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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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첫 번째를 차지하는 [햄릿].
워낙 유명한 책인만큼 [햄릿]에 대한 책은 무수히 많은 번역본과 해설서가 존재한다.
게다가 [햄릿]은 다른 작품들의 마르지 않는 원천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직접적인 소재로 삼은 경우는 물론이고,
간접적으로 [햄릿]의 모티브나 여러 장면을 이용한 작품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저자인 셰익스피어의 실제 집필여부와 다른 작품의 존재 등은 추리소설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햄릿]은 읽을 때마다
빈틈없는 상황 연결과 화려하면서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아포리즘을 접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능력에 감탄 또 감탄하게 되는데,
이번엔 다음과 같은 햄릿의 대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왜 이 작품이 무수한 세계문학 가운데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 원하시어
                                       저로 이 일을, 이일로 저를 벌하시니,
                                        제 스스로가 천벌이자 그 집행관이
                                                      되어야 합니다.

숨어서 자신의 말을 엿듣던 폴로니어스를 찔러 죽인 후,
마치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흐르는 강물처럼, 비바람 가운데 번쩍이는 번개처럼 격렬하게
햄릿은 어머니 거트루드를 향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불구대천지 원수인 삼촌의 죄악과
그 죄악을 분별하지 못한 채, 원수와 결혼한 어머니의 더러움을 질타한다.
그리고 복수에의 다짐과 그 복수로 인해 다가올 자신의 파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절규한다.

햄릿은 모든 갈등의 선이 만나는 꼭지점으로 자꾸만 몰려간다.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복수와 살인은 죄악이라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갈등.
어머니의 무지와 불결함에 대한 혐오와 낳아 준 분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내면의 갈등.
햄릿은 이 갈등의 꼭지점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지만,
어느 쪽으로든 발을 떼면 바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까지 모조리 붕괴시킬 위험성을 알고 있고,
또한 그 때문에 고뇌하며 마음의 고통을 감내한다.

어쩌면 이 모습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또는 말하지 못하는 중첩된 갈등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 갈등을 품고 갈 것인지, 해소할 것인지, 또한 해소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 해소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뇌해야 하는 우리의 모습과 말이다.

흔히 ‘햄릿형 인간’이라고 하면,
우유부단하고 실천에 약한 인간형, 그래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까지 가진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머니 앞에서 절규하는 햄릿,
아버지가 살해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 범죄자와 결혼하며,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미친 척 해야 하며,
결국에는 복수가 당위임에도 인간적인 착한 본성과 복수에 따른 천벌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햄릿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햄릿형 인간’이란 우유부단한 인간이라기보다
자기를 얽어매고 있는 운명의 틀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그리고 그 운명의 틀을 지고 시시각각 파멸의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햄릿]이 세계문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어떤 이유보다도 등장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시키는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과 고통의 종류만 다를 뿐, 그 고통 속의 인간 모습을 보여주는 햄릿.
다른 말로 하면, 햄릿은 ‘번뇌하는 인간’이란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나아가 다른 문학 작품들 가운데에도
햄릿만큼 작품 속 인물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어느 누구든 [햄릿]을 읽으면서 햄릿을 안아주며 위로하고, 그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될 것이며,
마지막 복수의 장면은 통쾌하다기보다 비통함과 서글픔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인 에우메니데스(에리니에스)는
특히 근친 살해의 죄에 대해서는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라도 끝까지 벌하는 여신이다.
이 복수의 여신 앞에 선 햄릿을 위해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면,
그리고 살인이나 자살을 금지한 엄격한 당시 종교적 규례를 깨뜨리고 인생을 마감한 햄릿과 오필리어가 천국에서라도 행복한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면,
우리 모두는 햄릿이라는 대역을 통하여라도
삶 속의 갈등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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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
최복현 지음 / 휴먼드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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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극히 적은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웃지 못할 정의는
두껍기만 하고 어딘지 모르게 재미는 없을 것 같고,
시험에 나온다니까 읽긴 읽어야겠지만,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그다지 내켜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가지고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해보기 위해서인지
문학평론가나 작가들, 때론 문학과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영역의 유명인사들도 자신만의 고전을 소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전읽기를 권하는 책을 많이 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도 읽기 전에는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진 책의 한 종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읽으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책들과 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문적인 이론이나 미사여구에 가득찬 수식보다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씩은 경험해 보았을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쉬운 글쓰기를 통해서 고전을 소개하는 분은 많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최복현님처럼 ‘아. 내가 이 사람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친숙한 글을 쓰는 경우는 쉽게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친숙함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자의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저는 그 어떤 책소개보다 다음 부분이 가장 좋았고, 실감이 났습니다.

