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책을 만나면 일단 그 두께를 보고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다. 이 행위는 책에 대한 내 태도의 일면을 나타낸다. 내게 책은 설레는 새로운 문이면서 부담스러운 짐이기도 하다.  저자가 펼치는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나를 설레게 한다면, 그와 대칭되는 지점에선 독서행위에 대한 심리적인 강박이 깔려 있다는 의미이다.  왜 나는 독서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을까. 


일단 기억력이 너무 안좋아서 다 읽고 나서도 정확한 줄거리를 꿰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전에 <속죄>를 읽고 강의실에 갔을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눈 또다른 독서가들의 경우, 정확한 줄거리를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나와 다르게 그들은 너무 빨리 읽어서인지 작가의 암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그때 이언매큐언은 단지 몇 문장만으로 자신의 의도를 나타냈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에서 그들은 가속도가 붙은 탓으로 작가의 암시를 놓친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은 판명됐다. 

그러나 그들이 단시간에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세심한 부분을 놓친 데 비해 나는 열심히 정독을 해 놓고도 책을 덮자마자 줄거리를 잊어버리니 내가 독서를 더 잘했다는 자평은 할 수 없다. 

오히려 비교를 굳이 신랄하게 해보자면, 능률 면에서 나의 느려터진 독서가 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 세 권을 읽을 때 나는 한 권을 읽으니, 그들은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세 작가를 만나고 세 개의 세상을 알게 되지만, 나는 한 작품에 한 작가만을 만나는 꼴이니 한 세계밖에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읽었으면 기억이라도 오래 해야 될텐데, 기억력은 그런 배려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한탄은 쓸 데 없는 짓이다. 기억력 향상은 의학으로도 별무신통일 테니까 . 

특별한 방법은 역시, 없다. 그냥 이렇게 독후감이라도 쓰면서 저 무의식 어디쯤에 먼지만큼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작품들로 옮겨가는 수밖에.... 그래서 독후감은 계속된다.


<에브리맨>은 역자의 후기까지 합해도 이백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나의 강박은 날아가고  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독서대에 끼운다. 그러나 작가의 사유는 이백 페이지가 아니다. 페이지에 비례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회한, 해서 어찌할 수 없는 허무주의로 독자는 이끌려간다. 모든 사람들 대다수가 그래, 나 역시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허무하게, 나 역시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을 수 밖에 없겠지, 라는 비관에 빠지게 만든다. 허무하고 허무한 생의 말로, 아쉬움과 서러움에 젖어들 노년의 시간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에브리맨>의 '그'는 세 번 이혼한 남자다. '그'는 말년을 혼자 외롭게 살다 저세상으로 떠난다. 그의 첫째 아내에게서 낳은 두 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증오와 미움을 안고 산다. 장례식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두 아들은 그럴 만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로서 금전적인 책임은 졌지만 일상을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무를 완전히 지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두 아들과 다르다. 그녀는(낸시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딸로서의 책임감을 스스로 느낄 줄 안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가장 관심을 갖고 사랑해 준 딸에게 그는 고마움과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그와 일상을 같이하는 사람은 없다. 세 아내는 이혼했으니 당연히 곁에 없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경원시하니 소용이 없고. 그래도 낸시는 이혼녀로 쌍둥이를 키우고 아버지에게 애정을 담뿍 쏟으니 손주들과 딸과 함께 살아볼 생각을 그는 했다. 그러나 딸은 자신의 어머니와 살아야 할 상황을 맞는다. 그러니까 두 번째 부인이 늙어, 그녀도 노환과 질병을 심각하게 안고 있다. 누군가 그녀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딸 곁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을 그리워한다. 형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으며 그가 어려울 때마다 알아서 그를 도와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형은 너무나 완벽한 사람에 속했다. 형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여자들을 쫓아다니다 혼자가 된 자신에 비해 온전한 가정을 지키고 있다. 더구나 형은 여러번 수술을 한 그와 달리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몸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심각한 질환과 수술에 지치고,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형에 대한 반감과 질투로 나타났다. 형과의 사이는 멀어진다. 

하지만 지금 완전히 혼자가 된 그는 형이 필요하다. 낸시와 함께 살 수 없는 지금, 형의 곁에서 함께 살면서 자상하고 따듯한 형의 마음, 돌봄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형은 먼 이국 땅으로 떠나있다. 갑자기 형에게 자신을 위해 돌아오라고, 자신에겐 형이 당장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친족들에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쉽게 그들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그는 죽는다. 수술을 받고, 회복되지 못한 채 죽는다. 

