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단편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9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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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에게는 황금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역사의 주도권은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것은 곧 세계의 부(富)를 좌지우지하는 지위로까지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들어섰다고는 하나 볼세비키들은 아직 내부의 반혁명 세력과 투쟁하느라 미국과 체제경쟁을 벌일 힘도 없었다. 곧 외부의 위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발달한 산업은 연일 풍족한 물자를 내놓았고, 이 물자들은 전쟁 이후 재건에 힘쓰던 유럽에 지원되어, ‘완전 공급, 완전 수요’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안정은 당연히 풍부한 물자와 엄청난 부의 축적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런 시대 속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위대한 개츠비] 및 그의 단편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바로 그 시기의 특수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 예외없이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남성이 등장하고, 아름다면서도 당돌한, 때론 철이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면서도 소비욕이 강한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부유했고, 능력이 넘쳤으며, 잘 생기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이들은 유럽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미국식 ‘사교계’를 형성하였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였다.
이들에게 ‘리츠 호텔보다 큰 다이아몬드’는 상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현실이었고,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해적’이 된 것처럼 자신을 꾸며도 재기발랄하다는 평은 들을지언정, ‘철없다’라는 말은 듣지 않는다.
몇 십년을 아프리카-유럽을 돌아다니며 살아도 어느 한 구석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말하고자 한 바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특정한 시대의 작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 ‘보편성’이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의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가 현재에도 널리 회자되고 끊임없이 읽히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가지는 보편성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는 일면 화려한 물질적 성공을 보여주면서, 어느 순간엔가 세속적 성공으로 얻지 못할 것들을 교직시켜 성공 이면의 허무함을 독자들 가슴에 새겨 넣는다.
외양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조화되지 못할 때 그 젊음과 아름다움은 하룻밤 피고 지는 꽃처럼 얼마나 빨리 사그라들어 버리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재산과 성공은 얻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데이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배신만 당한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고(위대한 개츠비),
시간까지도 거슬러 영원한 젊음을 누릴 것과 같았던 벤저민 버튼도 내면의 노화와 죽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살인을 저지르며까지 지키고자 했던 리츠호텔보다 거대한 다이아몬드와 재산은 오히려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며(리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
수십년간 유럽에 거주할만큼 부유했으나, 그 낭비적인 삶이 스스로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갉아먹는 일종의 ‘도플갱어’였음은 심신이 지치고 병든 다음에야 깨닫는다(해외여행).
언뜻언뜻 보이는 이 시대의 ‘성적인 타락’ 역시 화려한 밤거리의 뒷골목과도 같은 지저분함을 보여준다(집으로의 짧은 여행, 해외여행 등).

미국의 1920년대 황금기는 바로 직후인 1930년 세계대공황으로 이어진다.
풍요로 쌓아올린 돈은 그 가치가 떨어지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 끼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야 했다.
유럽을 모방하여 만든 미국식 사교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거품처럼 꺼진 황금시대는 그들이 경험한 첫 번째 전쟁보다 더욱 비참한 제2차 세계대전을 배태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우연이었을까. 피츠제럴드 개인 역시 1920년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1930년 아내인 젤다가 신경쇠약으로 처음 입원하면서 고난의 인생을 시작한다.
물질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던 시대. 그 물질로 세상의 어떤 것도 얻을 수 있으리라던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대.

피츠제럴드는 생명력과 정력이 넘치던 그 시대가 바로 뒤이어 찾아오는 몰락과 결핍의 전주곡이었음을 그의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물질적인 풍족함 끝에 경제위기로 떨어진 작금의 모습도 피츠제럴드의 작품과 인생에서 이미 선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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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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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이는 박민규 작가의 범상치 않은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게 되었다.
무척이나 유쾌하면서도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게 한 작품이면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준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980년대 초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정치적 암흑기요, 독재의 밤이 전성기를 향해 달리던 그 시기를 어쩌면 이렇게 재기발랄하게, 그러면서도 은근한 비꼼을 가지고 쓸 수 있는지 감탄하며 읽어내려 갔다.

