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는 홍콩에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홍콩에 있다.
습한 날씨가 너무나 당연하고,
역시나 뜨겁디 뜨거운 몸에 와닿아 방울져 떨어지기 직전의 뜨뜻한 긴장감마저
품게 되는, 그런 도시에,
똑같은 형태의 운동을 반복하며 런닝차림으로 돌아다니는 할아버지와
공원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긴 칼을 들리우고 검무를 가르치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아니 그냥 그대로 영화의 장면에 들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그런 곳에.
내가 걸으며 지나다닌다.
창밖에 걸어놓은 빨래들이 불안하면서도 안전하게 바람에 하늘거리고,
여차하면 걷는 이들의 몸을 터뜨려 버릴 것 같은, 축축한 더위를 지나치고
가장 싼 음식점에 들어가 시키자 마자 나오는 국수를 국물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나와버리는.
중고등학교 때 보던 영화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이해되는 것 같고,
그리고 그 모습의 상당부분을 아직도 갖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반해버린다. 그것 외에는 솔직히 내가 홍콩에 해줄 게 없다.
주성치를 봤으면 좋겠다.
아마 영화처럼 코믹한 짓은 안하겠지만, 적어도 언제나 멋졌던 그놈의 눈빛을 실제로 봤으면 좋겠다.
오맹달도 봤으면 좋겠다. 영화의 이미지를 너무 그대로 가져가서 좀 미안하지만, 내 숙소 근처에 있는 수많은 자동차 공업사의 작업 반장쯤 되서, 런닝 안입어도 좋으니 배나온 채로 병맥 하나 따서 시원하게 먹고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 문장을 쓰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그냥 빨래 휘날리는 파란 볕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담배를 뻑뻑 피어대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 모습은 너무 멀고 쓸쓸해 보여서 싫다.
장만옥도 매염방도, 주인도, 공리도, 관지림과 임청하도 양가휘도.
양조위는 보는 순간 잠시 얼었다가 지나쳐버릴까.
..
대략 2개월의 여정으로 홍콩에 왔다. 본래 일정보다 2주가 줄어서 좀 안타깝지만,
그래도 내게 65일여의 일정은 매우 행복하다.
누나의 말대로 무조건 잘 지내다 올 예정이다.
와서도 계속 들고다닐 책이 몇개 있어 다 들고 와버렸다.
그냥 둘러보면 된다. 적어도 가라는 데에 그곳이 있는 걸 경험하면,
그걸로도 충분히 좋은 책이 된다. 이 책도 그렇다.
갔던 곳을 다시 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나 같은 뜨내기들이 설렘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지난하고 지겹게(아, 재미있어 한다면 죄송합니다) 끈질기게 채우고 고쳐온
사람들에게는 일단 박수가 최고다.
이 책의 백미는 몇몇 배우들이 단골이라는 음식점을 실어둔 것.
마침 내가 사는 동네에도 주성치의 단골집이 있단다.
근데 보면 뭐라 말을 걸지. 내가 기억하는 영화는 지존무상3, 신정무문 이런거란 말이지. 재연을 해달라고 하기도 뭣하고. 같이 사진이나 찍으면 그걸로도 정말 좋겠네.
당분간 같이 지낼 수 없게 된 후배가 이 책을 선물해주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검토가 꼭 필요한 보고서를 보내주면 대충보지 않고,
페닌슐라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를 먹으며 봐주겠다고 했다.
아 순서가 바뀌었나. 암튼.
홍콩인이 쓴 홍콩 식도락기다.
맛집 정보도 있긴 하지만,
맛좋은 음식을 이토록 욕망할 수 있는 모습이 너무 반갑다.
그러고보니 홍콩에서 음식을 싫어하는 건, 정말 고역일텐데.
음식은 얼굴에 양보하는 게 아니라 몸에 먹여두는 게 최고라는 점에서 이 책 좋다. 홍콩에서 살을 빼가면 비난 받을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난 정말이지, 유식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책을 고를 떄도 그랬다.
저자가 주성철이라 반가워 샀다. 당연히 내가 아는 분은 아니다.
도대체 주성치와 두 글자가 같은 거 빼고 뭔 공통점이 있다고.
역시나, 기대도 안했지만 주성치의 동생은 아니어서 잠깐 실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니 왜 이 접속사를 붙여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네) 이 책은 그냥 좁다, 쇼핑 외엔 볼거 없다로만 여겨지기도 하는 홍콩의 공간감을 무한대로 확장해 놓은 책이다. 좋다.
추억을 담게 된 장소가 아무리 좁더라도 내겐 끝없는 기대와 설렘을 가져다주며
몇 시간을 홀로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것 처럼,
홍콩이라는 이름 그대로, 홍콩에서 홍콩으로 보내질 것 같은 매력적인 책이다.
.
첫 날은 일단 이렇게 흘려보낸다.
3000원짜리 국수를 먹고,
1000원짜리 칭따오 맥주!(이건 정말 경천의 동짓날 같은 행운이다)를 들고(아직 안 땄다. 벌컥거리면 이거 못쓸 테니까)
좋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냥.
가끔 애기들 그림일기 쓰는 것 마냥, 찍은 사진이나 무의미하게 좀 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린다. 멋대로.
어쩌면 홍콩의 무더위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혼자만의 착각에 올린 사진. 눈에 땀이 안차는 건 행복한 일이다.
트램을 보자마자 떠올린 생각은, 해가 떠있는 동안은 안 타고 싶다는 것.
몇시간을 고아냈는지, 부드러운 소고기 쌀국수.
시키면 10초 후에 바로 나온다. 싸다. 그리고 맛있다.
그리고..
이제 500ml 한캔에 천원짜리 싸구려 맥주(홍콩 좋은 곳이다 진짜)와 함께 할 시간!
이얏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