가끔은 로또를 사곤 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한 번 당첨된 적은 없지만 로또 한 장 사서 주머니에 넣어두면 며칠간은 그런대로 희망을 가지고 산다. 기왕이면 월요일에 구입하면 일주일은 그런 기대할 할 것이고, 토요일 쪽으로 가까울수록 기대와 설렘의 시간은 줄어들므로 기왕이면 월요일에 사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p.229)

전 윗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떤 고전문학 소개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
그렇지만 지금 2009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술자리에서 친구들하고나 할 이야기이긴 하되, 공개적으로 책에 써서 말하기는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솔직하고 편안하게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글을 써주셔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냥 따뜻한 이야기로만 일관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긴장이 건강에 더 좋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다 생동감있게 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3장 <여러 사랑의 색깔들> 부분이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연인간에, 또는 가족간에 사랑이야 말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세상의 더러움과 고통을 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랑에 대한 고전도 ‘낭만주의’에 걸맞는 작품들을 선택할 것 같은데,
의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랑을 이용하는 [적과 흑], 사랑에서 준거를 찾지 못하는 [보바리 부인], 사랑이란 미명에 가려진 추악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목로주점]과 [비계덩어리], 사랑의 상실을 보여준 [에덴의 동쪽], 비정상적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오디푸스 컴플렉스가 나타난 [아들과 연인들] 과 같은 ‘자연주의’ 작품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최복현님은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여유롭고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고전을 보고는 있습니다만,
자연주의 사조의 가장 큰 미덕이 그렇듯이 저자는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차가운 머리’도 잃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런 생각은 뒤이어 나오는 제4장 <삶의 모순들>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고전작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저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만에 인생의 선배로부터 차를 마시며 편안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후배로서, 또한 나름대로 고전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희망하는 것이 있다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 읽은 사람은 극히 적은 책’이라는 고전과 독자들의 간극을 좁히는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지속되면서
어렵고 딱딱한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불식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밝히고 인간이 걸어갈 길을 제시해주는 좋은 고전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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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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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망치다가 ‘빌링스’라는 무인도에 도착한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나는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섬 한 편에 숨어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매일 오후 바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한 여인(포스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가도, 내 존재를 알려주려 하여도 포스틴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매번 같은 대화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포스틴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보르헤스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환상문학의 대표작가로 불리는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은 이런 당혹스러운 현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SF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이 책에는
다루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담론들이 들어 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스쳐갔던 주제들만 꼽아보더라도
인간의 복제성과 그 복제의 진정성, 복제된 정보의 조작가능성, 인간과 영혼의 불멸성,
현실과 가상의 독립성 또는 융합성과 같은 무거운 철학적 질문에서부터
순간과 영원, 기술에 대한 고민, 인간의 고독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독자에 따라서는 자칫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느낀 큰 매력은
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들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러시아 인형’과 같이
지속적으로 눈과 머리를 현혹시키면서 현실과 가상(또는 환상)의 의미를 묻고 있는 점에 있었다.