나는 아직도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첫 경기 MBC 이종도 선수의 9회말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 OB 김유동 선수의 만루홈런을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만년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처참한(!!!) 성적도 기억하고 있다.
이듬 해에 ‘장명부’라는 재일동포 투수를 영입하여 성적을 일신하였지만, 그 다음 해에는 다시 꼴찌로 돌아가 연패 기록을 세우고(18연패인가 그랬다),
결국에는 ‘청보 핀토스’라는 전혀 다른 팀으로 팔려나간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 때를 아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예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공휴일이나 일요일마다 허름한 글러브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꼬맹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의 사진을 모으려고 하루에도 몇 개씩 모 회사의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은 기억과 동그란 딱지마다 나온 선수들의 온갖 기록을 달달달 외우던 기억들을 되살렸다.
한 순간이나마 그 때의 나를 돌이켜 보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박민규 작가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그런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 땐 그랬지’, ‘그 때가 좋았지’라는 단순한 마음의 위로를 주는 차원에서만 그치는 소설이 아니란 점이 놀라우면서도 뜨끔하였다.
이 책은 프로야구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양식과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어떻게 우리의 삶이 ‘프로’나 ‘전문화’라는 듣기 좋은 말에 편승하여 순수함을 잃어 왔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쉼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바퀴,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습속화한 정치적 억압의 기제들에 무비판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느꼈던 광고 중에 하나는 IMF 경제위기가 닥치기 1-2년 전에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광고였다.
우리나라의 초일류기업이라는 곳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였는데,
이 광고는 우리는 경쟁하고 있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절대 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사회체제, 제도까지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당시에 취업을 위해 면접장에 선 우리들은 면접관들이 “입사하고 난 후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제비들처럼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분야의 프로가 되겠습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성과에 대해서 받는 보상은 정말 소중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모든 사람이 1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1등을 대우해주는 것만큼 노력해도 1등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의식과 체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전문적인 프로가 할 역할이 있다면, 아마추어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

지금의 경제체제와 사회, 교육체제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다름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1등부터 꼴찌까지 우선 줄을 세우고 난 후에 1등 이외의 삶을 패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글쎄..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생은 모두가 하되 그 성과는 일부가 가져가는 ‘승자독식사회’의 논리가 은연중에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은 의미가 아닐런지..

북구 유럽의 국가들도 1980년대 말에 경제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사회보장과 복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유지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유도함으로써 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복지의 강국으로 남았다.
우리나라는 1997년 경제위기가 다가왔을 때, 1등과 프로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책임회피와 ‘이대로!’를 외친 것 이외에 무엇을 했는가 묻고 싶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1등이 보기에 낙오자인 사람들을 위해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도...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

당의정(糖衣錠, sugar-coated tablet)이란 쓴 맛의 약을 먹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약의 겉면을 달콤하게 만든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마치 당의정처럼
유쾌하고 달콤한 첫 맛 뒤에 씁쓸하면서도 쓰라린 진짜 맛을 감추고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쓰디쓴 약이 몸의 건강을 되찾아 주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말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문제를 제시해 준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또한 여전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최선과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아마추어 분들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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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족을 믿지 말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이선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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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빠진 일상에 치였기 때문인지 요즘 읽은 하나같이 무거운(?) 주제의 책들에 질려서인지
친구에게 재미있는 책 추천을 부탁했더니 바로 이 책 추천이 들어왔다.
그리고 모처럼 낄낄거리면서 편안한 독서를 했다. 고맙다. 친구야!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시트콤을 본 것 같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빨간색 표지의 책을 읽으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던 사람을 보신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다.

이 책은 스펠만 가족 6명의 이야기인데, 엉뚱하고 엽기적인 가족이다.
이들 중 아빠, 엄마, 삼촌, 맏딸은 사립 수사관(사립탐정) 일을 하고,
오빠는 변호사, 10대 초반인 막내딸은 가업을 잇기(!) 위한 수업중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척 하지만,
미행을 하든 도청을 하든 어떻게 해서든 서로의 사생활을 파헤쳐낸다.
그리고 그걸 약점으로 잡아서 거액의(?) 용돈을 뜯어내거나 협박(!)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이 동문서답과 막말의 향연인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당한 사람은 또 가만 있느냐...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약점을 잡아내서 통쾌하게(?) 복수한다.

이야기는 이미 여덟명의 남자친구를 갈아치운 맏딸 이자벨이
치과의사인 대니얼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자벨은 얼떨결에 대니얼에게 자신이 교사이며, 가족들도 모두 교사 집안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프라이버시와 사생활 보장과는 담을 쌓은 가족들은 일치단결(!!) 합심하여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상심하여 사립수사관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이자벨에게 부모님은 마지막 일을 제안한다.
12년 전 캠프에서 실종된 앤드류라는 소년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사실 인류가 만든 무한한 조직가운데 가족만큼 묘한 것도 없을 것이다.
가족에게서 사랑을 받지만, 살다 보면 가족만큼 웬수가 되는 사람도 별로 없다.
힘들 때마다 언제나 믿어주는 ‘가족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나부터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가족들에게 얼마나 함부로 대하고,
때론 가족들을 미워하고 집을 나와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하긴..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혈육의 정이란 것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겠구나 생각되기도 한다.

