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기사 제대로 읽는 법 - Health Literacy
김양중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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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건강과 웰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통로가 갖추어지면서 소비자들의 정보 접근능력과 정보 생산능력은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용자에게 친화적으로 바뀌어 가는 전반적인 사회흐름에도 불구하고 공급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의료이다.
사실 병원과 의사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환자도 의사의 사소한 처방 하나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수많은 정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료현장에서 소비자의 목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가?
더 나아가 어째서 소비자가 접하는 의료 관련 정보에서 왜곡이 발생하는가?
저자는 이와 같은 왜곡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정보 수집 및 제공과 해석 과정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정보 오류(information bias)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과 우리나라 암환자들의 상병 특성과 건강보험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암환자의 생존을 비교하여 의료체계의 우수성을 평가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라거나,
특정 병원의 내원 환자 정보가 마치 전체 환자의 정보인 것처럼 보도되거나,
정보의 원천이 기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응답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수집되거나 하는 것이 이런 오류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사실 아차하여 저지르는 실수일 가능성이 높고, 때론 큰 악의(?)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치는 수준에서 관대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원인인데, 이는 정보 제공자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병원의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사소할 수도 있는 질병을 과장하거나,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의 기준을 낮추어 의약품 및 서비스 판매를 촉진하거나,
폐경이나 탈모 등 과거에는 질병이 아닌 것들도 ‘질병화’ 시킴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의료서비스를 더욱 많이 이용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특정한 의도에서 발생하는 왜곡은 공공재(public good)로서의 성격을 가져야 할 의료가 사적 이윤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책의 저자 역시 이와 같은 의료의 영리화와 상업화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다.
특히 현재 정부가 ‘의료의 선진화’를 이야기하면서 영리의료법인의 허용, 의료채권을 비롯한 의료기관 수익구조의 다변화 등의 일련의 정책도입을 통해 의료 현장에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시점에서 저자의 논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business-friendly를 이야기하고, ‘규제완화’가 마치 지상과제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과연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가 영리보장과 규제완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최고의 의료수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국민의 건강수준은 떨어지는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의 위협은 상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취약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70%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도 가족 중 1명이 중증질환자라면 모든 가계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 의료체계의 우선과제는 ‘영리화’ 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건강은 물론 객관적인 신체 현상의 하나일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푸코의 주장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강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 몸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의학에서 개발한 숫자들의 정상범위 안에 들어왔느냐 여부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정상범위도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전문가라고 하는 의료인들에 의하여 정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정상범위 안에 있어야만 건강인가?
예를 들어 정상혈압이 120/80이라고 한다. 그럼 내 혈압이 125/85라면? 나는 ‘비정상’이고, 나는 ‘환자’인가?
정상혈압의 범위를 조금만 낮게 잡아도 관련 의약품의 매출량은 그에 연동되어 요동친다. 그렇다면 우리의 건강이란 기준을 누가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월경과 폐경 등은 오랜 옛날부터 여성들에게 특수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것이 남성중심 의학이 규정한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와 질병규정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어쨌든 [건강기사 제대로 읽는 법]을 통해 건강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실재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성과였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인술(仁術)의 논리 뿐만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서부터 전근대적인 권위의 논리까지 다양한 논리가 들어 있다.
누가, 어떻게 건강을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건강의 기준은 달라지고, 그에 따른 정책의 우선순위도 달라져 왔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몸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여여 함은 물론이고,
건강을 위협하고, 우리 몸의 주체성을 왜곡시키는 사회적 요인에 제대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이제 이런 몸의 주체성 회복 노력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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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을 날아서
프랜시스 하딩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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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문세를 좋아하는 연령대라면 그의 노래 제목으로 더 익숙한 제목이지만,
이루기 어려운 사랑을 꿈속에서라도 이루어보고자 하는 로맨틱한 노래 내용과 달리 책이 담고 있는 소재는 다소 무겁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무거움은 소재일 뿐이고, 책 내용 자체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가상의 왕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면서도 한 소녀의 자아찾기가 흥미롭게 그려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영국의 촉망받는 작가 중 한 명인 프랜시스 하딩의 [깊은 밤을 날아서]는 글읽기가 금지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열쇠장이 길드, 출판업자 길드, 뱃사공 길드 등 3개 길드가 지배하는 땅인 맨들리온.
왕국 전역에서는 글을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거리에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이라도 떨어지면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돌려 피해야 하고, 잠깐이라도 이를 본 사람은 바로 감옥에 끌려 들어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이런 ‘깊은 밤’과 같은 상황에서 모스카란 한 소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몰래 글을 배웠고, 아버지가 죽은 후 친구인지 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클렌트라는 사기꾼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맨들리온에 들어온 모스카는 거기서 거대한 음모 속에 빠진다.
도시를 장악하기 위하여 벌이던 3개 길드와 도시 지배 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 속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는 ‘글’과 ‘책’이란 것을 당연히 존재해 왔던 것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읽을거리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겉으로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제한도 없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민중들이 책읽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서’나 ‘분서갱유’라는 이름의 제도화된 글읽기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지식은 통제를 당하거나, 지배층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변용된 후에야 기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국방부에 의해 규정된 소위 불온서적이란 것을 보면 이런 제도화된 억압이 얼마나 질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깊은 밤을 날아서]의 배경인 맨들리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출판업자 길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유인물이 나돌고, 각 길드와 당국은 이 유인물을 인쇄한 불법인쇄기를 찾으려 한다.
진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자신들의 지배구조가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맨들리온의 지배층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속이면서 급박한 반전을 만들어 낸다.