그는 열심히 살았지만 구멍이 많았다. 육체적 쾌락을 쫓아 바람을 피웠고 이혼을 했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인 아내를 잃었다. 두 아들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주지 못해 증오심을 뿌려주었고 평생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다. 늘 다정했던 형과 스스로 멀어진 후에 후회를 했고, 죽기 전, 수술실에 들어갈 때에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죽은 후, 그를 위해서 슬퍼해 준 사람은 딸 낸시와 형 하위, 그리고 잠시 그를 간호하고 도왔던 모린 정도 밖에 없었다.그는 악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인도 아니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한편으론 부도덕하게 행동한 난봉꾼이기도 했다. 

그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았고,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혼자 마지막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는 에브리맨이다. 훌륭한 인간의 전범을 보이지 못한, 그러나 비난받을 만큼 악하지도 않았던, 그저 그런 한 남자, 한 인간. 

그는 대다수의 우리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최후의 모습은 쓰디쓰게 내게 다가온다. 우리들 이야기, 우리들의 말로, 바로 나의 미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나약하고 한심하고 어리석고, 후회와 서러움이 자리할 노년을 맞이할 것 같은 평범한 나....


필립로스는 소설을 참 쉽게 쓰는 것 같다. 심혈을 기울여 공을 들여 한 자 한 자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하듯 쉽고 친밀하게 읽힌다. 어쩌면 이런 작가가 잘 쓰는 작가이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바람피는 장면에서는 혹시 이 상황들이 작가가 직접 겪었던 일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작가 자신이 바람핀 얘기처럼 느껴져서 우습기도 하고 그런 상상을 하는 내자신이 더 이상한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거의 포르노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자신을 다 까발릴 수 있는 용기있는 작가인지도.....


인간 대다수는 에브리맨, 나 또한 에브리맨.... 니체의 초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상을 살고 나를 사랑하고 삶을 즐기고(그러나 바람피는 '그'처럼 되자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괜찮은 최후를 맞기 위해 자신의 주변과 자신을 잘 정리해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허무함에 젖지 말기. 비관주의에 빠지지 말기. 체념에 나를 내어 주지 말기.... 가족을 사랑하고 사랑해주기.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열심히 배우고 나를 세우고 나를 이루기. 나 자신을 이루고 나를 실현하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9-06-13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중반까지 밖에 못 읽고 댓글합니다 ㅜㅜ
속도는 항상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밑줄을 그으며 잠시 머물러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lea266 2019-07-0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왜 이 댓글을 읽지 못했는지 아쉽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으며 읽어야 그나마 제대로 읽는 느낌이라 아예 연필을 들고 독서를 합니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쉬며 읽은 문장을 다시 읽기도 합니다 잠시 머물러 보는 습관...너무나 공감합니다~^^ 책이 있어 괴롭고 그 책때문에 행복하고..... ㅎㅎ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내겐 세상 작가들 전부가 동경과 전범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몇 작가는 내 애정과 존경의 대상인데 에밀 졸라는 특히 그렇다.  그는 <목로주점>에서 소설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묘사와 서사, 문장, 인간을 향한 냉철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뒷면에 흐르는 애정과 연민. 그런 졸라의 첫번째 소설가로서의 등단작이라 할 <테레즈 라캥>.


지난 학기에 무슨 일인가 바빴던 관계로 패스했던 이 작품을 여름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잠시 짧은 이 방학을 이용해 읽었다. 4일부터 6일까지 읽었으니 워낙 독서속도가 느린 나로서는 꽤 빨리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테레즈 라캥>은 읽기가 수월하다. 일단 서사 자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인물이 많지 않다. 문장은 길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쉬운 단어로 직설적으로 쓰여있다.  그래서 그간 읽은 어떤 책보다 스트레스가 가장 적은 작품이었다. 에밀 졸라의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자면 여러면에서 소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 자신의 재능 전체를 보여주기에는 자신감이 부족했을 첫 작품이라서 그런 것도 같고, 단일한 사건과 주제를 다루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만만하게 생각할 소설은 결코 아니다. 에밀 졸라는 이 첫 작품에서 벌써 자신의 사상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주의 사상. 인간이란 존재는 여지없이 부모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 예속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생래적인 기질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기란 쉽지 않고 거기다 환경이 열악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다는- 쉽게 해석해 본,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자연주의 사상이다.

