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쯤 전부터 <문학이론>에서 굳이 내 취향에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베껴 적고 있었다. 오늘 아침 컴앞에 앉아 이 옮겨적기를 하려 한 까닭은 특히나 '욕구'와 '욕망'에 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며칠 전 읽은 13장 자크 라캉의 말 때문이었다. "라캉은 욕망을 실현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합니다. 욕망의 환유적 구조가 그가 '점근선적 경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르기 때문인데, '점근선적'이라는 말은 만나고 싶어하는 선을 향해 휘어져가지만 절대 닿지는 못하는 선을 뜻하며, 증상을 감춘다는 말을 연상시켜 언어유희의 느낌도 있죠"(303쪽)

 이 라캉의 말은 순식간에 문학적 사유를 불러왔다. 당장 인물이 그려지거나 사건들이 마구 떠올랐던 것은 아니지만 '점근선적'이라는 단어 속에 잠긴 수많은 절망과 깊은 허무가 난무하는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없이 환유적으로, 점근선적으로, 정착도 아니고 뚜렷한 변화도 아닌, 헛되고 헛된 일이, 그러나 당장은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라도 공감할 문장들이 아닐까.

 그래서 <문학이론> 책을 꺼내놓고 페이지를 넘기며 컴 앞에 앉아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옮겨적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운이 얼마나 나쁜지... 나는 컴맹이라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는 이유로 몇 십줄의 글이 갑자기 날아가버렸다. 이유는 영원히 모른다. 모를 것이다. 그러더니 동생이며 동네 친구며 전화들을 해댄다.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집중모드로 몇 십 줄을 베껴놨는데, 또 전화가 오신다. 안 받으면 그만이지만 상대가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싶어 또 전화를 받았다. 얘기가 길어진다. 그러다 통화중에 팔꿈치인지 손가락인지로 자판 어딘가가 건드려졌나보다. 또 날아갔다. 날아간다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날아간 것을 다시 불러오는 건 그 날아간 새인지 컴인지의 명목을 모르고 그것의 체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다시 되불러 올 수가 없다. 그런데 누구한테 화를 내나? 화 낼 누가 있어줘야 덜 화가 나는데, 화 낼 상대마저 없으니, 아니 그 상대가 오직 꼽자면 나밖에 없으니.... 한심하고 분하고 무능력한 나에게 서글프기도 하고...

  결국 기운이 확 떨어진 나는 책을 덮고, 그렇다고 그냥 컴 앞을 떠나기는 너무 서운해서 이런 글같지 않은 글을 쓴다. ㅠㅠ... 그렇다고 <문학이론> 베끼던 것 말고는, 특별히 쓸 무엇이 있지도 않다. 그러니 무얼하랴. 무얼 쓰랴. 알라딘에 미안하다. 내 시간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우리 감자에게 미안하다. 그 시간동안 감자에게 밥이나 줄 걸... 괜히 고생만 하고 컴에 빠져 그새 점심이 됐으니. 감자야 이제 밥 줄게 미안. 하긴 나도 아무 것도 안먹었으니 뭐 이해해줘. 

 점근선적인 내 삶이여. 이제 지쳤으니 은유로 끝을 내자. 아니, 아니다. 은유도 상징도 아니다. 온전한 현실로의 세계. 무지막지하게 맑고 냉혹한 현실의 세계. 그 곳으로 넘어가 얇고 좁게 쌓아놓은 기반이지만, 두 발은 고사하고 한 발 올려놓기도 힘든 어설픈 기반이지만, 그 위에 올라서 다음 여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언제나 혼자였던 길들.... 곧 그 길을 찾아가야한다. 다른 좋은 길은 내게 없으니까.  어쩌다보니 그 목적지를 가야된다는, 이상하게 갑작스런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정말 어쩌다보니... 이누므 컴퓨터 때문에 갑자기 낙서면서 낙서가 아닌 이상하게 휘어져버린 글. 하긴 내 안에 마지막 그 길은 항상 유보되어 있었다. 

