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빨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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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이 태어나서 잘 자라다가 어느 때가 되면 밤에 자다가 갑자기 깨어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가 돋아나는 아픔 때문이라고 한다.
살갗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불편하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갓 태어난 아기의 입속 생살을 뚫고 딱딱한 이빨이 나고 있으니 얼마나 아프고 불편하겠는가.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은 제목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만,
마치 새로운 이빨이 돋을 때의 아픔과도 같은 소설이다.
[하얀 이빨]은 런던의 준빈민지역에 거주하는 두 가족, 즉, 영국인 아치 존스와 그의 전우인 방글라데시인 사마드 익발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치 존스는 자메이카 출신의 클라라와 결혼했으니 소위 말하는 ‘국제결혼’을 한 셈이며, 사마드 익발은 멀고먼 방글라데시에서부터 런던까지 흘러들어왔으니 ‘이민1세대’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들이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고, 또 어떻게 각자의 아내들과 만나 결혼했으며, 각자의 자녀들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인간의 오만함과 신의 뜻에 따른 바벨탑의 혼란이 원인이 되었든,
아니면 지리적인 산맥과 강, 바다로 가로막힌 환경의 제약조건이 되었든,
어쨌거나 인류는 유사한 정서와 언어, 생활공간을 지닌 사람들끼지 공동체를 형성해 왔고, 그 공동체만의 문화적 특수성을 발달시켜 왔다.
이제 전세계가 melting pot처럼 하나의 공간화, 지구촌화되어 가고 있는 지금 이들 공동체 간의 화합과 공존은 마치 가지런한 치아가 신체의 건강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인류 전체의 건강함을 담보하는 일차 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다문화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어떻게 해서든 적응하며 먹고사는 문제에서만 그치지 않고 매우 복합적인 갈등구조를 가진다는 데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사마드 익발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하여 싸웠고, 그래서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자부심은 영국 백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인도 독립운동의 영웅 판디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어떤 경우에라도 이슬람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고향 회귀적’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마드 익발은 가족 내에서도 세대간 갈등이라는 수직적 갈등을 경험한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세대와 2세대인 자녀세대 사이에는 세대차이라는 보편적 간격과 함께 전통의 고수 대 새로운 문화로의 흡수라는 문화적 간격을 동시에 내포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의 뜻과 전통의 힘에 따라 살아가길 바라지만, 이미 새로운 사회의 문화로부터 세례를 받은 아들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식에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고 부모세대들에 반항한다.
결국 사마드 익발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슬람 전통에서 멀어지는 두 아들 마기드와 밀라트는 끝내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다.
고급스러운 서양문화에 젖은 마기드와 서양의 밑바닥 문화를 경험한 밀라트 역시 형제 사이의 우애는 저버린지 오래이다.
런던에서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몰라도 차별의 세대 유전과 가족의 해체는 사마드 익발의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없다.
작가인 제이디 스미스는 이 과정을 톡톡 튀는 언어로, 때론 유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 속에 그리고 있지만, 그 웃음에는 씁쓸한 고통과 절망, 한탄과 한숨이 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마드 익발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생존을 위하여 이민의 길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경제적 자리는 잡았으나, 가족 내의 이민 1세대, 2세대, 3세대의 갈등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의 교포 사회.
한국 사회 속에서 3D 업종에 근무하나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면을 차별당하며 울분을 참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사회.
무슨 이유에서건 한국 사람과 결혼하여 이 땅에 들어와 민족적 차별과 여성의로서의 차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아파하는 사회.
어떤 지역은 거주 외국인들로 인하여 슬럼화되어 가고 있지만, 또 어떤 지역은 외국인들의 고급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회.
무엇보다 수도 한 복판과 전국 곳곳에 외국인 군대가 들어와 있고, 그들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

소설의 배경인 영국의 다문화 사회는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화 정책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국의 다문화 사회 형성 역사 역시 흑인 노예의 역사와 아시아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이주/생존의 역사와 상당 부분 일치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다문화사회의 역사를 써나갈 것인가.
이제 막 새로운 이빨이 나오려는 아픔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가지런하고 조화로운 치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아류 제국주의’로 흐르지 않았으면 한다.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의 고통을 누구보다 아프게 겪은 우리 민족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아왔던 우리가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위치에 올라왔다고 하여 지금의 우리보다 열등해 보이는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차별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면 이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잊은’ 모습일 뿐이다.