졸라는 이 <테레즈 라캥>을 첫 작품으로 시작해 자신의 작가 생활 전체를 자연주의 사상을 펼쳐내는 소설들로 채워냈다. 대단한 목표였고 창의적인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 날개 뒷면에는 졸라의 이 작품의 서문 한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이 있다. '해부학자가 시체를 해부하듯 인간 영혼의 광기와 공포를 해부한다.' 졸라는 말 그대로 자신이 창조한 인물, 테레즈와 로랑의 심리를 파헤치고 해부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자연주의 소설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서문 바로 앞페이지 '일러두기'에 서문에 관한 설명이 있다.  "테레즈 라캉"은 1867년에 출간되었으나 1868년 2판에서 졸라는 서문을 달아 이 작품이 자연주의 소설관의 기초를 확립했다, 라고).


테레즈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고모에게 얹혀살게 되는데, 고모에게는 카미유라는 아들이 있다. 그는 병약해 라캥고모는 오직 그 아들에게 헌신한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테레즈를 아들 방에 넣고 아들을 보살피게 한다. 테레즈는 순전히 카미유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늘 침울하고 조용한 테레즈, 그러나 소녀의 속 깊은 곳에서는 분노와 슬픔이 쌓여간다. 

결국 라캥부인은 테레즈와 카미유를 결혼시키는데, 이 결혼은 테레즈에게 카미유에 대한 증오를 커지게 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그러다 젊은 부부와 어머니는 베르농을 떠나 파리로 가서 퐁네프 파사주에 있는 잡화상을 경영하게 된다. 카미유는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직장을 잡고 어느날 어릴 적 베르농에서 친구였던 로랑을 집으로 데려온다. 병약하고 나약하기까지 한 카미유와의 결혼생활을 혐오하던 테레즈에게 갑자기 등장한 로랑은 한 남자로 순식간에 떠오른다. 로랑의 덩치가 크고 남자다운 외모는 카미유와 대비되고 그것만으로도 테레즈에게는 흥분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안으로만 감추어져있던 자신의 열정과 정욕을 로랑을 향해 분출한다.

로랑은 테레즈의 정부가 되고 둘의 정욕은 차츰 카미유를 제거해야하는 대상으로 몰고 간다. 로랑은 카미유가 죽고나면 테레즈를 차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라캥부인의 재산마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 살인을 계획한다. 테레즈 또한 로랑과의 행복을 꿈꾸며 센 강 한가운데서 카미유를 강에 던지는 로랑과 뜻을 같이한다. 

카미유가 죽고 둘은 어느 순간부터 카미유의 유령으로부터 시달리게 되는데 그 공포 때문에 그들은 잠시 서로를 떠나 외도를 한다. 그러나 어떤 환락도 쾌락도 카미유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결혼을 치밀하게 기획한다. 그리고 결국은 목요일마다 작은 모임을 가지는 방문객들로부터 두 사람을 결혼시켜야 한다는 공감을 얻어내고 라캥부인은 둘을 결혼시킨다. 

그러나 결혼 후, 둘은 사랑의 신방을 차릴 수 없다. 언제나 카미유에 대한 환상이 둘 사이에 끼어들고 지쳐가던 그들은 서로를 저주하고 증오하게 된다. 마침내 테레즈는 카미유에 대한 회한에 젖고 로랑을 만난 것을 후회하며 중풍으로 마비가 된 시어머니에게 자신들이 카미유를 죽였음을 고백한다.

라캥부인은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겨우 두 눈동자로 살인자들을 쏘아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살인자들의 파멸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파멸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움과 증오와 폭력을 거쳐 그들은 기진한 상태로 상대를 죽이고 평안함을 얻고자 한다. 

로랑은 독극물을 준비하고 테레즈는 식칼을 준비한다. 서로를 죽이려는 순간, 테레즈는 어떻게 해도 카미유를 죽인 회한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죽음만이 평안임을 깨닫고 독약을 마시고 나머지를 로랑에게 건넨다. 로랑은 테레즈가 건넨 독약을 따라 마시고 죽음을 맞는다.

