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쯤 전부터 <문학이론>에서 굳이 내 취향에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베껴 적고 있었다. 오늘 아침 컴앞에 앉아 이 옮겨적기를 하려 한 까닭은 특히나 '욕구'와 '욕망'에 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며칠 전 읽은 13장 자크 라캉의 말 때문이었다. "라캉은 욕망을 실현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합니다. 욕망의 환유적 구조가 그가 '점근선적 경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르기 때문인데, '점근선적'이라는 말은 만나고 싶어하는 선을 향해 휘어져가지만 절대 닿지는 못하는 선을 뜻하며, 증상을 감춘다는 말을 연상시켜 언어유희의 느낌도 있죠"(303쪽)

 이 라캉의 말은 순식간에 문학적 사유를 불러왔다. 당장 인물이 그려지거나 사건들이 마구 떠올랐던 것은 아니지만 '점근선적'이라는 단어 속에 잠긴 수많은 절망과 깊은 허무가 난무하는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없이 환유적으로, 점근선적으로, 정착도 아니고 뚜렷한 변화도 아닌, 헛되고 헛된 일이, 그러나 당장은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라도 공감할 문장들이 아닐까.

 그래서 <문학이론> 책을 꺼내놓고 페이지를 넘기며 컴 앞에 앉아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옮겨적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운이 얼마나 나쁜지... 나는 컴맹이라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는 이유로 몇 십줄의 글이 갑자기 날아가버렸다. 이유는 영원히 모른다. 모를 것이다. 그러더니 동생이며 동네 친구며 전화들을 해댄다.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집중모드로 몇 십 줄을 베껴놨는데, 또 전화가 오신다. 안 받으면 그만이지만 상대가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싶어 또 전화를 받았다. 얘기가 길어진다. 그러다 통화중에 팔꿈치인지 손가락인지로 자판 어딘가가 건드려졌나보다. 또 날아갔다. 날아간다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날아간 것을 다시 불러오는 건 그 날아간 새인지 컴인지의 명목을 모르고 그것의 체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다시 되불러 올 수가 없다. 그런데 누구한테 화를 내나? 화 낼 누가 있어줘야 덜 화가 나는데, 화 낼 상대마저 없으니, 아니 그 상대가 오직 꼽자면 나밖에 없으니.... 한심하고 분하고 무능력한 나에게 서글프기도 하고...

  결국 기운이 확 떨어진 나는 책을 덮고, 그렇다고 그냥 컴 앞을 떠나기는 너무 서운해서 이런 글같지 않은 글을 쓴다. ㅠㅠ... 그렇다고 <문학이론> 베끼던 것 말고는, 특별히 쓸 무엇이 있지도 않다. 그러니 무얼하랴. 무얼 쓰랴. 알라딘에 미안하다. 내 시간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우리 감자에게 미안하다. 그 시간동안 감자에게 밥이나 줄 걸... 괜히 고생만 하고 컴에 빠져 그새 점심이 됐으니. 감자야 이제 밥 줄게 미안. 하긴 나도 아무 것도 안먹었으니 뭐 이해해줘. 

 점근선적인 내 삶이여. 이제 지쳤으니 은유로 끝을 내자. 아니, 아니다. 은유도 상징도 아니다. 온전한 현실로의 세계. 무지막지하게 맑고 냉혹한 현실의 세계. 그 곳으로 넘어가 얇고 좁게 쌓아놓은 기반이지만, 두 발은 고사하고 한 발 올려놓기도 힘든 어설픈 기반이지만, 그 위에 올라서 다음 여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언제나 혼자였던 길들.... 곧 그 길을 찾아가야한다. 다른 좋은 길은 내게 없으니까.  어쩌다보니 그 목적지를 가야된다는, 이상하게 갑작스런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정말 어쩌다보니... 이누므 컴퓨터 때문에 갑자기 낙서면서 낙서가 아닌 이상하게 휘어져버린 글. 하긴 내 안에 마지막 그 길은 항상 유보되어 있었다. 

 어제 루시아형님이 말했다. 그래도 너는 무언가를 너를 위해 해왔지 않니? 그래도 그 정도면 너는 네 맘대로 살아온 거야. 그래도, 그래도를 세 번쯤 말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도 나는 괜찮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엉망진창인 삶을 잘 살아왔다. 루시아형님이 또 쐐기를 박았다. 잔소리말고 그냥 되는 대로 열심히 해. 하다보면 뭐가 되겠지. 잔소리하지 마. 

 잔소리 안 하련다. 투덜대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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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19-10-20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어느 시골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읽는 글이었습니다.감사합니다.

lea266 2019-10-2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복소복 눈이 벌써 내린적이 있나요? 낙서같은 글을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