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을 찾아서 -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 아토스 산으로 가다
크리스토퍼 메릴 지음, 김경화 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첫 장을 펼치고 보이는 첫 번째 사진부터 묵직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해안처럼 보이는 곳, 절벽 중간에 위치한 수도원 건물들.
한 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무게를 안고 퇴락해 있었고, 흑백 필름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황폐하고 쓸쓸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습니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숨은’이라는 단어는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분명합니다.
왜 저자인 크리스토퍼 메릴은 ‘숨은 신’이란 말을 썼는가, 왜 신이 숨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신이 숨었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신이 스스로 숨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욕망과 도락으로 신을 가리고자 하였거나,
인간의 열정으로 신을 이용하고, 인간의 의지에 신의 뜻을 대입하여 그 뜻을 가로챈 일은 많았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메릴이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아토스에 첫 순례의 발을 디딘 시기가 바로 인간의 욕망과 열정이 신의 뜻을 가려서 ‘숨긴’ 시기였습니다.

저자가 순례를 시작하기 직전에 종군한 발칸 전쟁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입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이웃을 학살하는 현장에, 과연 신은 그 자리에 계신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의문은 십자군전쟁이나 기타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된 폭력 앞에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종교차별적 학살, 인종학살이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될 때,
참된 신의 뜻은 숨겨지고, 보편적 사랑의 신은 맹목적이고 자민족만을 편애하는 신으로 왜곡됩니다.
밀로세비치가 신의 백성인 세르비아인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유고연방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아리아 민족의 고결함을 위하여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던 히틀러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자는 종교적 환경에서 자랐고 예수회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도 열정이 과하여 신의 뜻을 ‘숨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서로의 일에 대해 가진 정열(passion)이 돌변하여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고백합니다.
가정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을 때, 각자의 정열이 미움과 다툼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쇠락해 보이는 성지 아토스는
현재 인류 전체가 놓여 있는 자리, 각 개인이 놓여 있는 자리에서 그 참된 모습이 점차로 희미해지고 있는 현대의 종교, 현대의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외치면서 교회의 권위에 충실하여 마녀사냥을 일삼던 대심문관이
실제 강림한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가두고 장황하게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선언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사악한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할 테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코소보 난민들을 학살하는 세르비아 군대에서 신의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대심문관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토스에 신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잠들어 있는 신을 깨우고, 숨어 있는 신을 찾아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로서 저자는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회개에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찾아내는 것 못지 않게 그 회개가 철저하고 엄격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내가 속한 국가, 민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면서 나의 순수성과 무오성을 강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형제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내 눈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저자의 회개는 무척이나 솔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동방정교의 성지를 순례하고 있으면서도 역사상에 나타난 동방정교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동방정교의 역사를 살피면서 어떻게 권력과 결합하여 민초들을 억압하였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였는지를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성찰은 제1장에서 때론 사회를 향해, 때론 자기자신을 향해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례 가운데 자신의 개인적인 피폐함의 원인도 결국에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이후 찾아오는 ‘정화(淨化)’는 말 그대로 카타르시스(catharsis)입니다.
회개는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인간 사회의 모순을 소멸시키고 본래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죄의 근원으로 언급하였던 정열(passion) 개념의 변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으로 변질되어 버린 정열(passion)이란 말의 어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자로서 가장 낮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몸소 겸손함을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受難).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정열이 없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사역은 모두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열이 어느 쪽으로 발산되느냐, 그 속에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낮아짐, 비움이 있느냐,
즉, 우리의 정열 가운데 성스러운 변화가 있느냐가 ‘숨은’ 신을 우리 앞에 나타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크리스토퍼 메릴의 가정에 새로운 아기가 생기게 된 것은 회개와 정화로 인한 구원의 증표입니다.
황량하고 어두웠던 개인의 인생에서 새로운 인간 본성을 깨우친 크리스토퍼 메릴,
그리고 새로운 가족관계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아기의 잉태.
바라기는 전세계에 만연한 전쟁과 폭력, 차별과 독선, 맹목적 신앙에도 회개와 정화의 구원이 퍼져나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성산을 순례하면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그저 나의 죄 많음을 더 깨달았을 뿐이지요.” 내가 대답한다.
                                “당신은 나아지고 있군요.” 수사가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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