예전에 나는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걷고, 함께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꾸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무척 감명깊게 읽었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님이 [나의 소원]에서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대목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기는 백범 선생님이 원하셨던 대로,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들이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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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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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적 폭력이나 사회적 억압이 개인에게 어떻게 나타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분명 진보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질 문명은 날로 발달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 평등의 가치는 최소한 문서상으로는 과거에 비해 잘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진보 뒤에 감추어진 ‘야만’의 역사 역시 아직까지 우리들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은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의 향유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또한 인간의 가치가 과연 차별없이 구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부정적인 답을 여전히 떼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은 진보의 역사 속에 숨겨진 야만의 역사를 레베카 슈워트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통해 드러낸 작품입니다.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사토장이라는 하층 계급의 딸이 운명적으로, 사회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세 가지 차별과 폭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 슈워트는 세 겹 차별의 하늘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차별은 역시 유대인이라는 전통적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입니다.
그의 아버지 제이콥 슈워트는 독일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지성인이었고, 어머니 안나는 피아노를 사랑하던 감수성 예민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살았다면 안정적인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제이콥은 나치의 탄압으로 고향을 떠나 낯설기만 한 미국에 도착합니다.
뿌리부터 거부당한 슈워트 가문. 그들이 이후로 겪은 비극의 출발점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인 인종 차별에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차별은 사토장이라는,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차별입니다.
전쟁과 차별을 피해 아무런 준비없이 말과 생활이 낯선 새로운 대륙에 찾아온 제이콥 슈워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공동묘지를 관리해야 하는 ‘사토장이’라는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낮은 사회적 지위는 낮은 교육수준, 좋지 않은 환경(나쁜 우물물), 이웃 및 관리들로부터의 멸시와 천대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에는 나치들이 자신을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강박관념과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제이콥은 엽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아내인 안나까지 죽인 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해 버립니다.
이 경험은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마음 속에 낙인으로 새겨집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아니 인생 전체에서 ‘사토장이의 딸’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가족의 비극적 종말은 그녀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차별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입니다.
부모님의 비극적 죽음 후 레베카는 호텔 여급으로 살아가다가 나일스 티그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티그너와 결혼하여 ‘티그너 부인’이 된 레베카는 곧 남편의 권위의식과 무관심, 폭력을 겪게 됩니다.
아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좋지 못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남자와 대화 한 마디 했다간 심한 의심을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 남편의 말에 거슬렀다는 이유로 자신과 아들에게 내려진 극심한 폭력을 경험합니다.

