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책을 만나면 일단 그 두께를 보고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다. 이 행위는 책에 대한 내 태도의 일면을 나타낸다. 내게 책은 설레는 새로운 문이면서 부담스러운 짐이기도 하다.  저자가 펼치는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나를 설레게 한다면, 그와 대칭되는 지점에선 독서행위에 대한 심리적인 강박이 깔려 있다는 의미이다.  왜 나는 독서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을까. 


일단 기억력이 너무 안좋아서 다 읽고 나서도 정확한 줄거리를 꿰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전에 <속죄>를 읽고 강의실에 갔을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눈 또다른 독서가들의 경우, 정확한 줄거리를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나와 다르게 그들은 너무 빨리 읽어서인지 작가의 암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그때 이언매큐언은 단지 몇 문장만으로 자신의 의도를 나타냈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에서 그들은 가속도가 붙은 탓으로 작가의 암시를 놓친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은 판명됐다. 

그러나 그들이 단시간에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세심한 부분을 놓친 데 비해 나는 열심히 정독을 해 놓고도 책을 덮자마자 줄거리를 잊어버리니 내가 독서를 더 잘했다는 자평은 할 수 없다. 

오히려 비교를 굳이 신랄하게 해보자면, 능률 면에서 나의 느려터진 독서가 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 세 권을 읽을 때 나는 한 권을 읽으니, 그들은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세 작가를 만나고 세 개의 세상을 알게 되지만, 나는 한 작품에 한 작가만을 만나는 꼴이니 한 세계밖에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읽었으면 기억이라도 오래 해야 될텐데, 기억력은 그런 배려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한탄은 쓸 데 없는 짓이다. 기억력 향상은 의학으로도 별무신통일 테니까 . 

특별한 방법은 역시, 없다. 그냥 이렇게 독후감이라도 쓰면서 저 무의식 어디쯤에 먼지만큼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작품들로 옮겨가는 수밖에.... 그래서 독후감은 계속된다.


<에브리맨>은 역자의 후기까지 합해도 이백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나의 강박은 날아가고  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독서대에 끼운다. 그러나 작가의 사유는 이백 페이지가 아니다. 페이지에 비례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회한, 해서 어찌할 수 없는 허무주의로 독자는 이끌려간다. 모든 사람들 대다수가 그래, 나 역시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허무하게, 나 역시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을 수 밖에 없겠지, 라는 비관에 빠지게 만든다. 허무하고 허무한 생의 말로, 아쉬움과 서러움에 젖어들 노년의 시간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에브리맨>의 '그'는 세 번 이혼한 남자다. '그'는 말년을 혼자 외롭게 살다 저세상으로 떠난다. 그의 첫째 아내에게서 낳은 두 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증오와 미움을 안고 산다. 장례식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두 아들은 그럴 만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로서 금전적인 책임은 졌지만 일상을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무를 완전히 지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두 아들과 다르다. 그녀는(낸시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딸로서의 책임감을 스스로 느낄 줄 안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가장 관심을 갖고 사랑해 준 딸에게 그는 고마움과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그와 일상을 같이하는 사람은 없다. 세 아내는 이혼했으니 당연히 곁에 없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경원시하니 소용이 없고. 그래도 낸시는 이혼녀로 쌍둥이를 키우고 아버지에게 애정을 담뿍 쏟으니 손주들과 딸과 함께 살아볼 생각을 그는 했다. 그러나 딸은 자신의 어머니와 살아야 할 상황을 맞는다. 그러니까 두 번째 부인이 늙어, 그녀도 노환과 질병을 심각하게 안고 있다. 누군가 그녀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딸 곁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을 그리워한다. 형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으며 그가 어려울 때마다 알아서 그를 도와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형은 너무나 완벽한 사람에 속했다. 형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여자들을 쫓아다니다 혼자가 된 자신에 비해 온전한 가정을 지키고 있다. 더구나 형은 여러번 수술을 한 그와 달리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몸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심각한 질환과 수술에 지치고,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형에 대한 반감과 질투로 나타났다. 형과의 사이는 멀어진다. 

하지만 지금 완전히 혼자가 된 그는 형이 필요하다. 낸시와 함께 살 수 없는 지금, 형의 곁에서 함께 살면서 자상하고 따듯한 형의 마음, 돌봄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형은 먼 이국 땅으로 떠나있다. 갑자기 형에게 자신을 위해 돌아오라고, 자신에겐 형이 당장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친족들에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쉽게 그들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그는 죽는다. 수술을 받고, 회복되지 못한 채 죽는다. 

그는 열심히 살았지만 구멍이 많았다. 육체적 쾌락을 쫓아 바람을 피웠고 이혼을 했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인 아내를 잃었다. 두 아들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주지 못해 증오심을 뿌려주었고 평생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다. 늘 다정했던 형과 스스로 멀어진 후에 후회를 했고, 죽기 전, 수술실에 들어갈 때에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죽은 후, 그를 위해서 슬퍼해 준 사람은 딸 낸시와 형 하위, 그리고 잠시 그를 간호하고 도왔던 모린 정도 밖에 없었다.그는 악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인도 아니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한편으론 부도덕하게 행동한 난봉꾼이기도 했다. 

그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았고,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혼자 마지막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는 에브리맨이다. 훌륭한 인간의 전범을 보이지 못한, 그러나 비난받을 만큼 악하지도 않았던, 그저 그런 한 남자, 한 인간. 

그는 대다수의 우리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최후의 모습은 쓰디쓰게 내게 다가온다. 우리들 이야기, 우리들의 말로, 바로 나의 미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나약하고 한심하고 어리석고, 후회와 서러움이 자리할 노년을 맞이할 것 같은 평범한 나....


필립로스는 소설을 참 쉽게 쓰는 것 같다. 심혈을 기울여 공을 들여 한 자 한 자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하듯 쉽고 친밀하게 읽힌다. 어쩌면 이런 작가가 잘 쓰는 작가이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바람피는 장면에서는 혹시 이 상황들이 작가가 직접 겪었던 일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작가 자신이 바람핀 얘기처럼 느껴져서 우습기도 하고 그런 상상을 하는 내자신이 더 이상한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거의 포르노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자신을 다 까발릴 수 있는 용기있는 작가인지도.....


인간 대다수는 에브리맨, 나 또한 에브리맨.... 니체의 초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상을 살고 나를 사랑하고 삶을 즐기고(그러나 바람피는 '그'처럼 되자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괜찮은 최후를 맞기 위해 자신의 주변과 자신을 잘 정리해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허무함에 젖지 말기. 비관주의에 빠지지 말기. 체념에 나를 내어 주지 말기.... 가족을 사랑하고 사랑해주기.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열심히 배우고 나를 세우고 나를 이루기. 나 자신을 이루고 나를 실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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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6-13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중반까지 밖에 못 읽고 댓글합니다 ㅜㅜ
속도는 항상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밑줄을 그으며 잠시 머물러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lea266 2019-07-0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왜 이 댓글을 읽지 못했는지 아쉽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으며 읽어야 그나마 제대로 읽는 느낌이라 아예 연필을 들고 독서를 합니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쉬며 읽은 문장을 다시 읽기도 합니다 잠시 머물러 보는 습관...너무나 공감합니다~^^ 책이 있어 괴롭고 그 책때문에 행복하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