라캥부인은 다음날 정오까지 살인자들이 독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광경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테레즈와 로랑의 심리를 따라가는 여정이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고 백미이다. 서로를 열렬히 원했지만 방해자였던 남편을 살해한 이후 갑자기 욕정이 식어버린 남녀, 희생자의 유령에 시달리다 서로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탓하면서 죽이고 싶어하는, 자신들이 저지른 악의 반격이 계속되자 스스로 죽음 앞에 굴복한 두 남녀. 테레즈와 로랑. 

두 남녀의 파멸까지 가는 과정이 변곡선을 그리며 집요하게 이어진다. 인간심리에 대한 냉철한 분석.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지만 묘사라기보다 설명에 가까운 문장이 많았다. 

언제나 졸라의 책을 읽고 난 후, 하고 싶은 말. 에밀 졸라에게 경의를!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속죄>는 제목만큼 주제가 웅숭깊고 서사와 묘사가 빼어나 소설의 전범을 다 보여준 것 같다.

매큐언은 이 작품으로 여러 상을 수상했고 그간 자신을 향하던 이런저런 부정적인 시각들을 일소했다.그만큼 <속죄>는 문학적으로, 소설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고 매큐언의 생에서 다시 또 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엄청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내게 소설의 꽃은 주제와 더불어 묘사라고 생각되는데,그동안 읽은 대부분의 훌륭한 소설들의 첫번째 덕목이 이것이었다. 

 1부에서 세실리아와 로비의 분수앞 광경이 펼쳐지는 부분은 환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이다. 햇빛과 젊은 남녀, 분수대, 값비싸고 위험한 꽃병, 분수대를 채운 물 속으로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뛰어드는 세실리아와 그 앞에 황망히 서 있는 순수한 청년 로비,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거리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작가의 묘사는 치밀한 반면 젊은 남녀의 심리를 대놓고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관능적이고 순간적인 유혹과 갈등을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열세살 화자 브리오니의 내밀한 욕망과 사춘기의 삐딱한 성향이 묘사와 설명을 통해, 연극을 도모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인식된다. 처음에는 사랑스러운 소녀로 읽어나가다 그 도가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성향에 분노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브리오니를 아주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우연이 아니라 소녀의 고의적인 면에 기인했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또 이 대저택에 당분간 손님으로 머물게 될 롤라와 두 쌍둥이 동생 피에로와 잭슨, 손님으로 온 폴 마셜 등의 대화와 행위로 그들의 성향과 행위를 이해하게 된다. 

 브리오니는 그러니까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하고 뻔뻔하고 비열한 마셜과 영악하고 이기적인 롤라와 더불어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 악행은 그러나 고의적이었음에도 소녀의 잘못된 내밀한 욕망과 편협함이었을 뿐,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데서 일말의 안타까움도 병행한다. 


 폴 마셜의 롤라에 대한 강간행위가 브리오니와 마셜, 롤라의 합작품이 되어 로비는 감옥으로 보내지고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로비는 보병 입대를 조건으로 석방된다. 죄수의 몸에서 자유가 없는 군인이 된 것이다. <속죄> 2부는 로비의 군대에서의 상황과 사건을 점철시키고 있다. 그러나 공격하는 군인이 아니라 퇴각하는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겪는 숱한 무고한 죽음과 부조리한 상황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려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로비는 세실리아를 추억하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그 시간을 버티어낸다. 

 이 퇴각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매큐언은 숱한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사료들을 찾아 탐독했다고 한다. 마지막 1999년 런던에서 브리오니가 박물관과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복사하고 책을 빌리는 장면은 바로 작가 자신이 한 것과 똑같았을 것이다.


 5년후 브리오니는 18살이 되었고 그녀는 이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캠브리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언니를 따라 간호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언니 세실리아가 로비의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길 자청했다면 브리오니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로써 간호사가 된 것이다. 3부에서 브리오니는 전쟁 시기에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고투해야 하는 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언니와 같은 직업, 간호사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루고 있으며,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 했던 증언을 번복하려고 다짐한다. 


 그리고 4부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전혀 다른 소제목을 쓴다. "1999년 런던". 브리오니는 일흔일곱이 되었고 작가가 되어있다. 그녀는 곧 치매에 걸릴 것이고 몇 년 후에는 아마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써왔지만 마지막 작품이 될 자신의 자전적 소설<속죄>를 출판사에 보내고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생일잔치에 간다. 로비를 감옥으로 보냈고 자신의 어린시절이 깃든 저택은 호텔이 되어있다.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몇 십명의 친척들이 와있다. 그러나 로비와 세실리아는 그 곳에 없다. 

