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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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은 금방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만저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말해도 한 국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보통 무게가 아닌데,
인류가 처한 디스토피아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 등을 담은 주제의 무게가 더해져 있다.

경건한 마엘 신부는 어느 날 떠내려온 여물통을 타고 전도를 하던 중
북극까지 떠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펭귄들을 만난 마엘 신부는 이들을 원주민으로 착각하고 세례를 준다.
동물이 세례를 받게 된 전대미문의 사건.
하느님은 결국 펭귄들에게 인간의 형상으로의 변화를 결정한다.
이제 펭귄의 역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다툼이 난무하고, 권력관계가 성립하며,

신을 믿기도 하고 신을 이용하기도 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디스토피아(Dystopia).
이 말은 ‘가상사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같지만, 그 성격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사회, big brother에 의한 통제사회 또는 인류의 멸망 이후 사회 등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921년은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무한한 진보에의 믿음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났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여 찬란했던 유럽의 문명사회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모습은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인간 문명의 총아였던 과학은 거꾸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아 가는 일에 복무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갔으며, 계급투쟁은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20년대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토피아적 환상 속에 디스토피아적 염세론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왜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오게 되었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역사로 치환시켜 놓은 자기 조국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디스토피아의 뿌리를 허황된 기존 질서에 대한 집착에서 찾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모순, 즉, 앙시앵 레짐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체제의 모순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반복되었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질서가 극복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치장된 채로 다시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부가 집중되었다.
이 모순은 혁명 이후에도 ‘부르조아’라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다시 반복되었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결탁하여 모순된 사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 모순 역시 혁명 이후에도 지배층을 위한 종교, 옛 체제를 찬미하는 종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반복은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펭귄의 섬]을 보는 독자들은 1921년에 아나톨 프랑스가 보여준 혜안에 크게 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당시의 문제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특권층으로의 사회적 권한과 부의 집중은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변화를 이야기하는 움직임, 작은 저항은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하여 간단히 무시된다.
사회의 유지와 통합을 위하여 다른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는 인정받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산업화와 농업혁명으로 생산성은 갖추었지만 전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
어쩌면 이제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과 지배체제의 붕괴는 이제 한 계급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예언이 되어 새롭게 탄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상황은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가.
그냥 이렇게저렇게 흘러가는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섬]에서 <건초 8만단 사건>이란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실제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를 모델로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건 전개도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드레퓌스 사건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나 의의에 대해서는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도의 책도 있고,
또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첫 번째 장에도 잘 요약되어 설명되어 있으니 더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모순된 사회를 향해 냈던 용기있는 저항의 목소리를 암울한 현재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펭귄의 섬] 속에 많은 분량으로 삽입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 희생양을 통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권력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이었다.
전체 프랑스 사회가 미치고 유대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이 횡행할 때,
이 사건 뒤에 숨은 모순을 폭로하여 저항한 지식인들과 언론이 있었다.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문장(지금 읽어봐도 대단한 문장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싸운 지식인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오만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나를 남보다 우월하게 여기고,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아부하면서 약한 자들 위에는 군림하고자 하는 오만함,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경시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만함.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유지하면 된다는 오만함 말이다.

이 오만함을 막기 위하여, 사회정의와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식인들이나 언론은 용기있게 저항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지 않을까?
점차 ‘정의’가 낯선 단어가 되어 가는 세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애써 외면하고만 있는 세상. 
그  세상을 향하여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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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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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가 성격이 못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블랙코미디 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주인공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회가 가진 모순이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거나,
인간 본성의 약점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는 어쩌면 소설이라는 일종의 허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하게 했던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은 인간 본성에 숨겨진 추악한 양면성과,
그 양면성이 사회적 위치와 결합되어 나타난 도덕이나 사회적 모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그야말로 신랄하게 까고(!!!)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적 현상 뿐만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이란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고 있는 도덕 역시 교묘하게 ‘구성되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죠. 착하게 살아야 하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살아야 한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오면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군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나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데모나 파업은 나쁜 것이다’라는 도덕에 오면 이것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도덕이나 사회적 규범이란 이런 것입니다.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또 누가 그것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모두 ‘비도덕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고,
또 이지메 현상에서 보이듯이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 폭력이 가해지는 광기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암스테르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도덕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도덕의 위대함은 다른 상대방이 가진 도덕의 정당성 앞에 빛을 잃게 되고 위선으로 몰락해 버립니다.