물론 레베카 슈워트는 이 세 겹 차별의 하늘을 걷어내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차별과 멸시의 상징과 같았던 자신의 이름을 ‘헤이젤 존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꿈으로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양육하였고, 자신과 가족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 역시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레베카 슈워트가 보여준 해피 엔딩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세상의 많은 소수민족, 하층계급, 여성 등 취약계층은 차별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레베카가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은 사실 몇 십년 전 일제시대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을 보면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약 60여년간 명목적인 차별은 제도적으로는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문화 속에는, 그리고 우리의 습관적 행태 속에는 임지현 교수가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내면화된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게 됩니다.
가부장적 혈통주의는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단체와 사람들 속에도 성차별의 흔적을 깊게 새겨두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소수자들인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가 멸시와 차별의 가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주의, 승자독식주의에 경도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장애인, 아동, 도시빈민들과 같은 취약계층에게 취하고 있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 외에도 인류에게 소수민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게토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탄압하였고, 수많은 집시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우생학과 사회생물학 등 당시 최고의 과학을 동원하여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한 반면, 그 외의 하급(!) 인종들은 아리아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치의 모습이 과연 70여년 전 독일에서만 통용되고 사라져 버렸을까요?
얼마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소위 ‘용산참사’는 이런 파시즘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통용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법과 질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인간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정당성 획득에 급급하는 모습에서 슬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우리 현실 속의 억압과 차별의 논리와 더불어 소위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 진보진영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던 인물들과 단체들의 최근 모습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대외적인 억압기제를 깨뜨리는 행동과 더불어 대내적으로 생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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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기사 제대로 읽는 법 - Health Literacy
김양중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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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건강과 웰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통로가 갖추어지면서 소비자들의 정보 접근능력과 정보 생산능력은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용자에게 친화적으로 바뀌어 가는 전반적인 사회흐름에도 불구하고 공급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의료이다.
사실 병원과 의사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환자도 의사의 사소한 처방 하나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수많은 정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료현장에서 소비자의 목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가?
더 나아가 어째서 소비자가 접하는 의료 관련 정보에서 왜곡이 발생하는가?
저자는 이와 같은 왜곡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정보 수집 및 제공과 해석 과정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정보 오류(information bias)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과 우리나라 암환자들의 상병 특성과 건강보험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암환자의 생존을 비교하여 의료체계의 우수성을 평가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라거나,
특정 병원의 내원 환자 정보가 마치 전체 환자의 정보인 것처럼 보도되거나,
정보의 원천이 기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응답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수집되거나 하는 것이 이런 오류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사실 아차하여 저지르는 실수일 가능성이 높고, 때론 큰 악의(?)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치는 수준에서 관대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원인인데, 이는 정보 제공자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병원의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사소할 수도 있는 질병을 과장하거나,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의 기준을 낮추어 의약품 및 서비스 판매를 촉진하거나,
폐경이나 탈모 등 과거에는 질병이 아닌 것들도 ‘질병화’ 시킴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의료서비스를 더욱 많이 이용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특정한 의도에서 발생하는 왜곡은 공공재(public good)로서의 성격을 가져야 할 의료가 사적 이윤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책의 저자 역시 이와 같은 의료의 영리화와 상업화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다.
특히 현재 정부가 ‘의료의 선진화’를 이야기하면서 영리의료법인의 허용, 의료채권을 비롯한 의료기관 수익구조의 다변화 등의 일련의 정책도입을 통해 의료 현장에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시점에서 저자의 논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business-friendly를 이야기하고, ‘규제완화’가 마치 지상과제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과연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가 영리보장과 규제완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최고의 의료수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국민의 건강수준은 떨어지는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의 위협은 상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취약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70%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도 가족 중 1명이 중증질환자라면 모든 가계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 의료체계의 우선과제는 ‘영리화’ 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건강은 물론 객관적인 신체 현상의 하나일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푸코의 주장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강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 몸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의학에서 개발한 숫자들의 정상범위 안에 들어왔느냐 여부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정상범위도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전문가라고 하는 의료인들에 의하여 정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정상범위 안에 있어야만 건강인가?
예를 들어 정상혈압이 120/80이라고 한다. 그럼 내 혈압이 125/85라면? 나는 ‘비정상’이고, 나는 ‘환자’인가?
정상혈압의 범위를 조금만 낮게 잡아도 관련 의약품의 매출량은 그에 연동되어 요동친다. 그렇다면 우리의 건강이란 기준을 누가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월경과 폐경 등은 오랜 옛날부터 여성들에게 특수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것이 남성중심 의학이 규정한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와 질병규정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어쨌든 [건강기사 제대로 읽는 법]을 통해 건강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실재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성과였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인술(仁術)의 논리 뿐만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서부터 전근대적인 권위의 논리까지 다양한 논리가 들어 있다.
누가, 어떻게 건강을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건강의 기준은 달라지고, 그에 따른 정책의 우선순위도 달라져 왔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몸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여여 함은 물론이고,
건강을 위협하고, 우리 몸의 주체성을 왜곡시키는 사회적 요인에 제대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이제 이런 몸의 주체성 회복 노력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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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을 날아서
프랜시스 하딩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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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수 이문세를 좋아하는 연령대라면 그의 노래 제목으로 더 익숙한 제목이지만,
이루기 어려운 사랑을 꿈속에서라도 이루어보고자 하는 로맨틱한 노래 내용과 달리 책이 담고 있는 소재는 다소 무겁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무거움은 소재일 뿐이고, 책 내용 자체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가상의 왕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면서도 한 소녀의 자아찾기가 흥미롭게 그려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영국의 촉망받는 작가 중 한 명인 프랜시스 하딩의 [깊은 밤을 날아서]는 글읽기가 금지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열쇠장이 길드, 출판업자 길드, 뱃사공 길드 등 3개 길드가 지배하는 땅인 맨들리온.
왕국 전역에서는 글을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거리에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이라도 떨어지면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돌려 피해야 하고, 잠깐이라도 이를 본 사람은 바로 감옥에 끌려 들어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이런 ‘깊은 밤’과 같은 상황에서 모스카란 한 소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몰래 글을 배웠고, 아버지가 죽은 후 친구인지 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클렌트라는 사기꾼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맨들리온에 들어온 모스카는 거기서 거대한 음모 속에 빠진다.
도시를 장악하기 위하여 벌이던 3개 길드와 도시 지배 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 속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는 ‘글’과 ‘책’이란 것을 당연히 존재해 왔던 것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읽을거리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겉으로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제한도 없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민중들이 책읽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서’나 ‘분서갱유’라는 이름의 제도화된 글읽기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지식은 통제를 당하거나, 지배층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변용된 후에야 기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국방부에 의해 규정된 소위 불온서적이란 것을 보면 이런 제도화된 억압이 얼마나 질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깊은 밤을 날아서]의 배경인 맨들리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출판업자 길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유인물이 나돌고, 각 길드와 당국은 이 유인물을 인쇄한 불법인쇄기를 찾으려 한다.
진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자신들의 지배구조가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맨들리온의 지배층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속이면서 급박한 반전을 만들어 낸다.