 어제 루시아형님이 말했다. 그래도 너는 무언가를 너를 위해 해왔지 않니? 그래도 그 정도면 너는 네 맘대로 살아온 거야. 그래도, 그래도를 세 번쯤 말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도 나는 괜찮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엉망진창인 삶을 잘 살아왔다. 루시아형님이 또 쐐기를 박았다. 잔소리말고 그냥 되는 대로 열심히 해. 하다보면 뭐가 되겠지. 잔소리하지 마. 

 잔소리 안 하련다. 투덜대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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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19-10-20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어느 시골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읽는 글이었습니다.감사합니다.
 











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늦은 가을학기 첫 작품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벨킨이야기, 스페이드 여왕>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 푸슈킨의 소설답게 삶이 인간을 속이기도 하고 의외의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왜 삶이 그대를 속이는지, 왜 삶이 의외로 그대에게 행운을 주는지.... 

차례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 
발사
눈보라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

스페이드 여왕

 
 1930년대의 소설이라 디테일과 핍진성에서 현대소설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과 '이야기'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 작품이 갖는 매력은 오히려 세련된 요즘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설이 더 친밀할 수도. 소설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독특한 인물을 보여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형상화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인물들을 좀 훑어보자면,아니 그보다 프롤로그 형식부터 보아야겠다. 일단은 고인이 된 페트로비치 벨킨이 쓴 이야기를 간행하기 위해 벨킨의 아버지의 친우였던 이웃의 증언이 담긴 편지가 그대로 게재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며 여러 인물들에게서 벨킨이 직접 들었다고 하는 대목이다. 
 그런 후에 위의 5편이 차례로 이야기된다. 이 단편들 각 장마다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데 그 인물들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한 유형을 대면하게 된다.
 '발사'의 실비오는 겉으로는 무척 여유로운 사람처럼 비치지만 내면은 황량하다. 그는 매일 총쏘는 연습을 반복해서 사격술은 대단하지만 자폐적인 사람이다.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더 유능하고 여유로운 장교를 만나자 그는 그를 질투하고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는 매일 사격연습을 하면서 그를 죽이기를 소망하지만 막상 그를 죽이러 가서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다.
 '눈보라'의 마랴 가브릴로브나는 프랑스소설에 빠져 어떤 환상적인 사랑을 꿈꾼다(마담보봐리도 그렇고 많은 여자들이 현대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환상에 속고 만다). 가난한 소위보와 사랑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는 로맨틱한 삶을 꿈꾸었지만 상대는 일면 계산적인 남자였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 그녀는 혼자가 된다. 정절을 평생 지킬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또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우연히 교회에서 아주 잠깐 그녀와 혼인식을 치른 남자였다. 둘은 행복한 결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런 기적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내게서 가장 먼 곳에서, 어쩌다 딱 한 번 소문으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장의사'의 장의사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있지만 이웃집 파티에서 자신에 대한 비하적인 농담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자신이 묻어준 영혼들과 차라리 파티하기를 원하게 된다. 술김에 혼잣속으로 한 상상. 그런데 정말 그는 그들과 조우한다. 꿈이었다. 별로 행복하지 않은 꿈..... 꿈에서 깨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역참지기'의 역참지기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존적인 삶을 사는 아버지 이야기이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와 떠나자 그의 삶은 엉망이 된다. 그는 딸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불행해질 딸을 기다린다. 그러나 딸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의 애타던 마음은 단지 딸을 향한 의존에서 비롯된 무지와 오해일 뿐이었다. 
 '귀족아가씨'는 유쾌하고 유머스런 콩트 한 편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한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용기와 귀여운 일탈....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다' 같아서 일견 어이없을 정도.