클라이브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세계,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따라서 각자의 다른 취향을 인정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라는 대중매체로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하는 버넌의 행각은 부도덕합니다.
그럼 클라이브가 행한 일, 즉, 강간미수범을 신고하지 않은 일은 개인의 취향이라는 도덕성으로 가려질까요?

버넌은 언론인으로서 공인인 외무장관의 독특한 취향을 알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도덕적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황색저널리즘으로 비하하거나, 불의를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이런 버넌의 고상한 도덕성 이면에 외무장관 개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죠?

조지에게 아내인 몰리와 과거에 사귄 남자들은 모두 부정직한 사람일 수 있겠죠.
‘결혼의 신성성’이라는 신화와 같은 도덕율을 어기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조지가 취한 사진의 공개라는 조치는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 재력을 바탕으로 한 특수관계를 이용해서까지 말이죠.

외무장관 가머니는 자칫 사회적 생명을 잃을뻔한 위기를 아내의 도움으로 일단 극복합니다.
클라이브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그의 취향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지나 아내인 로즈 앞에서는 어떨까요? ‘남의 아내와 놀아난 놈’이라고 비난한다면 가머니는 무엇이라 답합니까?
자신과 관련없는 아내의 힘으로 자기의 책임을 모면한 것은 고도의 이미지전술이 아닐까요?

그리고 버넌을 배신한 프랭크나 버넌의 성공을 배아파하며 떡고물이라도 기대하다가 일순 도덕의 투사로 변신하는 다른 언론사들도
자신이 외치는 도덕의 그림자 속에 지저분한 자기합리화와 자기정당화를 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배경으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것에 대해 서평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 지적대로 네덜란드는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 등이 허용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어떻습니까?
전통적인 도덕에서 이런 일들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그야말로 ‘비도덕적’인 일들입니다.
입으로 지고지순한 도덕을 외쳤던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곳에 들어가서, 가장 비도덕적인 방법인 ‘살인’을 통해 자신의 솟구치는 분노와 복수심을 해결하여 했다니...
역설적이지만, 그 도덕은 근거가 얼마나 허위적인 것이었나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이든 일정 기간이든 ‘비도덕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게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명저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배척 이상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마음과 행동만은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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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죽었다
셔먼 영 지음, 이정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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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2007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25퍼센트가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정도이고, 성인 열 명 중 네 명은 한 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책맹(冊盲)이다.




<사례 2>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는 백과사전 출판사가 고용하는 수많은 조사원이나 작가를 고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의미의 출판을 하지 않음에도 30만개의 항목과 9천만 개의 낱말에 대한 사전을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참고로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겨우(!) 8만 5천 개의 항목과 550만개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마추어라 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와 전문가인 [브리태니커]의 정확성 차이는 크지 않으며,

오히려 오류 수정은 위키피디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점이다.




<사례 3>

"신문보다 인터넷" 중진 작가들의 온라인 진출 - 박범신의 [촐라체],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SBS 2008년 3월 5일 뉴스)




셔먼 영은 "책은 죽었다!"라고 용감하게 선언한다.

책이 죽다니!!! 아무 것도 읽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문자중독증인 나에게 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잘 읽어가다 보면 "책은 죽었다"라는 용감하면서도 무모하고 충격적인 말이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어미를 가진 두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말 그대로 "책은 죽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평서형 어미이다.

이건 위의 <사례 1>에서 보듯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 그 때문에 작가나 출판사에 닥친 불황 등등...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책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둘째는 "책은 죽어야 한다"라는 의무를 나타내는 어미이다.

[책은 죽었다]에서 셔먼 영의 일관된 주장이면서 주제는 책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 말은 책이 가진 외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인 셔먼 영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1) 책은 2장 이상의 종이에 잉크로 내용을 인쇄하고, 그것을 묶은 물건이다. 따라서 책의 본질은 그 안에 품고 있는 '사상'에 있으며,

 이 '사상'은 '책 문화'를 형성하고 전달한다.