책 후반부로 갈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맨들리온의 상황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도 들어 있다.
지배층이 말과 글을 가리고, ‘불온’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진실이 알려져 자신들이 말해 온 것이 혹시 거짓이 될까봐 두려워서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진실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고 없애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을까?
정말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상대편에 ‘불온’이란 낙인을 찍고 권력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그리고 진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의 입을 막으려 하는 것이며,
그러한 노력은 성공해 본 적도 없고 자신들의 몰락을 촉진시킬 뿐이란 사실을.

입장의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일수록 중요한 것은 서로의 입장에 대한 존중, 각자의 입장에 대한 토론과 합리적 해결방안 모색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이런 해결방법을 도덕 교과서 속에 사장시키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깊은 밤을 날아서]의 주인공 모스카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벌이는 천방지축 모험을 보면서 무척이나 유쾌하기도 했지만,
또 혹시나 우리 사회가 진실을 알기 위한 모험이 필요한 사회로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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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단편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9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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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에게는 황금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역사의 주도권은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것은 곧 세계의 부(富)를 좌지우지하는 지위로까지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들어섰다고는 하나 볼세비키들은 아직 내부의 반혁명 세력과 투쟁하느라 미국과 체제경쟁을 벌일 힘도 없었다. 곧 외부의 위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발달한 산업은 연일 풍족한 물자를 내놓았고, 이 물자들은 전쟁 이후 재건에 힘쓰던 유럽에 지원되어, ‘완전 공급, 완전 수요’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안정은 당연히 풍부한 물자와 엄청난 부의 축적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런 시대 속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위대한 개츠비] 및 그의 단편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바로 그 시기의 특수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 예외없이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남성이 등장하고, 아름다면서도 당돌한, 때론 철이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면서도 소비욕이 강한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부유했고, 능력이 넘쳤으며, 잘 생기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이들은 유럽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미국식 ‘사교계’를 형성하였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였다.
이들에게 ‘리츠 호텔보다 큰 다이아몬드’는 상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현실이었고,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해적’이 된 것처럼 자신을 꾸며도 재기발랄하다는 평은 들을지언정, ‘철없다’라는 말은 듣지 않는다.
몇 십년을 아프리카-유럽을 돌아다니며 살아도 어느 한 구석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말하고자 한 바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특정한 시대의 작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 ‘보편성’이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의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가 현재에도 널리 회자되고 끊임없이 읽히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가지는 보편성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는 일면 화려한 물질적 성공을 보여주면서, 어느 순간엔가 세속적 성공으로 얻지 못할 것들을 교직시켜 성공 이면의 허무함을 독자들 가슴에 새겨 넣는다.
외양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조화되지 못할 때 그 젊음과 아름다움은 하룻밤 피고 지는 꽃처럼 얼마나 빨리 사그라들어 버리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재산과 성공은 얻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데이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배신만 당한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고(위대한 개츠비),
시간까지도 거슬러 영원한 젊음을 누릴 것과 같았던 벤저민 버튼도 내면의 노화와 죽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살인을 저지르며까지 지키고자 했던 리츠호텔보다 거대한 다이아몬드와 재산은 오히려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며(리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
수십년간 유럽에 거주할만큼 부유했으나, 그 낭비적인 삶이 스스로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갉아먹는 일종의 ‘도플갱어’였음은 심신이 지치고 병든 다음에야 깨닫는다(해외여행).
언뜻언뜻 보이는 이 시대의 ‘성적인 타락’ 역시 화려한 밤거리의 뒷골목과도 같은 지저분함을 보여준다(집으로의 짧은 여행, 해외여행 등).