 그리고 두 번째 작품'스페이드 여왕'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사랑을 이용한 게르만이 종내는  정신병동에서 죽어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이길 수 밖에 없는 카드 세 장을 가르쳐달라고 하소하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총을 빼어든다. 늙은 백작부인은 지레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그는 살인자에다 순정한 여자의 사랑마저 잃게 되는데 그러고도 꿈에서조차 백작부인에게서 그 비밀을 전수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걸 잃고 미쳐서 카드의 숫자를 부르며 정신병동에 갇혀 죽어간다. 

 이 작품들 (귀족아가씨 한 편을 제외하고) 대부분 주인공들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실체(자아)와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실비오, 소설같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랴 가브릴로브나, 어린애같은 자의식에 빠져 상상을 불러일으킨 장의사, 자신의 딸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그 딸을 제대로 책임질 줄 모르는 역참지기 등...
 이들은 미성숙한 어른들이다. 아이를 벗어난 지 오래지만 정신은 크지 못한 미숙한... 자신의 어떤 중독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과 마주하려니 버겁고 괴롭다. 미숙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로 자신을 힘들게 하고 간혹 상대에게 그 여파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상대는 얼마나 또 곤혹스러울까....
 소설 속 인물은 나 자신과 동일시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들처럼 괴롭고 한심스러우니 그들을 통해 저절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감정이나 감성이 유달리 예민하거나 부풀려진 사람들은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일을 괜히 붙잡고 자신을 그곳에 함몰시킨다.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누군가 지목해서 '너'라고 한 적도 없건만.... 공연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떡줄 사람이 없는데 김칫국을 마신다.... 그러고나니 한심하고 주책스럽다. 문자를 통해 감정을 익히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음성언어로 직접 언표된 게 아니라면 믿어서는 곤란하다. 행위가 없는 일은 없는 일이다. 있는 행위가 있는 일이고 사실이다. 나머지는 모두 환상에 가깝다. 
 미성숙을 벗어나는 일은 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에 싸여서는 안된다는 것. 성숙해지려고 노력해봤자 평생 안 될 사람은 오직 현실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 어떤 의미도 다른 의미와 상통된다. 비슷한 의미들은 엮이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들은 하나의 세계면서 무한한 세계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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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가을학기가 미뤄진 계기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작년 쯤이었던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살 때 같이 샀던 책이다. 그 때의 계획으로는 '마담 보바리'를 읽으며 견주어서 읽고 싶어서였는데(사실은 이 채털리부인 말고도 안나카레니나나 그 외의 불륜의 주인공인 부인들을 몇 편 더 읽고 비교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었다) 늘상 그렇지만 독서속도가 지나치게 느린 나로서는 항상 텍스트 하나에 온 시간을 허비하는지라 결국 구석에 놓아둔 채 '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려니 밀린 책을 읽는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시간이 좀 아깝다,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묘사나 설명이 너무 닳고 닳지 않았나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왜 그 유명한 로렌스의 '채털리'가 내게 불만스러웠을까. 일단은 숲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숲의 풍경이 거슬렸다. 왜 그렇게 숲이 환하고 꽃은 심어놓은 듯 아름다운지..... 특히 사냥터지기 오두막 뒤의 풍경은 일부러 가꾼 듯 꽃들이 아름답다. 자연 자체만으로 아름다운게 진짜 아름다움이고 그게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된다. 사냥터지기 또한 너무 잘 생겨서 매력이 오히려 반감됐다. 사냥터지기가 사냥터지기처럼 생겨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코니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날렵한 몸매에 흰 피부, 큰 키, 잘생긴 외모. 사실감이 오히려 떨어진다. 진짜 매력은 외모보다 그만의 어떤 개성적인 분위기나 특별함이 있어야 사랑에 빠질 요인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코니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긴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여자주인공은 대부분 아름답다. 그것은 거의 정해진 규칙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최근 문학작품에서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 같고, 요즘은 오히려 인물의 외모를 묘사하지 않는 편인 것 같다. 그냥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만 그 상황에 맞는 표정의 주인공을 짧게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인물을 점진적으로 드러내 주는데에 합치된다. 