 2) 따라서 이 사상이 있어야만 책이며, 사상이 없는 책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안티 책(anti-book) '이다.

 3) 그런데 문제는 요즘 사람들이 책은 읽지 않고, 읽는다고 해봐야 이런 '안티 책'만을 읽는다는 점이다.

 4) 왜? 정보가 필요하면 인터넷이 훨씬 빠르고, 즐거움은 TV가 주는 것이 더 재미있으며, 어딘가에 몰입하고 싶으면 게임만한 것이 없다.

 5) 게다가 출판환경조차 좋지 못하다. 책을 내는 일은 비용이 적지않게 드는 일이지만, 요즘과 같은 세태에서 '책팔아 먹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6) 그러므로 책은 이제 본질적인 변화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의 외형을 죽이는 것이다"




책은 결국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정보가 '감동'의 형태를 가지든 '실용'의 형태를 가지든 '지식'의 형태를 가지든, 그리고 그 정보가 쓸모 있는 것이든 쓸모 없는 것이든 책이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 정보(본질)가 사물(외형)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책 속의 정보를 '책'이라는 껍데기를 통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보가 사물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보라. 요즘 '음악'이란 정보를 얻기 위해 CD나 LP를 누가 사는가?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지 않는가?

그리고 누구나 음악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다. 음반회사를 찾아가거나 CD나 LP로 만들 필요도 없다. 본인이 즐기면서 본인이 만든 것을 아주아주 손쉽게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아직 책이란 외형적 물체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점점 기술이 발달하면서 책의 형체가 없는 e-book이나 audio book의 사용도 증가한다.

아직까지는 책의 외형을 좋아하는 보수적인(?) 독자들 덕분에 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기술이 더욱 발달하고, 편리성과 접근성이 개선되고 난 이후로 현재 CD나 LP의 운명을 책이 맞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위의 <사례 2>의 위키피디아처럼 이제 사용자들이 직접 책의 내용을 채워간다.

<사례 3>처럼 작가들이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고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펴보며 다음 이야기의 방향에 반영한다.




자... 이렇게 책이 외형을 버릴 때, 즉.... 책이 죽을 때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완성된다.

이제 네트워크가 연결된 곳에서는 누구나 책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절판의 염려도 없고, 책을 보관할 광대한 공간도 필요없다.

책이 헤어지거나 떨어져나갈 염려도 없고, 빌려온 책장 사이에서 정체불명의 머리카락을 발견하여 기분 나빠할 걱정도 없다.

그뿐이랴..

이제 프로슈머(prosumer)가 된 독자들은 쌍방향으로 작가들과 대화하고, 때론 독자들 스스로가 글을 써서 올린다.

이렇게 디지털화 된 책의 세상, 책이 진정으로 죽은 세상. 셔먼 영은 그 세상이 이제 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상상의 도서관'은 무질서면서도 무한한, 그러면서도 내적 질서를 가지는, 독서가들에게 말 그대로 '천국의 도서관'이었다.

셔먼 영 역시 [책은 죽었다]에서 '천국의 도서관'을 꿈꾼다.

그러나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그것과 '상상'이라는 특징을 빼고는 다르다.

아니,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현실이면서 미래라는 점에서 '상상'이라는 특징조차 벗어버렸다.




이 책, [책은 죽었다]의 저자의 주장은 반신반의하게 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한다.

솔직히 종이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종이책이 좀 더 발전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은 있으나, 지금의 독서문화는 우울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요즘에 누가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러 도서관이나 논문자료실을 먼지마시며 뒤지고 다니는가.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은 인터넷 클릭으로 습득하는 세상,

지하철을 타면 게임을 하거나 DMB를 보는 사람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되, 책읽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의 세상.

반대로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은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어서 결국에는 책의 영역도 넘어가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기왕에 책의 외형을 죽일 것이라면 제대로 죽이고, 제대로 책의 사상을 살리는 방향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상업주의에 빠져버린 출판문화는 책의 외형과 함께 죽어주었으면 한다.