미국의 1920년대 황금기는 바로 직후인 1930년 세계대공황으로 이어진다.
풍요로 쌓아올린 돈은 그 가치가 떨어지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 끼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야 했다.
유럽을 모방하여 만든 미국식 사교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거품처럼 꺼진 황금시대는 그들이 경험한 첫 번째 전쟁보다 더욱 비참한 제2차 세계대전을 배태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우연이었을까. 피츠제럴드 개인 역시 1920년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1930년 아내인 젤다가 신경쇠약으로 처음 입원하면서 고난의 인생을 시작한다.
물질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던 시대. 그 물질로 세상의 어떤 것도 얻을 수 있으리라던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대.

피츠제럴드는 생명력과 정력이 넘치던 그 시대가 바로 뒤이어 찾아오는 몰락과 결핍의 전주곡이었음을 그의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물질적인 풍족함 끝에 경제위기로 떨어진 작금의 모습도 피츠제럴드의 작품과 인생에서 이미 선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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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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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이는 박민규 작가의 범상치 않은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게 되었다.
무척이나 유쾌하면서도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게 한 작품이면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준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980년대 초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정치적 암흑기요, 독재의 밤이 전성기를 향해 달리던 그 시기를 어쩌면 이렇게 재기발랄하게, 그러면서도 은근한 비꼼을 가지고 쓸 수 있는지 감탄하며 읽어내려 갔다.

나는 아직도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첫 경기 MBC 이종도 선수의 9회말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 OB 김유동 선수의 만루홈런을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만년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처참한(!!!) 성적도 기억하고 있다.
이듬 해에 ‘장명부’라는 재일동포 투수를 영입하여 성적을 일신하였지만, 그 다음 해에는 다시 꼴찌로 돌아가 연패 기록을 세우고(18연패인가 그랬다),
결국에는 ‘청보 핀토스’라는 전혀 다른 팀으로 팔려나간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 때를 아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예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공휴일이나 일요일마다 허름한 글러브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꼬맹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의 사진을 모으려고 하루에도 몇 개씩 모 회사의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은 기억과 동그란 딱지마다 나온 선수들의 온갖 기록을 달달달 외우던 기억들을 되살렸다.
한 순간이나마 그 때의 나를 돌이켜 보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박민규 작가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그런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 땐 그랬지’, ‘그 때가 좋았지’라는 단순한 마음의 위로를 주는 차원에서만 그치는 소설이 아니란 점이 놀라우면서도 뜨끔하였다.
이 책은 프로야구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양식과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어떻게 우리의 삶이 ‘프로’나 ‘전문화’라는 듣기 좋은 말에 편승하여 순수함을 잃어 왔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쉼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바퀴,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습속화한 정치적 억압의 기제들에 무비판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느꼈던 광고 중에 하나는 IMF 경제위기가 닥치기 1-2년 전에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광고였다.
우리나라의 초일류기업이라는 곳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였는데,
이 광고는 우리는 경쟁하고 있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절대 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사회체제, 제도까지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당시에 취업을 위해 면접장에 선 우리들은 면접관들이 “입사하고 난 후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제비들처럼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분야의 프로가 되겠습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성과에 대해서 받는 보상은 정말 소중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모든 사람이 1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1등을 대우해주는 것만큼 노력해도 1등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의식과 체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전문적인 프로가 할 역할이 있다면, 아마추어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

지금의 경제체제와 사회, 교육체제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다름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1등부터 꼴찌까지 우선 줄을 세우고 난 후에 1등 이외의 삶을 패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글쎄..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생은 모두가 하되 그 성과는 일부가 가져가는 ‘승자독식사회’의 논리가 은연중에 우리 사회 속에 자리잡은 의미가 아닐런지..