 그러니까 3부까지의 이야기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 <속죄>였던 것이다. 실제로 로비는 됭케르크의 퇴각작전 때에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지 못했고 패혈증으로 죽었으며, 언니 세실리아는 로비가 죽은 몇 달 뒤, 1940년 9월 런던 지하에 대피했다가 폭격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소설<속죄>에서 두 연인을 만나게 해 주었던 것이었고....

그러나 신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소설 바깥에서 신이며 전능하다. 속죄란 소설가에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까 브리오니는 최선을 다했을 뿐, 속죄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지도 모른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할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속죄>는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 중의 소설이다. 그리고 일종의 액자소설이라고 본다. 작가 안의 주인공 작가, 소설 속의 소설이 주제가 되고 제목이 되니 이중의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는 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인의 생각과 상황을 함부로 내 자로 재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언제나 늦은 것이며 진정한 대가를 치르기에 인간은 무능력하며 특별한 방법 또한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제목을 이미지화한 둥그런 황금빛 원, 위 그림처럼 책 날개의 앞모습이다. 지상의 생명체들에게 태양보다 완전한 존재는 없다. 신이 있다해도 태양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래서 고대에는 태양신을 믿는 게 합리적으로 타당했을 것이다. 태양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지구인들에게는 언제나 어젠다이다. 

 

 이 책 <솔라>는 현재 지구의 여러 문제 중 전지구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기후변화, 지구온난화에 대응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와 그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기후변화와 한 과학자의 삶, 두개의 테마가 서로 얽히고 설키며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1부는 2000년도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젊은 시절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그러나 지금은 그 경력을 밑천 삼아 이런저런 공직을 맡기도 하고 그 수장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마이클 비어드를 보여준다. 뚱뚱하고 대머리에 배가 나온 그는 키가 작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지만 그는 나온 배만큼 자신의 인격을 지키기 위한 관리가 전무하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혁혁한 꼬리표가 그의 외적인 단점을 말살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는 다섯 번째 아내 퍼트리스와 갈등관계에 있고 그녀는 집을 수리하러 왔던 건설업자, 로드니 타핀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녀의 바람은 그러나 비어드의 여러 번에 걸친 불륜에 근거한, 일종의 보복행위이다. 비어드는 아내의 바람에 점차 격해지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럼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그녀를 갈망하게 된다. 이제 보니 그녀는 그 전의 어떤 아내나 애인들보다 단점이 없는 미인이다.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혼자만의 연극을 한다. 자신도 다른 애인을 집으로 불러 깊은 밤 정담을 나누고 밀회를 하는 것처럼 혼자서 희극을 연출한다. 그 와중에 작가는 짧은 문장 두 서너개로 아내 퍼트리스의 심정을 묘사한다. 그녀는 집을 나서며 잠시 멈춰서기도 하고 어느 날인가는 혼자 소파에 기대어 울기도 한다. 그러니까 매큐언은 아내 퍼트리스의 내면이 몹시 복잡했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창조한 인물 누구나에게 애정을 가져야 하고, 한편으로는 신랄해야 함을 이 몇 개의 문장이 증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의 비어드에게 레딩 외곽의 정부연구소의 수장이 된 일은 일종의 도피처로 괜찮다. 그곳에서 그는 장차 자신이 가로챌 연구를 한 톰 올더스를 만나게 된다. 올더스는 풍력발전보다 태양광 발전이 훨씬 경제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이익이 될 것을 주장하는 젊은 연구원이었다. 

 그러다 그는 북극엘 가게 된다. 집을 떠나 아내의 외도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에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실제로 작가 매큐언은 기후변화에 관한 문제로 북극에 가 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과학자들과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예술작품의 모티프로 쓸 예술가들이 탈의실을 엉망으로 만든 무질서를 목격하게 된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한 경위가 이 북극에서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고 하니 경험만큼 훌륭한 소재는 없다 할까.... 

