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창 - 제주4.3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김홍모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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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모 작가의 [빗창]을 읽었다.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제주 4.3’에 대한 내용이다. 제목 ‘빗창’은 제주 해녀들이 전복을 딸 때 사용하는 도구를 말한다. 이야기는 일제치하에서 터무니 없이 착취를 당하던 제주해녀항일운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주도해녀어업조합원들이 해녀들을 보호하고 채취한 해산물을 정당하게 판매할 수 있기 위해 시작한 모임이 어느덧 항일운동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기대하지만 곧이어 미군정이 시작되고 일제치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어느 면에서는 더욱 고단한 삶이 이어진다. 더군다나 “일제에 부역하던 고문경찰, 친일 관료, 악덕 경찰들이 청산되기는 커녕 미군중에 붙어 계속 권력을 누리며(108)”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후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선거 강행을 결정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양심적인 세력은 분단에 반대해 들고일어났다. 남로당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김규식 선생도 극렬히 반대했으나 이승만은 ‘반공’의 탈을 쓰고 미군정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나섰다. 미군정은 제주에서 군정 결창과 서북청년회를 이용해 주민들을 무지막하게 잡아 가뒀는데 그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148)” “5.10선거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치러졌다. 남한 내 모든 투표소마다 무장 경찰과 극우단체가 배치된 가운데 공공연히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선거가 무산된 제주 지역의 2명을 제외한 국회의원 198명이 당선되었고, 이들 중 다수는 이승만 지지세력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 헌법이 공표됐고,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1948년 8월 15일 이남만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한국군에 대한 지휘 권한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었고, 일본군 ‘나카무라 사다오’ 상사였던 송요찬 소령이 토벌사령관으로 임명돼 제주로 내려온 뒤 1948년 10월 17일 초토화 작전 개시를 알리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로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군 14연대는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미군 로버츠 준장과 이승만 정권은 과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했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탄압하던 일본군 출신 김백일, 백선엽이 진압작전을 벌여 7천여명의 주민을 학살했다.(194-197)”

지금이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비행기를 한시간만 타면 편안히 제주에 도착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민은 함부로 거주지를 뭍으로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제주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보다 경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고, 제주 토산품을 왕에게 진상하는 과정에서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선량한 백성들은 고된 일을 하고도 배를 주리며 열악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자발적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해방 후 통일된 정부수립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을 빨갱이라는 이념 프레임을 조작하여 일제잔당 세력들의 잔혹한 살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후 군부독재 시기에는 제주4.3에 대한 언급은 철저하게 금기시 되었기에 내륙의 많은 이들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뒷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가을에 제주에 머무는 동안 제주4.3평화공원에 자리한 4.3평화기념관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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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산 -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아무튼 시리즈 29
장보영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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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영 님의 [아무튼, 산]을 읽었다. 부제는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이다. 아무튼 시리즈 29번째 책이다. 저자의 인생스토리가 다분히 묻어나는 산에 대한 사랑은 ‘거 어차피 내려올거 뭐하러 올라가냐’고 투덜대는 이들까지도 ‘동네 뒷산을 한 번 가볼까’ 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전해준다. 지리산에서부터 시작된 산에 대한 동경은 에베레스트 트레킹과 산을 전문으로 하는 월간지로의 이직에서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너로서의 역동적인 삶의 변화는 읽는 내내 가슴을 설레게도 숨차게도 만들었다. 진정 마음이 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용기내어 선택하고 힘겹지만 견뎌낼 수 있었던 삶의 발자취를 솔직 담백하게 그려내어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표지에 그려진 산뜻하고 뭔가 끊임없이 힘이 샘솟는 듯한 말괄량이 소녀의 모습처럼 아마도 저자는 산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총천연색의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각종 간식과 여러 필수품을 넣은 배낭을 두르고 심지어 오르고 내릴때 도움을 주주는 등산 스틱까지 손에 쥐고 왁자지껄 떠들며 단체로 산을 오르는 이들을 종종 보곤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초반의 그런 활기찬 싱그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앞을 가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지에서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줄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없다. 학생 때에는 종종 산에 오르곤 했었다. 그런데 그게 나의 의지라기 보다는 주로 타의로 인해, 때로는 강제로 산행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지금처럼 등산복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한겨울에 월악산을 청바지에 솜잠바를 입고 산에 오른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 깡이었는지, 아니 무지의 소산으로 용감하기만 했던 것인지 무사히 내려왔다. 학부 졸업여행으로 설악산을 가서는 마치 밀린 숙제를 해치워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앞만 보고 올라갔다. 저자가 알피니즘(어떤 방법을 택하든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등정주의)과 머메리즘(매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등반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등로주의)에 대한 언급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가벼운 몸 덕분에 제일 먼저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등산에 대한 아무런 생각과 고민없이 맨몸으로 올라왔던 터라, 정산에 오르고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식을 먹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동기들이 올라올 것이고 금방 내려갈 수 있겠지란 생각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 동기가 올라오기까지 두 시간 동안 덜덜 떨며 주린 배를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야 했다면 그 누군가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걸했을지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내려올때는 다리가 풀려 올라갈 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고 완전히 하산했을 때에는 기진맥진 그 자체였다. 그 많은 열량을 소비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쓰러지지 않은게 다행일지 모르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때에는 산을 심하게 얕본 것이다. 