북구 유럽의 국가들도 1980년대 말에 경제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사회보장과 복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유지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유도함으로써 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복지의 강국으로 남았다.
우리나라는 1997년 경제위기가 다가왔을 때, 1등과 프로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책임회피와 ‘이대로!’를 외친 것 이외에 무엇을 했는가 묻고 싶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1등이 보기에 낙오자인 사람들을 위해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도...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

당의정(糖衣錠, sugar-coated tablet)이란 쓴 맛의 약을 먹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약의 겉면을 달콤하게 만든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마치 당의정처럼
유쾌하고 달콤한 첫 맛 뒤에 씁쓸하면서도 쓰라린 진짜 맛을 감추고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쓰디쓴 약이 몸의 건강을 되찾아 주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말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문제를 제시해 준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또한 여전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최선과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아마추어 분들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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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족을 믿지 말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이선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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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빠진 일상에 치였기 때문인지 요즘 읽은 하나같이 무거운(?) 주제의 책들에 질려서인지
친구에게 재미있는 책 추천을 부탁했더니 바로 이 책 추천이 들어왔다.
그리고 모처럼 낄낄거리면서 편안한 독서를 했다. 고맙다. 친구야!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시트콤을 본 것 같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빨간색 표지의 책을 읽으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던 사람을 보신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다.

이 책은 스펠만 가족 6명의 이야기인데, 엉뚱하고 엽기적인 가족이다.
이들 중 아빠, 엄마, 삼촌, 맏딸은 사립 수사관(사립탐정) 일을 하고,
오빠는 변호사, 10대 초반인 막내딸은 가업을 잇기(!) 위한 수업중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척 하지만,
미행을 하든 도청을 하든 어떻게 해서든 서로의 사생활을 파헤쳐낸다.
그리고 그걸 약점으로 잡아서 거액의(?) 용돈을 뜯어내거나 협박(!)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이 동문서답과 막말의 향연인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당한 사람은 또 가만 있느냐...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약점을 잡아내서 통쾌하게(?) 복수한다.

이야기는 이미 여덟명의 남자친구를 갈아치운 맏딸 이자벨이
치과의사인 대니얼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자벨은 얼떨결에 대니얼에게 자신이 교사이며, 가족들도 모두 교사 집안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프라이버시와 사생활 보장과는 담을 쌓은 가족들은 일치단결(!!) 합심하여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상심하여 사립수사관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이자벨에게 부모님은 마지막 일을 제안한다.
12년 전 캠프에서 실종된 앤드류라는 소년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사실 인류가 만든 무한한 조직가운데 가족만큼 묘한 것도 없을 것이다.
가족에게서 사랑을 받지만, 살다 보면 가족만큼 웬수가 되는 사람도 별로 없다.
힘들 때마다 언제나 믿어주는 ‘가족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나부터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가족들에게 얼마나 함부로 대하고,
때론 가족들을 미워하고 집을 나와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하긴..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혈육의 정이란 것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겠구나 생각되기도 한다.

스펠만 가족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틈엔가 마음 속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자리잡게 됨을 느낀다.
정말 세상에 이런 가족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엽기적인 가족들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들의 모습에 내 가족의 모습을 투영시키면서
스펠만 가족이 모두 행복하게 하나가 되어 잘 살기를 마음 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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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que 2010-05-0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으로 들어와 여러 글들 잘 읽고 갑니다. 글을 차분하고 맛깔나게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서재 제목을 보면 여자분 같은데 박식하기도 하시고.... 종종 들러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