 그런데 도대체 남자 주인공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냥터지기의 이름이.... 그는 그런데 굉장히 정직하고 올곧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용기있고 더구나 자신을 일부퍼 낮출 줄 아는 멋진 남자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팽창해가면서 세상이 얼마나 물질적인 가치로 재단되고 있는지, 계층(계급)의 문제가 인간을 가혹하게 구속하고 희망없는 미래를 강요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데 이는 로렌스의 사상의 일부를 집약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로렌스는 사냥터지기와 코니를 통해서 서로 다른 계층(계급)을 화해시키고 결합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자체를 배제하고 주변적인 요인으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현상에 대해 분노했던 것 같다. 

 그러나 로렌스의 애정관에 대해서는 어떤 여자라도, 특히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공격 대상이 될 것 같다. 물론 성적인 부분이 사랑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성인이라면 익히 아는 바이지만, 그렇더라도 남자주인공의 코니를 향한 사랑에 성적인 부분이 그렇게 크게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엉뚱한 이 소설은 상당히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사냥터지기가 보낸 편지로 대미를 장식하고 끝나는데 그 부분은 일견 동화적일 정도로 다부지고 건설적이다. 보통의 리얼리즘이라면 사냥터지기는 쫓겨나 불행한 파멸을 맞고 코니는 남편으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지목되어 사회적으로 매장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딴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결말이지만 오히려 신선했다. 왜 하층계급은 행복할 수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보다 이런 반전이 반가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시 소설이야. 이런 생각이 드니 나도 참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얼리티 희생자란 생각이 든다. 주위 친구들은 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할 때도 있는데... 하긴 인생 자체가 환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을 활용해서 <마담 보바리>를 완전히 그 구조와 디테일을 따져서 분석하고 독후감 이상의 독후감을 쓰고 싶었는데 또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하는 일도 별로 없이..... ㅠㅠ

 정말 시간이 되면 이삼일 날을 잡고 '보바리'를 심층 분석해보리라, 또 다짐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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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이시구로의 작품으로 네 번째 소설이다(내가 읽은 숫자로만). 이시구로는 참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사람 같다. 만나본 적이 없지만(당연히) 아주 완벽하고 그런데 부드럽고 한편으로 배려를 세심하게 하고 그러나 무척이나 냉철한 사람. 이 작가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모르니 마냥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그런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절제미와 원숙미 그러면서도 사려깊은 어조와 우회하는 문장들.... 참 어디 한 군데 흠을 잡을 수 없이 막강하고 완전한 작품들이다. 거기에 진짜 미덕은 쉽게 쓰여졌다는 점. 하지만 그렇다고 속도가 마구 나는 편은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걸 갖춘 작가다. 백년을 연습해도 이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시구로에 대한 찬탄은 해도해도 모자라지만 이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전의 <남아있는 나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역자도 해설에서 밝히고 있지만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을 말한다. 

 

 주인공 오노는 노년의 화가다. 지금은(1948년부터 1950년 사이의 일)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손자와 놀고 지나간 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일인칭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시구로의 전략은 자기자신에 대한 정확한 심리묘사를 처음부터 하지(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의 방법은 주인공이 남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뭔가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시치미를 떼는 작전을 취한다. 이건 쉬운 방식이 아니다. 아주 계산적이고 서서히 진행시켜야 할 전략 같다. 작가가 주인공 마음에 너무 감정이입을 하면 힘든 방식이다. 작가는 주인공 화자가 자꾸 뭔가 미심쩍고 궁금한데 완전히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애매하게 만드는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독자는 뭔가 있겠구나, 근데 주인공한테 문제가 있나, 아니면 상황이나 지나간 어떤 사건이나 주위의 누가 문제가 있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계속 여러 잡다하고 소소한 사건을 기억에서 불러오며, 또는 그런 상황을 만나며 주인공은 모종의 불안이나 회오에 젖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서서히 진행되야 하기 때문에 소소한 상황과 기억은 다양하고 다채로와야 한다. 