 그리고 북극에서의 귀환은 이 좀쓰럽고 엉망진창인 비어드의 삶에 반전을 가져오게 된다. 바로 톰 올더스가 아내의 새 애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우연찮게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끝내고 태평하게 쉬고 있던 올더스와 마주한 비어드는 올더스의 죽음을 유도하게 되는데, 바로 거실 소파 아래에 깔려있던 북극곰의 가죽깔개에 올더스가 미끄러져 탁자 유리 모서리에 뒷목이 찔렸던 것이다. 이 장면은 비어드가 실제 북극에서 마주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던 북극곰과 안락한 자신의 집 북극곰 가죽을 올더스가 밟아 미끄러져 죽었으니 흡사하기도 하고 극단적이기도 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적절하고 과감한 소재, 죽음을 비극이면서도 희극이 되게 처리하는 작가의 역량, 코미디적 스토리를 계속 연결시키는 상상력. 재미와 교훈이 병렬된다. 기후변화와 한 과학자의 좌충우돌 인생을 이렇듯 아이러니, 역설, 비판과 풍자, 코미디가 엮어간다. 


2005년도를 묘사하는 2부에서는 어느 하나도 개선되지 않은 비어드의 일상이 펼쳐진다. 몸무게는 7킬로가 더 나가고 나이는 다섯살 더 먹었지만 여자들을 쫓아다니는 행태는 여전한 비어드, 그러나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써의 위상이 여전하다. 행사에 초대되어 개막연설을 하고 기자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업적과 최근의 연구에 대해 설명하고, 그러다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올더스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그리고 올더스를 죽인 사람은 타핀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정부나 대중은 그에게 속고 있으며 적당히 그를 이용해 자신들의 목표를 지향한다. 단 한 번의 노벨상 수상은 평생 그가 길어먹을 수 있는 우물이고 권력이다. 아름답고 희생적인 새 동거녀 멜리사를 만나고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비어드는 결혼과 아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미국 남쪽에서 올더스의 가로챈 연구로 새사업을 시작하고 있다.


 3부 2009년의 시간, 비어드는 뉴멕시코 로즈버그에서 톰 올더스가 남긴 연구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그 곳에는 달린이라는 새 여자가 그를 기다린다. 그녀는 비어드와의 결혼을 계획하고 멜리사에게 전화를 한다. 

 그는 잠시 로즈버그를 향하기 전 텍사스 엘패소의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일을 총관리할 토비 해머를 기다린다. 그는 첫사랑이었던 메이지를 추억하고 그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의 어머니 앤절라 비어드는 십일 년 동안 열일곱 명의 남자를 만났다고 그에게 고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치지 않는 바람기는 어머니의 DNA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는 바로 얼마 전, 의사의 경고를 들었다. 식습관을 고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그는 운동을 하느니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어떤 결심도 음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나랑 조금 비슷하다. 이언 매큐언의 사진을 보니 매큐언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꽤 날씬할 것 같은 얼굴과 맑은 표정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물을 그린 것 같다. 어쨋든 비어드는 노쇠해지는 몸과 그럼에도 성욕을 주체 못하는 일견 엽기적일 정도의 일상을 잘 꾸리고 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구멍이 축대 전체를 무너뜨린다. 그에게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 

 톰 올더스의 연구서를 이전 레딩 연구소의 소장이 알고 있다. 그는 올더스의 연구를 가로채고 새사업을 시작한 비어드에게 곧 소송을 걸겠다고 변호사를 보내 경고한다. 그 소송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일에 협조하고 지금 뉴멕시코에서 시작하는 사업을 접으라고.... 비어드의 새 동업자이며 관리자인 토비 해머는 이제 그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멜리사와 딸 캐트리오나가 달린의 전화를 받고 로즈버그로 오고 있다. 자신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지키기 위한 모녀의 급한 방문, 달린이 그 모녀를 물리치기 위해 그에게로 달려온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다섯 번째 아내 퍼트리스를 사랑하고 올더스의 죽음에 누명이 씌워져 8년을 감옥에서 살았던 로드니 타핀이 비어드를 만나러 와있다. 타핀은 그래도 퍼트리스를 만날 수 있느 사람 비어드를 찾아와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놔 달라는 것이다. 지독하게 집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타핀. 그러나 비어드는 타핀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두 여자가 마침 들어서고 있다. 바로 앞엔 사랑스런 캐트리오나가 달려오고.... 그는 딸을 맞으려고 일어서며 심장에서 부풀어오르는 듯 생경한 기분을 느낀다. 이 심장의 느낌은 무엇일까. 병일까, 딸에 대한 애착과 흥분일까. 