스펠만 가족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틈엔가 마음 속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자리잡게 됨을 느낀다.
정말 세상에 이런 가족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엽기적인 가족들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들의 모습에 내 가족의 모습을 투영시키면서
스펠만 가족이 모두 행복하게 하나가 되어 잘 살기를 마음 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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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que 2010-05-0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으로 들어와 여러 글들 잘 읽고 갑니다. 글을 차분하고 맛깔나게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서재 제목을 보면 여자분 같은데 박식하기도 하시고.... 종종 들러보겠습니다. ^^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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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야 누구에게나 지지자와 안티가 있기 마련이지만,
유시민 전 장관처럼 지지자와 안티가 극명하게 구분되는 정치인 전현직 대통령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시민 전 장관에 대하여 ‘정치인 유시민’보다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저자 유시민’이 더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인데,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입시공부에 지쳐있던 고등학교 시절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대학에 들어와 ‘책 좀 많이 볼까’하고 야심차게(!) 독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첫 번째로 읽은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한민국 개조론]을 읽으면서 어쩌면 상반될 수도 있는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첫째는 ‘역시 그는 살아 있구나’하는 감정이었다.
흔히 국민들은 그와 이념적 지향성을 같이하는 조직으로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적인 사회단체를 생각하고,
반대로 정치적 대척점에 한나라당과 조중동 언론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러나 유시민 전 장관은 이들에게 “책임성 없는 진보, 일관성 없는 보수”라는 가차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그 뿐만 아니라 헌법에 의해 국가의 권력 원천이라 칭해지는 국민들에 대해서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눈 좀 똑바로 뜨고 사십시오!”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둘째로 느낀 감정은 좀 애매한데...
현실 정치과 행정에 참여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타협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뭐랄까. 일반 국민이 접하기 힘든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그전까지의 모습에서 다소나마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하면 맞을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이 ‘타협’이란 것이 유시민 전 장관이 추상적인 구호에서부터 현실성을 획득한 소산임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 전 장관이 제시한 논리대로라면
지금 MB정부를 비판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다.
사실 MB정부, 또는 현재의 공무원들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런 정보의 불균형성 속에서 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도록 하는 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을 ‘왕’으로 칭하고 있다.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왕이라... 무척 듣기 좋은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왕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에 따라,
주위의 간신 모리배들과 아첨꾼들의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않고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왕이란 자리는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는 조선시대 절대왕권에 대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언을 쏟아낸
남명 조식 선생을 본으로 삼아서 현대 민주주의의 ‘왕’인 국민들을 향하여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때론 눈물겨운 울부짖음으로, 때론 질책으로, 때론 쓴소리로 호소한다.
이 호소는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한, 대한민국의 주인을 ‘개조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인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국가전략임을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대한민국이 선진통상국가와 사회투자국가의 통합을 향후 국가발전의 전략틀로서 주장한다.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선택한 통상국가의 틀이 40여년간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가 그 틀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에는 너무나 늦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기왕이며 선진적인 통상국가가 되어야 하며, 그런 취지에서 한미 FTA도 추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선진통상국가는 대내적인 사회투자국가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와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개발의 이익을 고스란히 소수의 재벌과 권력자에게만 분배했던 개발독재의 구습을 타파하고,
대한민국의 인적자질 향상과 다음 세대의 형평성 있는 출발을 위한 국가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체적인 전략틀 하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력답게 저자는 우리의 보건복지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과 비효율성을 타파해야 함을 역설한다.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높고, 안정된 일자리의 욕구는 높으면서도 ‘고용없는 성장’을 지속해온 우리 사회에서 사회서비스 시장을 통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주장한다.
모랄 해저드(moral hazard)와 급격한 재정부담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의료급여제도의 개선은 결코 차별적인 것이 아니며, 무상의료제도은 실현가능성이 없음을 말한다.
다국적 제약기업과 미국 정부의 요구보다는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고 국민의료비의 안정을 가져오는 약가정책이 선별등재목록이었으며, 이를 관철한 것이 한미 FTA의 의약품 분야 협상결과였음을 술회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도래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즉, 노인부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적연금제도에 대해서는 국민적 저항이 있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면적인 개혁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보건의료에 다소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적 입장에서 본다면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당시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금의 경제위기 시기를 맞아서
이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라는 단서조항을 달더라도 저자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보건복지정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유시민 전 장관에게 ‘충신’이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으련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사리사욕을 돌보지 않고, 선공후사를 실천하여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사람에게 ‘충신’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나는 그의 용기와 실천력, 솔직함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좀 더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만약 내가 사는 지역구에 출마한다면 당연히 한 표를 찍어드릴 용의도 있다.
우선 바라기는 유시민 전 장관과 같은 용기와 소신이 우리 정치계와 국민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지한 논의의 주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고,
그 논의가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타협하고 협력하는 모습으로 열매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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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 -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 아토스 산으로 가다
크리스토퍼 메릴 지음, 김경화 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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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펼치고 보이는 첫 번째 사진부터 묵직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해안처럼 보이는 곳, 절벽 중간에 위치한 수도원 건물들.
한 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무게를 안고 퇴락해 있었고, 흑백 필름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황폐하고 쓸쓸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습니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숨은’이라는 단어는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분명합니다.
왜 저자인 크리스토퍼 메릴은 ‘숨은 신’이란 말을 썼는가, 왜 신이 숨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신이 숨었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신이 스스로 숨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욕망과 도락으로 신을 가리고자 하였거나,
인간의 열정으로 신을 이용하고, 인간의 의지에 신의 뜻을 대입하여 그 뜻을 가로챈 일은 많았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메릴이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아토스에 첫 순례의 발을 디딘 시기가 바로 인간의 욕망과 열정이 신의 뜻을 가려서 ‘숨긴’ 시기였습니다.