책 후반부로 갈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맨들리온의 상황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도 들어 있다.
지배층이 말과 글을 가리고, ‘불온’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진실이 알려져 자신들이 말해 온 것이 혹시 거짓이 될까봐 두려워서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진실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고 없애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을까?
정말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상대편에 ‘불온’이란 낙인을 찍고 권력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그리고 진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의 입을 막으려 하는 것이며,
그러한 노력은 성공해 본 적도 없고 자신들의 몰락을 촉진시킬 뿐이란 사실을.

입장의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일수록 중요한 것은 서로의 입장에 대한 존중, 각자의 입장에 대한 토론과 합리적 해결방안 모색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이런 해결방법을 도덕 교과서 속에 사장시키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깊은 밤을 날아서]의 주인공 모스카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벌이는 천방지축 모험을 보면서 무척이나 유쾌하기도 했지만,
또 혹시나 우리 사회가 진실을 알기 위한 모험이 필요한 사회로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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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단편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9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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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에게는 황금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역사의 주도권은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것은 곧 세계의 부(富)를 좌지우지하는 지위로까지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들어섰다고는 하나 볼세비키들은 아직 내부의 반혁명 세력과 투쟁하느라 미국과 체제경쟁을 벌일 힘도 없었다. 곧 외부의 위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발달한 산업은 연일 풍족한 물자를 내놓았고, 이 물자들은 전쟁 이후 재건에 힘쓰던 유럽에 지원되어, ‘완전 공급, 완전 수요’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안정은 당연히 풍부한 물자와 엄청난 부의 축적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런 시대 속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위대한 개츠비] 및 그의 단편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바로 그 시기의 특수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 예외없이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남성이 등장하고, 아름다면서도 당돌한, 때론 철이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면서도 소비욕이 강한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부유했고, 능력이 넘쳤으며, 잘 생기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이들은 유럽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미국식 ‘사교계’를 형성하였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였다.
이들에게 ‘리츠 호텔보다 큰 다이아몬드’는 상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현실이었고,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해적’이 된 것처럼 자신을 꾸며도 재기발랄하다는 평은 들을지언정, ‘철없다’라는 말은 듣지 않는다.
몇 십년을 아프리카-유럽을 돌아다니며 살아도 어느 한 구석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말하고자 한 바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특정한 시대의 작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 ‘보편성’이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의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가 현재에도 널리 회자되고 끊임없이 읽히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가지는 보편성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는 일면 화려한 물질적 성공을 보여주면서, 어느 순간엔가 세속적 성공으로 얻지 못할 것들을 교직시켜 성공 이면의 허무함을 독자들 가슴에 새겨 넣는다.
외양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조화되지 못할 때 그 젊음과 아름다움은 하룻밤 피고 지는 꽃처럼 얼마나 빨리 사그라들어 버리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재산과 성공은 얻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데이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배신만 당한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고(위대한 개츠비),
시간까지도 거슬러 영원한 젊음을 누릴 것과 같았던 벤저민 버튼도 내면의 노화와 죽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살인을 저지르며까지 지키고자 했던 리츠호텔보다 거대한 다이아몬드와 재산은 오히려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며(리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
수십년간 유럽에 거주할만큼 부유했으나, 그 낭비적인 삶이 스스로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갉아먹는 일종의 ‘도플갱어’였음은 심신이 지치고 병든 다음에야 깨닫는다(해외여행).
언뜻언뜻 보이는 이 시대의 ‘성적인 타락’ 역시 화려한 밤거리의 뒷골목과도 같은 지저분함을 보여준다(집으로의 짧은 여행, 해외여행 등).

미국의 1920년대 황금기는 바로 직후인 1930년 세계대공황으로 이어진다.
풍요로 쌓아올린 돈은 그 가치가 떨어지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 끼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야 했다.
유럽을 모방하여 만든 미국식 사교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거품처럼 꺼진 황금시대는 그들이 경험한 첫 번째 전쟁보다 더욱 비참한 제2차 세계대전을 배태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우연이었을까. 피츠제럴드 개인 역시 1920년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1930년 아내인 젤다가 신경쇠약으로 처음 입원하면서 고난의 인생을 시작한다.
물질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던 시대. 그 물질로 세상의 어떤 것도 얻을 수 있으리라던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대.

피츠제럴드는 생명력과 정력이 넘치던 그 시대가 바로 뒤이어 찾아오는 몰락과 결핍의 전주곡이었음을 그의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물질적인 풍족함 끝에 경제위기로 떨어진 작금의 모습도 피츠제럴드의 작품과 인생에서 이미 선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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