결국 ‘빌링스’ 섬의 사람들과 내가 사랑에 빠진 포스틴은
모렐이란 사람이 발명해낸 기계가 만들어낸 환상임이 밝혀진다.
환상이라 해도 단순한 영사기나 축음기가 재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환상이다.
모렐은 생전에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후 이 환상을 제작했고,
그 환상을 무인도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함으로써 영원함을 얻고자 하였다.
동력은 역시 영구적인 조수를 이용한 발전기를 사용하여 해결하였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등장인물이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빼내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인데,
시뮬라크르는 복잡한 철학용어이고 보드리야르는 ‘기호’라는 의미로 사용한 경향이 짙긴 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가상’ 또는 ‘가장(假裝)’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아마 요즘 경제학 또는 공학에서 자주 쓰이는 ‘시뮬레이션’을 생각하는 것이 빠를지 모르겠다.
보통 우리는 현실을 진실과 대응시키고, 가상은 허구와 대응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가상이고, 허구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실을 무수하게 복제한 복제품이라면?
그럴 경우 진실은 어디로 날아가버리는가?

<매트릭스>를 다시 생각해 보면,
매트릭스 안의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매트릭스 밖의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
매트릭스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호의 형태로 환원되는데, 이건 결국 모든 것의 복제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복제하지 않은 네오와 친구들은 매트릭스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가 되고,
가상인 바이러스를 대표하는 스미스 요원은 현실을 나타내는 네오를 쫓는다.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의 중요한 주제의식은 <매트릭스>와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영화이야기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모렐의 발명]에서 환상속에 처한 주인공의 대처방법은 어떠했나 궁금하다.

이제 나는 ‘빌링스’ 섬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을 부족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기계가 고장나거나 하여 멈추게 되면 이 ‘영원’한 환상은 사라져버린다는 것인다는 문제고,
또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포스틴과 영원히 같이 있고 싶다는 욕망의 문제이다.
결국 나는 모렐의 발명품을 조작하여 나 자신을 촬영한 후 재생하도록 한다.
포스틴과 대화하도록, 포스틴과 서로 좋아하도록, 포스틴과 함께 지내도록
나는 나의 환상을 창조하고, 나의 가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죽어간다.

가상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된 세상.
진실과 허구가 섞여서 이젠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진실에 조금씩 다가서야만 하는 세상.
자본의 힘으로 복제된 상품이 소비의 주축이 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그 복제된 힘은 영원한 왕좌를 얻어 인간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세상.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에서 지금의 ‘매트릭스’ 사회를 읽으면서 다시 현실과 가상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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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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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설날 연휴에 들어가기 전인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 약 30분 동안
이 책의 전반부에 나온 만화 부분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깔아놓지 않은 깡촌 시골 고향마을에서 후반부의 원작 소설 부분을 마저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저를 좀 감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벤자민 버튼이 경험한 ‘시간’이란 것이 이제 예전의 방들만 남은 시골집에서 경험했었던 ‘시간’과 겹쳐서 여러 가지 추억과 상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명절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면
세대에 따라 보내는 시간과 활동공간이 대체적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다소 구석지지만 따뜻한 웃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거실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방에서,
꼬마들은 음침한(?) 건넌방과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한 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났고,
다음 세대는 또 전 세대가 생활하던 공간으로 조금씩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인에게 ‘시간’을 공평하게 주셨다고 하는 의미는,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24시간, 365일이란 정해진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세월이 흐르면서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일한 운명을 거스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벤자민 버튼은 이런 ‘공평한’ 시간을 좀 다르게 살았습니다.
결국에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맞은 것은 다른 사람과 같았으나,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는 과정을 통해 흙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벤자민 버튼의 일생을 보면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방법,
즉,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면서 성장한 후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길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어느 쪽이 개인에게 더 행복한 일생이 될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 개인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고자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선택은 제가 좋아하는 애니매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생각해보면 더욱 굳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료들이 모두 죽은 후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그들과 같이 일생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가 그 작품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불로장생은 인류의 꿈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혼자서 불로장생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생명.. 좋습니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데, 나만 쌩쌩하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우리에게 ‘혼자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의 행복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이 어린 아이의 순간이든, 팔팔한 청년의 순간이든, 늙은 노년의 시간이든 말입니다.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피츠제럴드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어째서 현대 독자들의 평이 갈리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나 다른 사람과 같이하고자 했던 ‘재즈의 시대’도 결국은 그와 그 동시대인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시대. 이 시대도 앞으로 흘러가고 다음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간다는 생각이 오래된 시골집의 구석구석 풍경들과 겹쳐지면서 좀 센치해졌던(?) 설 연휴가 되었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그림의 힘은 위대한 것을 재삼 느낍니다.
삽화든 만화든, 행간 속에 숨은 의미를 남김없이 간취하도록 도와주는 그 힘이 적절히 사용된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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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p.75)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색 산을 배경으로 하여 건물은 지붕 부분만 남겨놓고 모두 물에 잠겨 있다.
한쪽에서는 억수같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높은 파도의 바닷물이 도시를 덮쳤다.
이 책, [6도의 악몽]은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표지로 먼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인류가 혹시 천천히 데워져 가는 물 속의 개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가 목숨을 위협하는 데에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결국에는 뜨거운 물 속에서 죽음을 당하는 개구리의 이야기처럼,
인류도 역시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는 환경에 너무도 둔감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한 30여년 전,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기에 ‘국딩’이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의 날씨가 그 때와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 겨울이면 한강물 위로 얼음을 타고 강 중간까지 가봤던 아찔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만 해도 얼어 붙은 한강 위에서는 동그란 구멍을 뚫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한강에 살얼음만 얼어도 예년보다 며칠 늦게 얼었느니 하면서 뉴스까지 장식하는 기사거리가 되었다.