 

 그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건을 만나게 만든다.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미스 켄턴을 향해 여행을 하며 자신이 몰랐던, 옛 주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듣게 되는 것이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는 작은 딸의 혼사가 그것이 된다. 노년의 화가는 한 번 어긋난 작은 딸 노리코의 혼사가 깨지지 않도록 자신의 과거를 정리해야 할 필요에 부닥친다. 일본에서는,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혼담이 오가게 되면 상대방 집안에 대해, 특히 그 부모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하나의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첫째 딸 세쓰코는 아버지인 오노에게 어떤 암시적인 말을 한다. 이번에도 혼사가 깨지면 안 되니까 예방차원에서(혼사의 상대집안에서 조사를 하기 전에 여기저기 미리 손을 써놓으라고) 조치를 취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아버지로서 딸의 혼사가 잘못된다면 평생에 씻지 못할 일이 될테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오노는 지나간 동료를 찾아가고 자신의 수제자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부탁하러.... 그것은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고 과거가 스스로에게 죄 드러나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가, 가려져있던 과거의 행적이 수면위로, 드디어 독자들에게 드러난다. 독자는 그가 자신의 내면의 어떤 찜찜하고 불유쾌한 과거를 잊은 척, 또는 모르는 척 해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러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중인격자였군. 아니면 무슨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 

 사실 그 두 예단은 맞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오노는 과거를 수정할 수 없는 상황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불리한 과거는 꺼내어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이중 또는 삼중의 인격자가 될 수 밖에 없고, 과거의 그는 그 당시의 당위성으로 필요한 일을  했었던( 지금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것일 뿐..... 이 과거와 현재의 모순, 시대와 이념이 달라진데서 한 개인이 겪는 고초를 작가는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인공 오노는 갑자기 자신의 전력에 대해 회한의 념을 정직하게 발설한다. 노리코의 혼사 때문에 양가가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는 잘못되었다고,  그런데 그러자 그의 주변이 오히려 밝아지고 상대측 가족들이 더 스스럼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첫째 딸도 둘째 딸도 아버지의 그런 고백은 상당히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아버지를 특별히 전범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유래되는가.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질 것 같은 부분이다. 


 나라는 독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노는 상당히 정신적인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은 딸이 결혼을 못하게 되면, 자신의 책임이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과거를 성형하고 싶다. 그러나 성형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리고 세세하게 통찰해보니 자신은 그 시대에 나름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오히려 용기까지 내야했었다. 그러나 또 자명한 사실은 과거의 자신의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던 면이 있으니 오점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

 그래서 그는 고통스런 회한을 그렇게 격식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자 상황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상견례가 그래서 잘 마무리 되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에게는 완연한 사실이지만 어쩌면 상대측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라는 독자의 추리는 분명 그 자리가 화기애애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 같다. 우리 중의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발설할 때 그에게 느껴지는 순수한 감정, 오히려 괜찮다고 덮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단순하게 오노가 자신의 과거를 회한한다고 결론을 맺지 않는다. 작가에게 주인공은 긴 세월을 나름의 인내와 성실성 그리고 용기로 살아온 의인이지 않은가. 부유화를 그리는 편안한 삶에서 고통에 직면한 대중을 그리기로 작정한 것부터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아니었던가. 그런 오노에게 긍정할  이유도 있다는 일면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오노가 통찰이 부족하다고, 전범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화가가 무슨 자긍심이냐고만 몰아부치기 어려운 면을 나라는 독자는 이해한다. 그러면 작가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지금과 아주 다른 시대가 있었고 개인이 그 역사적 순간에 얽혀들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피곤한 감상문이었다. 단순한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진 서사는 독후감도 쉬운데 어떤 형이상이나 이념에는 참 조응하기 힘들다. 나의 지적 능력은 되는데 술술 풀리는 언어가 안되는 걸 보면 단순무식하게 사는 삶에 너무 절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존경을. 에밀졸라 이후 처음으로 극존경을 바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설가는 다 훌륭하다. 



