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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이는 박민규 작가의 범상치 않은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게 되었다.
무척이나 유쾌하면서도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게 한 작품이면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준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980년대 초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정치적 암흑기요, 독재의 밤이 전성기를 향해 달리던 그 시기를 어쩌면 이렇게 재기발랄하게, 그러면서도 은근한 비꼼을 가지고 쓸 수 있는지 감탄하며 읽어내려 갔다.
나는 아직도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첫 경기 MBC 이종도 선수의 9회말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 OB 김유동 선수의 만루홈런을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만년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처참한(!!!) 성적도 기억하고 있다.
이듬 해에 ‘장명부’라는 재일동포 투수를 영입하여 성적을 일신하였지만, 그 다음 해에는 다시 꼴찌로 돌아가 연패 기록을 세우고(18연패인가 그랬다),
결국에는 ‘청보 핀토스’라는 전혀 다른 팀으로 팔려나간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 때를 아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예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공휴일이나 일요일마다 허름한 글러브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꼬맹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의 사진을 모으려고 하루에도 몇 개씩 모 회사의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은 기억과 동그란 딱지마다 나온 선수들의 온갖 기록을 달달달 외우던 기억들을 되살렸다.
한 순간이나마 그 때의 나를 돌이켜 보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박민규 작가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그런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 땐 그랬지’, ‘그 때가 좋았지’라는 단순한 마음의 위로를 주는 차원에서만 그치는 소설이 아니란 점이 놀라우면서도 뜨끔하였다.
이 책은 프로야구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양식과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어떻게 우리의 삶이 ‘프로’나 ‘전문화’라는 듣기 좋은 말에 편승하여 순수함을 잃어 왔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쉼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바퀴,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습속화한 정치적 억압의 기제들에 무비판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느꼈던 광고 중에 하나는 IMF 경제위기가 닥치기 1-2년 전에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광고였다.
우리나라의 초일류기업이라는 곳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였는데,
이 광고는 우리는 경쟁하고 있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절대 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사회체제, 제도까지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당시에 취업을 위해 면접장에 선 우리들은 면접관들이 “입사하고 난 후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제비들처럼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분야의 프로가 되겠습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성과에 대해서 받는 보상은 정말 소중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모든 사람이 1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1등을 대우해주는 것만큼 노력해도 1등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의식과 체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전문적인 프로가 할 역할이 있다면, 아마추어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
지금의 경제체제와 사회, 교육체제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다름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1등부터 꼴찌까지 우선 줄을 세우고 난 후에 1등 이외의 삶을 패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글쎄..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생은 모두가 하되 그 성과는 일부가 가져가는 ‘승자독식사회’의 논리가 은연중에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은 의미가 아닐런지..
북구 유럽의 국가들도 1980년대 말에 경제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사회보장과 복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유지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유도함으로써 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복지의 강국으로 남았다.
우리나라는 1997년 경제위기가 다가왔을 때, 1등과 프로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책임회피와 ‘이대로!’를 외친 것 이외에 무엇을 했는가 묻고 싶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1등이 보기에 낙오자인 사람들을 위해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도...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당의정(糖衣錠, sugar-coated tablet)이란 쓴 맛의 약을 먹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약의 겉면을 달콤하게 만든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마치 당의정처럼
유쾌하고 달콤한 첫 맛 뒤에 씁쓸하면서도 쓰라린 진짜 맛을 감추고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쓰디쓴 약이 몸의 건강을 되찾아 주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말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문제를 제시해 준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또한 여전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최선과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아마추어 분들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