물론 책을 출판한다는 것이 땅팔아서 먹고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책을 벼락부자로 만들어주는 신통한 제품, 단기간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으면 한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책이 좋은 책이며 그렇지 못한 책은 나쁜 책이 된다는 논리,

그렇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하여 보이는 좋지 않은 노력, 즉, 지나치게 화려한 홍보나 마케팅, 과열경쟁은 이제 그만하였으면 한다.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책의 내용은 실망스럽기가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그 비용을 고스란히 독자들의 주머니로 환원시키는 모습이 없었다고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저자의 주장에 개인적인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저자가 말한 안티 책(anti-book)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입장이다.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를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책을 선택하고 읽는 데에도 기호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고상하고 심오한 책들과 세계명작들만 남은 책들의 세계는 오히려 더 삭막하고 숨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저자처럼 운동선수들의 자서전이나 저자의 명성에만 기대는 책들, 자기계발서, 재테크 책들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일 뿐, 그와 같은 책들에 책의 발전을 저해하는 ‘안티 책(anti-book)’이란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한 입장 속에는 뭔가 의미를 가진 책에 대한 일종의 우월주의적 사고가 투영된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다.




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말이 길어진다.

우리나라 출판에 대해서 더 쓸 말은 많이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그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도 좋은 책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여러 작가분들과,

그 책을 독자들에게 아름답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리고 계신 출판계의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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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무슈
프로메테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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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카라무슈.

즉흥극이 유행하던 시대. 검은 의상을 입고 항상 기타를 들고 나와서 비굴하면서도 허풍 떠는 익살꾼 역할을 의미한다.

지금식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광대'인데, 이들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세상을 비웃으면서도 아무 거리낌없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중세시대에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곤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바보 광대'이며, 아직도 그 흔적은 트럼프 카드의 '조커'로 남아 있다.

이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안에서 사회적 억압기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대적 대전환기의 한 가운데를 살면서,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를 조롱하고자 하였던 한 광대(스카라무슈)의 이야기이다.

앙드레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원래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으나, 평등과 이상사회를 꿈꾸던 친구가 지배계급이었던 다쥐르 후작의 계략에 빠져 죽은 후 혁명 선동가가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는 도망치면서 스카라무슈(일종의 광대)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었다가, 검술 학원을 운영하는 검술 마스터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하여 실제 검을 들고 결투의 복판에 서는 정치가가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여러가지로 재미있다. 따라서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주인공인 앙드레 루이라는 인물의 인생역정이 아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앙드레 루이대 다쥐르 후작이라는 대결구도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귀족들,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에서 당시의 상황을 느끼게 해주는 긴박감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도 하나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반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여러 시민혁명들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지라,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로서의 의미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역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일 것이지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생각거리를 주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가 다쥐르 후작의 입을 빌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보여준 부분이었다.

그의 주장은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음에도 그 방법이 폭력적이 되어 혼란과 무질서를 부르고,

결국에는 다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의미없는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결국은 자본주의 부르조아의 승리, 그들의 지배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을 말한 후작의 이야기는 옳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혼란과 무질서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보는 '혼란'과 '무질서'는 결국 자신이 이때까지 향유해 왔던 지배적 지위에 대한 '혼란'이며 '무질서'이니까...

그래서 그 지위가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날 때,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혼란'과 '무질서'를 말하지 않는가.

민중의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침묵하던 민중의 손에 무기를 들게 만든 자신들의 폭력과 억압에는 관대하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흘려진 피는 정말 안타까운 것이나,

그 피흘림의 일차적인 책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민과 농민들을 착취했던 귀족계급들과,

귀족들과 야합하여 혁명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던 유럽의 봉건군주들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몸소 실천한 시민혁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주장했듯이 산업혁명과 '이중혁명'으로 작용하여 봉건주의 종식과 자본주의적 지배권 확립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장을 연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켰으며', 결국에는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듯이

지배계층의 교체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계층(노동자)의 각성과 등장을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작은 것 같지만, 이런 점에서 [스카라무슈]의 출판사 이름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점도 흥미롭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회주의권에서 칼 마르크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에 불을 가져다 주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듯이, 마르크스 역시 '공산주의'라는 불을 통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추억 하나.