**두꺼운 글씨체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행한 일종의 전략과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나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이시구로의 독자를 '살짝 속이기' 전략은 상당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물론 전문비평가들은 다 연구해놨을 테지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그만두고 이 전략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두꺼운 글씨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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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이 책을 읽어야 할 때쯤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건너뛴 책을 어제 새벽에 끝냈다. 성취감이란 없다. 너무 오래 읽었다. 열흘이 넘게 걸렸다. 왜냐면....   "화이트 노이즈"처럼 내 생각에 '노이즈'가 계속 구름처럼 껴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원체 잡념이 많은 사람이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길 수가 없다. 雜念이, 思念이 그리고 邪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매일이 이런 '노이즈' 아닌 노이즈로 카오스 상태다. 언제가 되어야 '노이즈' 없는 청명한 시간을 구가할 수 있을까. 드릴로의  고차원적인 소설 <화이트 노이즈>와 나의 미망인 '노이즈' 사이에서 헤매이는 시간들.


 <화이트 노이즈>는 정말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드릴로가 이 작품으로 작가의 반열에 선 것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서두부터 드릴로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지적인 안목이 드러난다.

 화자인 잭은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히틀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는 히틀러를 강의하지만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편이다. 그에겐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내와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이 있다. 그는 지금 아내가 네 번째 결혼이고 아이들은 전처들의 아이들과 현재 처의 아이들로 넷이나 된다. 거기다 헤어진 아내와 살고 있는 아이까지 합치면 엄청난 대식구를 이룬다. 아내 배비트 역시 재혼이고 전남편의 아이와 현재 남편인 잭의 아이를 데리고 있다. 이 대가족(예전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대가족)의 구성원은 핏줄만으로 이루어진 기존 가족 체계와는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다. 드릴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핵가족 체제가 와해되고 새로운 가정의 등장을 좀 빠른 시기에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있는 추세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 이기도.


 얼마 전에 이 대학에 온 머레이는 아주 독특하고 예언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적 환경'학과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다. 그와 화자는 우연히 대형마트에서 만나게 되고 그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머레이는 세상을 진단하고 그 정교하면서도 한편 어딘가 엉성하기도 한 자신의 논리에 따라 진지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자이기도 하고 우매한 현대 미국인 같기도 하다. 이 인물은 상당히 재미있고 배울 게 많았다. 

 그리고 화자인 잭의 아이들 중 하인리히가 있는데 이 소년은 진취적이지만 냉소적이고 분석적이며 지나치게 영민해서 영악스럽고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 다른 소설들의 인물들보다 평면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뜯어보면 몇 인물은 상당히 입체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로 형성돼 있다고 보여진다. 


 또 잭과 아내 배비트의 관계는 처음엔 알콩달콩한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들 부부의 사랑이란 표피적일 뿐, 자신의 내밀한 심연은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진실 앞에 다다른다. 특히 배비트의 '다일러' 약 복용에 이르르면 안쓰럽다. 그녀는 다가올 죽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한다. 삶이 불안할 때, 어떤 정신적 신체적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흔히 죽음의 사자를 본다고 한다. 우리 엄마 얘기다. 다른 할머니들 얘기다. 내가 맞이할 멀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검은 옷을 입은 내방객을 맞는다고 한다. 죽음의 사자라고.... 마지막 절망이나 무기력에 빠지면 인간은 죽음 앞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그런 일상 속에서 '유독가스 공중유출사건'이 발생한다. 잭은 대피과정에서 유독가스에 잠깐 노출되는데, 그런 그에게 전문가인 양 하는 담당자는 그가 여러 면에서 정상인과 다른 수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언젠가 누구든 죽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잭은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끌어안고 아내가 먹었다는 약 '다일러'를 찾는다. 쓰레기통을 뒤진다. 배비트가 그 약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했던 남자를 찾아간다. 그는 그 남자를 쏘아죽이고 다일러를 빼앗아 오겠다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폐인이 된 그 남자를 쏜 뒤 인간적 연민에 빠져 그를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면서 그는 고양된 자신의 정신을 체험한다. 아이러니 정도가 아니라 희비극적인 코미디가 연출된다. 그는 아내를 성적으로 유린했던 이제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남자를 쏘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죽게 만들었던 자신이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 목숨을 살렸다는 데서 어떤 정신적 고양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유쾌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드릴로의 재기가 번쩍인다. 모순적인 인간성의 이해를  특별히 각인시켜준 드릴로가 정말 작가라고 느껴진다. 


