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안타깝게도 드릴로의 명작인 이 작품을 건성건성, 반은 읽고 반은 문단의 한두 문장만 읽고 건너뛰면서 줄거리만 대강 읽었다. 올 여름 수강할 강의가 네개나 되어 책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 당분간은 이런 식의 책읽기가 계속될 것 같아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독후감을 쓰고자 하는 것은 훌륭한 작품에 대한 예의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얼렁뚱당 읽은 책에서나마 길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내 안에 저장하고 싶어서이다. 또  각설하고...


<마오2>는 정통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설이다. 정통소설에서 보여주는 내밀한 주인공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배경, 인물이 사건을 향해가는 과정이 스케치도 제대로 되지 않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 드릴로는 자신의 글에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그는 모더니티한 글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실제 토마스 핀천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포스트라는 단어가 접두어로 붙을 때 나는 상당히 피곤한 증상을 만난다. 주목을 끌면서 흥미를 당기는 서사가 진행되지 않으니 계속 집중이 방해받고 짜증이 인다.  

하지만 일견 정통소설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는 것도 내겐 합목적적인 일이 될 것이다. 더이상  과거, 정통, 전범이라는 말은 이 변화무쌍하고 다양다채로운 시대에는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과 형식을, 또는 내용까지도 혁신적일 수록 좋을 것이다. 드릴로에게 새로운 소설을 배우는 것은 어쩌면 더 유익한 일일지 모른다. 정통을 거부하라. 술술 풀리는 이야기를 구태하다고 느껴봐라.

오늘도 로쟈 선생님의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을 간략히나마 옮겨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읽으면서 짜증을 내었던 것들이 사실은 죄다 공부할 대상이었으니까...  나의 좁은 우물안 감상문보다 지성적인 전문 비평가의 가르침을 되씹는 게 훨씬 유익할 테니. 





제목의 '마오2'는 원본이 아닌 복제 이미지를 뜻한다. 워홀작품을 이해하면 알맞을 것이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에 마오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중국 전체를 '마오2' 라는 획일적이고 통일적인 대중(국민)을 만들고자 했다. 전체주의가 얼마나 다스리기 쉽고 지배자에겐 안전한 시스템인가.

동시에 워홀의 작품세계, 미술사로 건너가보면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더이상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못한다. 미술사의 종말, 예술(예술품)은 사라지고 예술철학만 기승을 부린다. 감각적인 작품들로 미술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뇌에서 나오는 철학이 미술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소설적 재현이 이 시대에 가능한가? 

퇴행의(개인은 축소되고 군중이 부각되며, 그 군중은 그러나 이용되는, 또는 테러가 기승을 부리는, 민주주의가 퇴행되는) 시대에 소설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매체들이 순식간에 강렬한, 이성을 마비시키는 뉴스와 아미지를 통용시키고 있다. 그러니 글을 읽는 노동이 필요한 소설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아주 새로운, 색다른 소설이 탄생하든지, 소설이 죽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릴로는 이렇게 재미없지만 그림만 떠오르고 메시지가 장중하게 난무하는 소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냉전시대--탈냉전시대--테러시대

냉전시대에는 이념이, 탈냉전시대에는 탈이념이, 테러시대(현시대)에는 폭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는 자들은 세상을 바꿀 마음이 없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기득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테러 밖에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가해당사자가 아닌 선량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그 목숨을 끝내 살하는 테러를 두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의 부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c는 군중, 대중의 시대. 개인은 쇠퇴하고 개성은 몰락한다. 한편에서는 이 군중들과 명확히 다른 엘리트들이 소수지만 건재한다. 이는 역사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중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군중은 소비하는 주체로서 강화, 인식되고 노동하는 개인, 주체적으로 행위하는 개인으로서는 빛을 잃어간다.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의 군중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개인들은 "얇은 인간",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내면이 얇고 약한 인간이 되어간다. 두꺼운 내면을 가진 개인으로 성장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얇음'을 성찰하고 내면이 두꺼워지고 강해지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한 개인의 서사가 아닌 군중이 주인공인 소설도 있다. 정확한 인물이 설정되지 않고 목소리만 있는 소설, 이를 목소리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런 소설을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모티프로 하는 소설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소설계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소설이 'story' 에 머물고 있으며 'novel'로써의 역할, 문학적, 사회적 아우라를 발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은 전에도 있었고 후에도 있을 'story'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의미있는'novel'을 생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매체들에 밀려날 것이다. <소설의 운명>을 고심해야 한다.


돈 드릴로는 상당히 전위적이고 세련된 작가이다. 이 작품의 2부 어느지점부터는 그런 작가의 노련미와 세련미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렇다해도 모던함이 재미를 반감시키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매니아가 된다면 정말 배울 게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은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 이번엔 정말 제대로 읽어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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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1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드릴로의 책들은 확실히 한국에서
저평가되고 있다느 느낌입니다.

lea266 2019-07-21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인기가 없는 것 같아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들이 사랑받기 힘든 건 재미가 없다는 면에서 어쩔수 없는 듯 해요 독자가 많지 않으면 저평가되는 것도 사실인거 같구요 하지만 마오2를 음미해 읽으면 나름의 매력이 분명히 있어요 아직도 한국의 독서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귀찮아하는 건 아닌지 ..... 나부터도 그렇거든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