책의 띠지에 "노스탤지어가 샘솟는 최고의 활극소설"이라 한 것은

아마도 한 자루 검에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활극같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심을 의미한 것이리라.

그런데 개인적으로 [스카라무슈]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엉뚱하게도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로 이어져 있다.

아마 이현세씨의 만화였을 것 같은데 [보물섬] 창간호에는 <<검객 스카라무슈>>라는 만화가 연재되었다.

시대적 배경이야 아직 어린 나이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멋진 주인공의 멋진 검술 솜씨는 아직도 기억의 한 컷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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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표현 속에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어울려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다소 도식적인 의미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말이 쉽지, 어떻게 서로 다른 처지와 조건을 가진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확보한 사회적 강제를 통하여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바람직한 것을 개인들간의 자발적인 입장 정리와 통일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론’이 가지는 역사성은 인간이 집단을 이룬 역사와 동일하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의 토론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인 ‘아고라’나 소피스트들이 아테네 청년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결국은 ‘변론’이었다는 사실,
케사르의 암살을 두고 벌어진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그 유명한 연설 대결.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을 담은 책에는 자신의 이상과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토론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는 사실 등은 토론의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지를 말해준다.
토론의 역사는 현대 우리사회에도 지속되는데,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토론의 광장은 언제나 수많은 누리꾼들로 북적대며,
[백분토론]과 같은 토론 프로그램은 사안에 따라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기도 하고, 출연자가 다음 날 검색순위 1위에 오르기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군왕과 신하들에게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학습을 요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언로(言路)’ 위주의 정치를 폈던 조선사회에서 치열하면서도 세련된 토론이 없었을 리가 없다. 
이 한의 [조선 아고라]는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이란 부제를 달고
조선시대의 5가지 토론, 즉, 한성천도 논쟁, 공법실시 논쟁, 제1차예송 논쟁, 제2차예송 논쟁, 문체반정 논쟁의 시초와 진행과정, 결과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논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알려준다는 지식의 전달 측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말랑말랑한’ 역사서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엄청날 정도로 많아졌다.
그렇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 이면에서 지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있는 문화사적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에는 그러한 점에서 지은이의 수고와 고민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각 논쟁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한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한성천도 논쟁: 비과학적인 것, 하지만 여러 사람이 인정하는 것(여기서는 풍수지리)은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있을까?

공법실시 논쟁: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왕의 것? 신하의 것? 민초들의 것? 왜 중국과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주나라 정전(井田)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가?

제1차 및 제2차 예송논쟁: 현실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는 것은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아닐까?

문체반정 논쟁: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정조시대의 개혁은 왜 실패하였는가? 왜 실학은 현실정치에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학문적인 수준에서만 머물렀는가?

이러한 의문점들은 하나씩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의 논쟁들을 읽으면서 조선이란 사회가 뒤로 올수록 세련되어지면서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싶다.
설령 말뿐일지라도 조선 초기에 이상으로 남아 있던 애민, 부국의 가치에서 격식과 형식을 존중하는 가치로, 또 더 나아가 지배층이 보수와 통제의 가치로 돌아서는 과정을 다섯 편의 논쟁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현상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며, 그렇다고 조선 초기가 긍정적인 사회였냐라고 묻는다면 또다른 길고 긴 논쟁이 될 것 같으니 잠시 여기서는 뒤로 미뤄두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점이 현재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의 논쟁’에서도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나는 토론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를 가장 조심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타인,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쉽다면, 이 책에 소개된 토론들이 모두 ‘국왕과 신하들’이라는 토론상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쩌면 결국 토론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이 국왕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사회의 정치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예송논쟁에서와 같이 세부적으로는 사대부들 사이의 논쟁이 섞여 있는 것도 있었으나,
국왕중심주의 하에서 어떤 주제든 정치적 토론의 중요한 축은 국왕에게 있었다는 점은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다소 학술적이거나 경제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하나 정도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유학자들(퇴계나 고봉 등)의 논쟁, 불교에 대한 논쟁, 조선 후기 경제적 변화에 대한 실학자들의 논쟁 등도 충분히 다뤄볼 만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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