 잭이 부상자를 데리고 들어간 병원에는 수녀들이 처치를 하고 간호를 한다. 독일 수녀와의 대화가 압권이라 할 만하다. 수녀는 말한다. 천국은 없다고, 이 시대에 천국을 말하려거든 썩 나가라고, 당신들이 믿는 그 믿음은 그런 믿음이 필요해서일 뿐, 자신들은 천국이 없어도 믿음이 없어도 부상자들을 돕고 돌봐줄 수 있는 거라고, 헌신이 필요해서이지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또 아주 포스트모던한 소설답지 않은 말도 독일 수녀는 내뱉는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있어야 해요. 바보들, 천치들, 환청을 듣는 사람들, 방언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미치광이예요. 당신네들의 불신을 가능하게 하려고 우리는 우리 삶을 포기하죠....."


 막내인 와일더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내려가 고속도로를 가로지른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안의 운전자들이 경악해서 소리를 지른다. 숲속 높다란 집 이층 베란다에서 두 여자가 안타까운 소리를 지른다. 와일더는 수많은 경적소리와 인간들의 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그대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개천(?)으로 떨어진다. 아이는 안전하다. 이것이 드릴로가 말하는 희망이란 말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애가 차에 치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희망이 있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화이트 노이즈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신의 공포를 잊기 위해 히틀러를 연구하는 교수가 있고, 겨우 엘비스 프레슬리(그 팬들에게는 미안하다)를 연구하는 객원교수가 있고.... 이런 세상에 무슨 희망이..... 

 

 그런데 세상을 희망이 없다고, 우매한 대중과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보면 진절머리가 나는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냐고 말하는 나는 과연 얼마나 청정한가, 나는 얼마나 우매한가... 나는 왜 자꾸 사념에 빠져드는가. 나는 왜 사념을 떨치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면서도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드릴로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 작품은 모순투성이의 인간들을, 이 세계를, 이 악마적이면서도 한편 슬프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고 칭송하고 싶다. 화이트 노이즈와 죽음과 이 세계의 지독한 모순과 냉혹하면서도 거짓된 자본주의의 현대성과 쇠락하는 개인을 그리고 있는 드릴로의 장편 <화이트 노이즈>, 훌륭한 소설이다. 


p.s

 어쩌란 말이냐, 페이퍼를 쓰다 피곤한 것 같아 마구 빨리 써놓고 얼른 등록하기를 눌렀다. 그리고 아마 7시간이 지난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제일 중요한 이 책의 모티프이며  제재인 '화이트 노이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줄거리를 쭉 대강 훑고 다 썼다고 생각한것..... 

 이 작품에서 군데군데 계속 한두 행의,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없는(의미 있기도) 말들을 겹따옴표를 써서 그대로 들려주기도 하고 아예 상품명이나 상표명이 불쑥불쑥 나열되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화이트 노이즈'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광고를 위한 노래를 의미없이 흥얼거릴 때가 있다. 수많은 매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하고 선전을 하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왕인, 그런 시대.... 수많은 정보와 광고 속에서 인공적인 공간과 물질(상품)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고나 할까. 돈 드릴로는 이런 삶의 표피를 뚫고 심연까지 내려가 인생을, 죽음을 그리고 공포와 외로움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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