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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감동한 논어
사쿠 야스시 지음, 장원철.박홍규 옮김 / 김영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목은 들어봤을 책 [논어],
그리고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있을 공자.
그러나 실상 고백하자면 고등학교 한문이나 국민윤리 시간에 몇몇 문구를 배웠을 뿐 이제까지 논어를 모두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생이 감동한 논어]라는 제목에서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수업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에서
한문은 그다지 환영받는 과목이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입시열기가 우리 못지않은 일본에서는 한 가지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한문교사의 [논어] 수업이 ‘최고로 재미있는 수업’으로 뽑힌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업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오게 되었다니, 그 감동과 재미의 비법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이, 그리고 [논어] 수업이 재미있었던 일차적인 비법은 무엇보다 고전이 주는 묵직한 이름값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논어]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번역본과 해제, 해설서 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논어]는
고전적인 순서, 즉, 제1편 학이(學而), 제2편 위정(爲政)에서부터 시작하여 제20편 요왈(堯曰)의 순서를 따르면서 중요한 용어나 인물에 대한 주석을 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구성이 학문적 엄정함이란 측면에서 가치가 높겠지만,
어쩌면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귀중한 인류의 유산인 [논어]를 멀리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한문 교사였던 사쿠 야스시는 이런 전통적 순서를 모두 해체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만든 범주, 즉, 인생의 목표, 가족과 사랑, 가르침과 배움, 도덕의 힘 등의 대주제를 설정하고,
그 아래 소주제를 정하여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 공자의 말을 다시 모아놓았습니다.
이런 작업으로 인해서 [논어]의 해석이 독특해지고, 신선함과 참신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학이(學而)’편의 유명한 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뒤에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해 보라.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세상이 내버려두겠는가!”라는 말을 덧붙여 해석해 냅니다.
이와 같이 기존의 해석과는 다르게 저자의 해석을 통해 보다 풍부해진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물론 저자는 본인의 해석 다음에는 전통적인 해석을 붙여놓아서 자신의 해석만을 고집하지 않는 열린 책읽기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업시간을 상상하면서 보면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보다보면 자꾸만 몇 년 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교육방송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겹쳐져 생각났는데,
아무래도 사쿠 야스시 선생 역시 딱딱하게 보이는 [논어]의 내용을,
그것도 대학진학을 위해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과목을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좀 더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수업을 진행했겠죠.
[논어]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런 스승의 노고만큼은 잘 전달되었습니다.
이 책이 생동감을 가지게 된 또 한가지 중요한 비법은
[논어]의 인칭을 변화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본래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 형식으로써, 공자의 말에는 ‘자왈(子曰)'이란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3인칭 시점의 책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자는 공자의 말을 따와 이를 1인칭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마치 그 자리에서 공자님 말씀을 듣는 듯한 생생함을 부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 또는 원시유가 사상이 현재에 주는 함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는
유가사상이 가진 폐쇄성과 신분질서에 안주하려는 보수성, 남성과 성인 중심의 문화 옹호 및 차별성 등을 지적하며
유교문화 속에 숨은 봉건적인 인습을 폭로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으며, 향후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유가사상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지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극복지점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그 지점이 공자의 생각, 즉, 원시유가사상이 아닌가 합니다.
과거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몇 줄 읽었던 [논어]는 그야말로 수박겉핥기였습니다.
이번에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는 그렇게 사방으로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고,
유가사상 역시 무조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당시의 사회체제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보이기는 하지만,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은 약육강식과 힘=정의라는 등식이 통용되던 춘추전국시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무척이나 상식적이면서 진보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공자는 폐쇄성과 차별성을 내포하거나 지배집단 또는 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꽁생원처럼 현실도피적인 삶을 영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힘이 곧 진리였던 시대 속에서 땅에 떨어진 생명존중과 인간으로서의 길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강조한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정치가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후대에라도 달성하고자 원했던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의 부국강병 원칙 속에 공자의 뜻은 이룰 수 없었고,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통해 유교는 명맥을 잇는 것 조차 위협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가사상이 결국 살아남은 것은 한나라 이후 지배층에 그 이념이 잘 부합된 점도 물론 있지만,
공자가 처음 가르쳤던 인간애와 진보성을 가지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상식’이 그 사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한무제 이후 유교가 제도권에 편입되어 질서와 체제를 옹호하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또한 송나라 주희 이후 정차 형이상학적 철학에 중점을 둔 학문으로 변모하면서,
원시 유가사상의 건강함이 점차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좋든 싫든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유교의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현대는 어떻게 보면 모양만 다소 달라졌다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러한 시기에 인류가 그동안 쌓아 온 지혜는 어떻게 해결점을 찾아낼 것인지...
원시 유가사상, [논어]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다 꼼꼼한 논어 읽기에 도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