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는 1869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1951년에 타계했으니 그를 세기별로 분류하자면 20세기의 작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좁은 문>은 지드가 3년 간 무수한 포기와 재시도를 통해  완성킨 작품이었다. 고투를 거친 이 작품으로 인해 지드는 유명 작가가 되었으며 비난과 찬사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작가의 이런 고통은 너무나 개인적인 일에 그치지만 그로 인해 명작이 탄생된 후에는 그 고통조차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기반이 되는 것 같다.  거기에다 내용이나 분위기가 중세의 신앙심과  차원높은 귀족적인 사랑을 담고 있어(물론 주인공들은 귀족은 아니었고 신앙심 깊은 부르주아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왠지 20세기의 작품같지 않고 17,8세기의 문학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제롬은 어릴 때 이미 외사촌 누이인 알리사를 사랑하게 된다. 나이에 비해 열정적이지만 진지한 제롬은 자신의 사랑을 그대로 알리사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제롬의 사랑은 알리사와 그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친지들은 둘의 사랑을 인정한다. 

 그러나 알리사는 제롬의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엄마가 없는 집안의 장녀이고  제롬을 남몰래 좋아하는 동생 줄리에트 때문에 곤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의 사랑은 기쁘고 환희에 찬 교감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알리사는 제롬의 사랑을 붙들어 두고 싶은 유혹과 연하의 제롬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동시에 느끼는 괴로움을 늘 안고 있다. 이에 반해 제롬은 오직 알리사만을 향한 사랑을 갈망한다. 둘의 사랑은 제롬의 열정과 알리사의 고뇌에 찬 갈등으로 인해 언제나 완전하지 못한 정신적인 부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너무나 지대하기에 서로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신이 있다. 하느님은 그들의 사랑을 더 원숙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지고한 존재로 끝까지 개입한다.

 줄리에트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행복해졌음에도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천상에서의 합일을 위해 늘 유보된다. 그리고 마침내 알리사는 인간적인 그리움에 목말라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죽는다. 알리사가 죽고 줄리에트에 의해 알리사의 일기가 제롬에게 전해진다. 그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했지만 언제나 슬픔과 외로움을 깔고 걸어가는 고통스런 길에 다르지 않았다.

 신을 향한 성스런 신앙심과 연결된 남녀의 사랑, 그것은 정말 미덕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또다른 야만일까. 전자에도 후자에도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없다.

 이 작품이 지드의 자전적 소설이라하는 데 충분히 공감되었다. 순수하고 두려움이 많은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지면 열정은 타오르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절망에 홀로 몸부림치는 청춘이 얼마나 많은가. 첫사랑은 모두 실패요 그래서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작품을 읽고 '독일인의 사랑'이나 '골짜기의  백합'이 연상되었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의외로 과거에 많았다고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읽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신앙이 특수한 사람들의 삶으로 여겨지고 사랑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현재, 더이상 알리사나 제롬은 명작에서나 만나는 인물들이 되어간다. 현 시대는 사랑을 위해, 거룩하고 완전한 사랑을 향해. 금욕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그럴만큼 신앙을 우러르지 않으며 사랑을 성역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랑은 향유하는 것, 기쁘게 공유하고 이 삶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천상에서 이루기 위해 유보하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몸져 누워 본 사람들에게 <좁은 문>은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가치있는 고전이 될 것이다. 

 

알리사의 일기에서 잊을 수 없는,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명구절들을 옮겨본다.

 

그이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것들 가운데서 어느 것도 나에게 기쁨이 되지는 못한다. 나의 모든 미덕도 오직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곁에서는 나의 미덕이 스러져가는 것을 느낀다.(171쪽)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보가 없는 상태를 나는 바랄 수 없다.(171쪽) ...그래서 언어의 유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진보'하지 않는 기쁨 따위를 나는 경멸한다고 말할 수 있다(172쪽) 

 

 우리의 미덕이 애를 쓰는 것은 미래의 보상에 대해서가 아냐. 자기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은 착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상처를 입히는 것일 거야. 덕이라는 것도 그런 영혼을 장식하는 패물은 아니야. 아냐, 덕이란 그런 영혼의 아름다움이 지니는 형태 바로 그거야. (173)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완덕으로 향했던' 것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이었다. 그런데 이 완덕은 오로지 그가 없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오, 나의 주여!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저를 당황케 하는 것이옵니다.(175)

 

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 두 영혼을 한꺼번에 사랑 저 너머로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176)

 

그 어떤 영혼인들 그의 영혼보다 더 당신에게 값한 적이 있사옵니까? 저를 사랑하기 위해서보다는 더 훌륭한 일을 위해서 태어난 그가 아니옵니까?(176)

 

내가 내 눈, 내 입, 내 영혼에 부과하는 구속이 너무도 힘들기에, 너와 헤어진다는 것도 내게는 해방이며 또 쓰디쓴 만족이 된다.(177)

 

두 순례자처럼 인생의 길을 따라 걷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주여, 좁은 길이옵니다. 좁아서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길이옵니다.(178)

 

저는 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제롬에게서가 아니라 당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하지만 어디에나 당신과 저 사이에 그의 모습을 두심은 어찌된 일이옵니까.(180)

 

제롬, 곁에 있으면 마음이 저려오고, 멀리 있으면 죽을 것만 같은 나의 애달픈 벗, 내가 아까 하던 모든 말 가운데서 내 사랑이 네게 이야기하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말아줘.(188)

 

저의 사랑을 달랠 수 없을 만큼 부추기는 이 집, 이 정원, 오직 당신만을 뵙게 될 곳으로 달아나고 싶습니다.(188)

 

이제 더 이상 삶에 대하여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만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고,(189)

 

 

주여, 제 자신이 필사적으로 도달하려고 했던 미덕의 정상에까지 그를 밀어올리려고 미칠 듯이 원하던 이 마음의 어설픈 표현을, 이 일기에서 그가 때때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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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altree 2018-12-03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좁은 문을 읽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사춘기 시절, 누구나 앙드레 지드를 끼고 좁은 문을 읽고 배덕자를 얘기했지요. ‘신의 세계에는 예술이 없다‘던 지드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