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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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는 제목만큼 주제가 웅숭깊고 서사와 묘사가 빼어나 소설의 전범을 다 보여준 것 같다.
매큐언은 이 작품으로 여러 상을 수상했고 그간 자신을 향하던 이런저런 부정적인 시각들을 일소했다.그만큼 <속죄>는 문학적으로, 소설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고 매큐언의 생에서 다시 또 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엄청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내게 소설의 꽃은 주제와 더불어 묘사라고 생각되는데,그동안 읽은 대부분의 훌륭한 소설들의 첫번째 덕목이 이것이었다.
1부에서 세실리아와 로비의 분수앞 광경이 펼쳐지는 부분은 환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이다. 햇빛과 젊은 남녀, 분수대, 값비싸고 위험한 꽃병, 분수대를 채운 물 속으로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뛰어드는 세실리아와 그 앞에 황망히 서 있는 순수한 청년 로비,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거리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작가의 묘사는 치밀한 반면 젊은 남녀의 심리를 대놓고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관능적이고 순간적인 유혹과 갈등을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열세살 화자 브리오니의 내밀한 욕망과 사춘기의 삐딱한 성향이 묘사와 설명을 통해, 연극을 도모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인식된다. 처음에는 사랑스러운 소녀로 읽어나가다 그 도가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성향에 분노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브리오니를 아주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우연이 아니라 소녀의 고의적인 면에 기인했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또 이 대저택에 당분간 손님으로 머물게 될 롤라와 두 쌍둥이 동생 피에로와 잭슨, 손님으로 온 폴 마셜 등의 대화와 행위로 그들의 성향과 행위를 이해하게 된다.
브리오니는 그러니까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하고 뻔뻔하고 비열한 마셜과 영악하고 이기적인 롤라와 더불어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 악행은 그러나 고의적이었음에도 소녀의 잘못된 내밀한 욕망과 편협함이었을 뿐,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데서 일말의 안타까움도 병행한다.
폴 마셜의 롤라에 대한 강간행위가 브리오니와 마셜, 롤라의 합작품이 되어 로비는 감옥으로 보내지고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로비는 보병 입대를 조건으로 석방된다. 죄수의 몸에서 자유가 없는 군인이 된 것이다. <속죄> 2부는 로비의 군대에서의 상황과 사건을 점철시키고 있다. 그러나 공격하는 군인이 아니라 퇴각하는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겪는 숱한 무고한 죽음과 부조리한 상황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려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로비는 세실리아를 추억하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그 시간을 버티어낸다.
이 퇴각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매큐언은 숱한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사료들을 찾아 탐독했다고 한다. 마지막 1999년 런던에서 브리오니가 박물관과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복사하고 책을 빌리는 장면은 바로 작가 자신이 한 것과 똑같았을 것이다.
5년후 브리오니는 18살이 되었고 그녀는 이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캠브리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언니를 따라 간호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언니 세실리아가 로비의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길 자청했다면 브리오니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로써 간호사가 된 것이다. 3부에서 브리오니는 전쟁 시기에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고투해야 하는 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언니와 같은 직업, 간호사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루고 있으며,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 했던 증언을 번복하려고 다짐한다.
그리고 4부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전혀 다른 소제목을 쓴다. "1999년 런던". 브리오니는 일흔일곱이 되었고 작가가 되어있다. 그녀는 곧 치매에 걸릴 것이고 몇 년 후에는 아마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써왔지만 마지막 작품이 될 자신의 자전적 소설<속죄>를 출판사에 보내고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생일잔치에 간다. 로비를 감옥으로 보냈고 자신의 어린시절이 깃든 저택은 호텔이 되어있다.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몇 십명의 친척들이 와있다. 그러나 로비와 세실리아는 그 곳에 없다.
그러니까 3부까지의 이야기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 <속죄>였던 것이다. 실제로 로비는 됭케르크의 퇴각작전 때에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지 못했고 패혈증으로 죽었으며, 언니 세실리아는 로비가 죽은 몇 달 뒤, 1940년 9월 런던 지하에 대피했다가 폭격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소설<속죄>에서 두 연인을 만나게 해 주었던 것이었고....
그러나 신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소설 바깥에서 신이며 전능하다. 속죄란 소설가에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까 브리오니는 최선을 다했을 뿐, 속죄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지도 모른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할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속죄>는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 중의 소설이다. 그리고 일종의 액자소설이라고 본다. 작가 안의 주인공 작가, 소설 속의 소설이 주제가 되고 제목이 되니 이중의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는 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인의 생각과 상황을 함부로 내 자로 재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언제나 늦은 것이며 진정한 대가를 치르기에 인간은 무능력하며 특별한 방법 또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