 이유보다도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시키는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과 고통의 종류만 다를 뿐, 그 고통 속의 인간 모습을 보여주는 햄릿.
다른 말로 하면, 햄릿은 ‘번뇌하는 인간’이란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나아가 다른 문학 작품들 가운데에도
햄릿만큼 작품 속 인물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어느 누구든 [햄릿]을 읽으면서 햄릿을 안아주며 위로하고, 그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될 것이며,
마지막 복수의 장면은 통쾌하다기보다 비통함과 서글픔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인 에우메니데스(에리니에스)는
특히 근친 살해의 죄에 대해서는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라도 끝까지 벌하는 여신이다.
이 복수의 여신 앞에 선 햄릿을 위해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면,
그리고 살인이나 자살을 금지한 엄격한 당시 종교적 규례를 깨뜨리고 인생을 마감한 햄릿과 오필리어가 천국에서라도 행복한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면,
우리 모두는 햄릿이라는 대역을 통하여라도
삶 속의 갈등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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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
최복현 지음 / 휴먼드림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극히 적은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웃지 못할 정의는
두껍기만 하고 어딘지 모르게 재미는 없을 것 같고,
시험에 나온다니까 읽긴 읽어야겠지만,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그다지 내켜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가지고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해보기 위해서인지
문학평론가나 작가들, 때론 문학과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영역의 유명인사들도 자신만의 고전을 소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전읽기를 권하는 책을 많이 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도 읽기 전에는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진 책의 한 종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읽으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책들과 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문적인 이론이나 미사여구에 가득찬 수식보다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씩은 경험해 보았을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쉬운 글쓰기를 통해서 고전을 소개하는 분은 많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최복현님처럼 ‘아. 내가 이 사람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친숙한 글을 쓰는 경우는 쉽게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친숙함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자의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저는 그 어떤 책소개보다 다음 부분이 가장 좋았고, 실감이 났습니다.

가끔은 로또를 사곤 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한 번 당첨된 적은 없지만 로또 한 장 사서 주머니에 넣어두면 며칠간은 그런대로 희망을 가지고 산다. 기왕이면 월요일에 구입하면 일주일은 그런 기대할 할 것이고, 토요일 쪽으로 가까울수록 기대와 설렘의 시간은 줄어들므로 기왕이면 월요일에 사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p.229)

전 윗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떤 고전문학 소개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
그렇지만 지금 2009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술자리에서 친구들하고나 할 이야기이긴 하되, 공개적으로 책에 써서 말하기는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솔직하고 편안하게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글을 써주셔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냥 따뜻한 이야기로만 일관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긴장이 건강에 더 좋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다 생동감있게 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3장 <여러 사랑의 색깔들> 부분이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연인간에, 또는 가족간에 사랑이야 말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세상의 더러움과 고통을 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랑에 대한 고전도 ‘낭만주의’에 걸맞는 작품들을 선택할 것 같은데,
의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랑을 이용하는 [적과 흑], 사랑에서 준거를 찾지 못하는 [보바리 부인], 사랑이란 미명에 가려진 추악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목로주점]과 [비계덩어리], 사랑의 상실을 보여준 [에덴의 동쪽], 비정상적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오디푸스 컴플렉스가 나타난 [아들과 연인들] 과 같은 ‘자연주의’ 작품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최복현님은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여유롭고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고전을 보고는 있습니다만,
자연주의 사조의 가장 큰 미덕이 그렇듯이 저자는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차가운 머리’도 잃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런 생각은 뒤이어 나오는 제4장 <삶의 모순들>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고전작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저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만에 인생의 선배로부터 차를 마시며 편안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후배로서, 또한 나름대로 고전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희망하는 것이 있다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극히 적은 책’이라는 고전과 독자들의 간극을 좁히는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지속되면서
어렵고 딱딱한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불식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밝히고 인간이 걸어갈 길을 제시해주는 좋은 고전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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