 이런 작품을 아무 작가나 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기후변화, 온난화, 노벨상수상 과학자, 이 소재들을 다루려면 조사해야 할 거리가 많고 어느 정도 과학적 상식도 있어야 할테니까... 그럼에도 이 엄청난 소재를 녹이기 위해 성욕을 잃지 않는 뚱뚱하고 염치없는 코미디적인 과학자가 필요할 만큼, 소설 독자를 향한 지고의작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보면서 참 힘들고 고단한 소설의 길을 재고해본다. 

언제나 산은 멀리 있고 그 산을 오르려는 열망은 디테일한 수고와 노력을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이 책 제목의 상징성은 꼭 이 이야기가 아니어도 어떤 이야기의 발견과 발전되어지는 양상과도 어울릴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에는 씨앗이 있으며 그 씨앗은 어떤 형태로도 아주 작은 껍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의 씨앗은 씨를 품은사람 안에서 보호받고 성장하다 때가 되면 그 사람의 입술을 열고, 또는 필체를 얻어 완전한 이야기로 발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범위한 상징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작가 이언 매큐언은 분명히 자신의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영향받았음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햄릿도 모든 인간들처럼 어머니의 뱃속에서 일정기간 보호받았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는 전형이 돼버린, 심오하고 부조리하며, 슬픔과 분노와 무기력으로 상징되는 영혼이다. 그 영혼을 전제로 그래서 이 소설은 읽혀져할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넛셀에서 화자는 이름없는 태아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말소리와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바깥 세상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인인 남편을 배신하고 남편의 동생과 불륜을 맺고 있으며 더구나 아기의 아버지를, 자신의 남편을 죽이는 음모가 진행된다. 화자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며 진행되는 살인모의를 중단시키고 싶다. 아기화자는 생각할 수 있고 선악의 분별도 가능하다. 하지만 직접 자신의 의견을 전할 길이 없고 반격을 행할 수 없으니 그의 생각은 밖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체념해야하며, 두 연인의 음모가 행해진 후에는 목적마저 달라지게 된다. 

 결국 아버지가 피살되자 아기는 어머니라도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삼촌만 징벌당하기를 고대한다. 그는 무엇보다 태어나기를 갈망한다. 밖의 상황이 너무나 엉망으로 잔혹하다해도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태어나서 인간세상의 중심에 살고 싶고 자신을 완전히 실현시키고 싶은 꿈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은 나빠진다. 

 경찰은 어머니와 삼촌 둘다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와 삼촌은 이제 서로를 증오하며 그럼에도 아직은 협력해야하는 관계이다. 어머니는 삼촌의 여권을 내주지 않고 삼촌을 붙들어둔다. 그사이, 아기가 양수를 찢고 세상으로 빠져나온다. 그는 태어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전력을 다한 것이다. 불경하고 비열한 세상이지만 아기는 태어나는 일을 신성히 여기고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곧 경찰이 들이닥친다. 여권 때문에 집을 떠나지 못한 삼촌, 속물근성과 어리석음, 탐욕과 여색을 밝히는 삼촌은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나서고.  아기는 자기 대신 복수해줄 경찰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미래는 어찌 될까.....

 아기는 자신이 어느 감옥안에서 자유없이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미래를 점치고 있다.


 어머니가 삼촌과 불륜을 맺고 아버지를 두 사람이 죽이는 상황은 햄릿과 같다. 단지 햄릿은 성인이 되어 복수할 수 있고, 또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인데 반해, 넛셀의 주인공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생각만이 존재할 뿐인 아기에 불과하다. 그는 복수는 아주 나중으로 미루거나 경찰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불행한 음모에 희생당한 아버지를 기억하면서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의지해야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햄릿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울 있는 조건이다. 

 그러나 긍정해본다면 햄릿은 수많은 난점을 안고 있지만 아기는 절대적인 불가능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어떤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완벽한 현재의 불가능성과 완벽한 이상의 가능성인 미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는 그렇게도 잔혹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태어나고자 발버둥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불가능한 수많은 것들이 목전에 있음에도 무언가 하나라도 이루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 존재하기 위해 쟁투하고 있는 우리와 넛셀의 아기화자는 일면 같지 않은가. 

 우리의 넛셀은 안전한가, 우리는 넛셀에서 빠져나와 세상과 진실로 대면하고 있는가, 나는 온전히 성장하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