저자가 순례를 시작하기 직전에 종군한 발칸 전쟁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입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이웃을 학살하는 현장에, 과연 신은 그 자리에 계신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의문은 십자군전쟁이나 기타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된 폭력 앞에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종교차별적 학살, 인종학살이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될 때,
참된 신의 뜻은 숨겨지고, 보편적 사랑의 신은 맹목적이고 자민족만을 편애하는 신으로 왜곡됩니다.
밀로세비치가 신의 백성인 세르비아인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유고연방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아리아 민족의 고결함을 위하여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던 히틀러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자는 종교적 환경에서 자랐고 예수회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도 열정이 과하여 신의 뜻을 ‘숨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서로의 일에 대해 가진 정열(passion)이 돌변하여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고백합니다.
가정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을 때, 각자의 정열이 미움과 다툼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쇠락해 보이는 성지 아토스는
현재 인류 전체가 놓여 있는 자리, 각 개인이 놓여 있는 자리에서 그 참된 모습이 점차로 희미해지고 있는 현대의 종교, 현대의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외치면서 교회의 권위에 충실하여 마녀사냥을 일삼던 대심문관이
실제 강림한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가두고 장황하게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선언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사악한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할 테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코소보 난민들을 학살하는 세르비아 군대에서 신의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대심문관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토스에 신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잠들어 있는 신을 깨우고, 숨어 있는 신을 찾아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로서 저자는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회개에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찾아내는 것 못지 않게 그 회개가 철저하고 엄격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내가 속한 국가, 민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면서 나의 순수성과 무오성을 강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형제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내 눈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저자의 회개는 무척이나 솔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동방정교의 성지를 순례하고 있으면서도 역사상에 나타난 동방정교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동방정교의 역사를 살피면서 어떻게 권력과 결합하여 민초들을 억압하였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였는지를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성찰은 제1장에서 때론 사회를 향해, 때론 자기자신을 향해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례 가운데 자신의 개인적인 피폐함의 원인도 결국에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이후 찾아오는 ‘정화(淨化)’는 말 그대로 카타르시스(catharsis)입니다.
회개는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인간 사회의 모순을 소멸시키고 본래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죄의 근원으로 언급하였던 정열(passion) 개념의 변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으로 변질되어 버린 정열(passion)이란 말의 어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자로서 가장 낮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몸소 겸손함을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受難).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정열이 없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사역은 모두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열이 어느 쪽으로 발산되느냐, 그 속에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낮아짐, 비움이 있느냐,
즉, 우리의 정열 가운데 성스러운 변화가 있느냐가 ‘숨은’ 신을 우리 앞에 나타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크리스토퍼 메릴의 가정에 새로운 아기가 생기게 된 것은 회개와 정화로 인한 구원의 증표입니다.
황량하고 어두웠던 개인의 인생에서 새로운 인간 본성을 깨우친 크리스토퍼 메릴,
그리고 새로운 가족관계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아기의 잉태.
바라기는 전세계에 만연한 전쟁과 폭력, 차별과 독선, 맹목적 신앙에도 회개와 정화의 구원이 퍼져나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성산을 순례하면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그저 나의 죄 많음을 더 깨달았을 뿐이지요.” 내가 대답한다.
                                “당신은 나아지고 있군요.” 수사가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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