난방시설이 발달하여 겨울이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좋다. 하지만, 분명히 겨울철 서울에 내리는 눈의 빈도나 양은 줄어들었다.
요즘엔 언론매체마다 겨울 가뭄이 극심하다는 보도를 본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겨울 농작물이 말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만 해도 보리는 쌓인 눈 아래에서 겨울을 보낸다고 알았다. 눈이 소복히 덮힌 들판이 원래 모습인 것이다.
사실 겨울 가뭄이란 것도 10여년 전부터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UN이 정한 ‘물부족 국가’란다. 여름이면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왜?
<장마→무더위, 가끔 태풍>이라는 전통적으로 익숙했던 여름 날씨에 비해
요즘의 여름은 ‘국지성 집중 호우’라는 다소 생소한 원인으로 물난리를 매년 겪는다.
이렇게 일년 강수량의 대부분을 여름 짧은 시기에 쏟아내고 나면 다른 때는 전체적으로 가물다.
여름에는 많은 수량을 홍수조절을 위해 내보내야 하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물을 모아놓으려 해도 점점 수량은 줄어든다.

이런 날씨의 변화는 우리나라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이제 TV만 켜면 지구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 소식이 빠지는 날이 별로 없을 지경이다.
인도네시아를 덮쳤던 쓰나미, 허리케인 카타리나로 인한 미국 남동부의 파괴,
갈수록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사하라 사막과 고비 사막을 비롯한 사막 지대,
폭염으로 수많은 노인들이 죽음을 맞았던 프랑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과 홍수, 폭설과 폭염,
호주,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자주 발생하고, 또 한 번 발생하면 잘 꺼지지 않는 산불,

마크 라이너스의 [6도의 악몽(six degrees)]은 이런 기상이변들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온난화’에서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으며,
그 온난화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자연계와 우리의 생활, 인류의 생존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를 그야말로 악몽처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상승하면,
대륙의 서부에는 가뭄이 닥치지만, 동부와 남부는 홍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륙 중심의 초지들에서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킬리만자로와 알프스의 만년설은 녹아내려 산사태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의 가뭄을 초래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하면,
가뭄과 홍수는 그 정도가 심해지고, 또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과거 온대지방에는 여름마다 열파가 닥쳐서 노인들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과도한 이산화탄소는 바닷물을 산성으로 변화시켜 바다속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3도 상승하면,
아마존을 비롯한 열대 우림은 파괴당하고, 기상이변은 이제 더 이상 ‘이변’이 아닐 정도로 일상적이 된다.
이 때부터 문제는 온난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한 대이동을 시작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4도 상승하면,
남극의 빙하는 완전히 녹아 내리고, 세계의 해안선 모양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뭄, 홍수, 열파로 인해 생태계는 파괴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5도 상승하면,
해안도시들은 모두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내륙지방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
국제무역 시스템은 붕괴되고 공황이 일어난다.
재해를 피해 이동하는 사람들은 많아지나, 거주가능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다.
이제 바다 속의 메틴하이드레이트라는 메탄가스 함유물질이 분출되고, 이로 인한 지진해일(쓰나미)이 전세계를 덮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6도 상승하면,
이제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이 멸종의 위기를 맞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지구의 온도는 그렇게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지구온난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술급수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도 온난화의 되먹임(feedback)을 지적했지만,
온난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어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그 때부터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도 기하급수적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이런 논리가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오만함의 논리라는 점이다.
1도 오르면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동식물들에게는 이 1도가 그야말로 생과 사를 결정짓는 차이가 되며,
"인간 때문에 지구 자연계의 생물종들은 자연스러운 멸종률보다 이미 수백 수천 배나 빠르게 멸종하고 있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중요하긴 하나 더 심각하고 더 시급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하지만, 빈곤이나 기아의 문제와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선후차를 둔 것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뒤집어 말하면, 지구온난화의 문제에만 매달리면 빈곤이나 기아 문제는 해결 못한다는 것인가?
어떤 책에서는 <온난화로 인해 매년 15마리의 북극곰이 희생되지만 인간의 포획으로는 매년 49마리가 사라진다. 그러니 온난화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인간의 포획과 온난화를 모두 적절히 관리하면 49마리가 아니라 64마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왜 간과하는지.
또 <해수면이 올라가는 건 바다의 얼음이 녹기 때문이 아니다. 얼음이 녹아도 물높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난화로 인한 위기는 과장되어 있다>라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거대한 빙하라는 지구의 온도조절장치가 사라질 경우 초래될 수 있는 해수면 상승 효과는 단순히 물 위의 얼음이 녹는 수준이 아니다.
얼음이 녹아 생기는 수증기는 반드시 어디론가 되돌아 간다.
뿐만 아니라 빙하가 품고 있는 탄소는 그 빙하가 녹았을 때 대기중으로 나와 더 심각한 온난화의 촉진제가 된다.

나는 저자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예측한 것들이 실현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는 필요할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난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적정한 수준에서 온난화를 조절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개인차원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나 각 국의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구에 대해, 자연에 대해 인간이 가진 오만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쩌면 스스로의 손으로 종의 멸망을 가져오는 첫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수백만 년에 걸쳐 이 지구상에서 진화해온 생물 종들이 인간의 한 세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영원히 파멸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를 때일 수 있다.
저자는 탄소배출의 차등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앞으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더 실효성있는 대책이 추진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성실성과 대중적 친절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저자는 단순히 ‘지구가 따뜻해지면 이런이런 일이 일어나겠지...’하는 상상력에
화려한 필력을 덧붙여서 과장하여 책을 쓰지 않았다.
서론에도 밝혔듯이 저자인 마크 라이너스는 거의 매일 같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옥스퍼드 대학 레드클리프 과학도서관으로 향한다.
거기서 그는 기상학 관련 전문 저널을 뒤져서 지구의 온도와 기후변화 사이의 상관성을 분석․예측한 전문잡지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그리고 이 학술적 정보를 <지구기온 1도 상승에 따른 단계적 변화>라는 누구나 알기 쉬운 방법으로 재구성하여 사례들을 들었다.
이로 인해 [6도의 악몽]은 과학적 객관성과 냉정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내용의 SF같은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저자의 이런 성실성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더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위기를 깨닫고, 박차고 나올 수 있도록 개구리를 깨워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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