“애쓰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삶의 어느 부분과, 일상의 어느 시간과, 인생의 어느 구간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산에서는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끌리는 일들은 그런 일들이었다. 그건 세상 속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호흡과 날것의 언어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50)”
“산을 처음 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바라던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외부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본성을 따르며, 내 안의 순수를 지키며, 본연의 나를 인정하며, 그렇게 소박하게 위대하게 살아가는 것. 지금껏 그래왔듯 산과 함께. 내 안의 산에서, 내 바깥의 산에서 무한한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갈망하며, 산을 넘고 나를 넘어 더 크고 넓고 깊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날기 위해 나는 새처럼 언제라도 훌쩍 배낭 하나 메고서 오르기 위해 오르는 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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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SEASON 1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양정우 외 지음 / 블러썸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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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SEASON 1]을 읽었다. 몇년 전 예능 프로그램으로 방송된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며 감독과 작가들의 시선이 곁들여 있다. 실제 방송될 때 인기가 많다는 것은 기사를 통해서 접하긴 했지만, 본방은 커녕 재방도 못 본 터라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렇게 간결히 정리된 책으로 만나니 순식간에 우리나라의 명소들을 다 방문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기회가 되면 4명의 쌤들의 수다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볼 겸 정주행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의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가쁘게 편집의 시간을 거쳐 송출되는 장면들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맛보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게 되니, 어찌보면 우리에게 무상으로 그런 정보와 감흥들을 전해주는 이들에게 잠시마나 고마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추천사에서 나영석 PD가 무엇보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 뿌듯하고 기쁘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을 직관하지는 못했지만 책에서 요약된 우리나라 각 지방의 특색과 박물관과 음식과 저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우리나라를 이렇게 잘 모르는구나라는 자책과 더불어 4명의 쌤들처럼 그곳에 머물며 밥을 먹고 역사의 자리에 발자취를 남겨보고 싶어진다. 

“붉은 석양이 내려와 사물의 실루엣이 흐려질 때, 멀리서 다가오는 짐승이 나를 도아줄 개인지 나를 해칠 늑대인지 알아볼 수 없는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96)”
“재승쌤은 이런 무서운 놀이기구를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면서 카필라노 흔들다리 실험을 예로 들었다. 실험은 간단했다. 남성들을 두 개 그룹으로 분류해서 첫 번째 그룹은 흔들리지 않는 돌다리를 건너게 했고, 두 번째 그룹은 흔들다리를 건너게 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온 남성에게 한 여성 연구원이 다가와 설문 조사를 청했다. 조사 끝에 여성 연구원은 자신의 연락처를 건네며 조사 결과를 알고 싶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 결과, 돌다리를 건넌 남성들보다 흔들다리를 건넌 남성들이 훨씬 높은 비율로 여성에게 연락했다. 흔들다리를 지나는 동안 심장박동 수가 증가했는데, 남성의 뇌는 가슴이 뛴 이유가 여성에게 반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무서운 놀이기구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롤러코스터를 타느라 심장박동이 상승할 때, 우리의 뇌는 이를 연인에 대한 설렘 때문이라고 기분 좋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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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천천히, 북유럽 -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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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 김현길 작가의 [혼자, 천천히, 북유럽]을 읽었다. 북유럽 여행기는 처음 보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4개국을 익히 들어왔음에도 소개되는 명소와 자연 경관은 너무나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그동안 보았던 사진이 첨부된 여행기가 아니라, 저자가 직접 그린 드로잉화로 묘사된 모습들은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했다. 사진이 가진 현실성과 직관성은 평면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자연과 건축물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더욱 입체감 있게 다가왔다. 부제가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북유럽을 백야의 도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몇 번이 반복해서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라고 표현을 하는데, 어찌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4개국은 유럽 여행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유럽과 동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아도 북유럽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듣지 못한 것 같다. 유럽 여행에서 북유럽 4개국과 스위스, 영국은 바게뜨빵으로 연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고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 번 가볼 용기가 나지 않을까 싶다. 
예정대로 스페인 살라망카의 어느 기숙사에서 이 책을 봤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티켓팅을 하고 서둘러 숙소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라는 씁쓸한 상상을 해 본다. 랜선 여행 대신 드로잉 수채화로 그려진 그림 여행을 대리 만족하며 아쉬움과 미련을 떨구어내어 본다. 여행기를 볼 때마다 여기는 꼭 가보고 싶다, 이건 꼭 먹어 보고 싶은데, 우아 그 미술관에 가서 저 그림은 꼭 봐야지 라는 결심을 하지만, 사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그 음식을 먹어보지 않아도, 아무리 유명한 명화를 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리를 해서라도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막연한 상상과 표면적으로만 보고 들어온 것들을 직접 경험하게 될 때의 추억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진 추억들은 내 삶이 먼지가 풀풀 날리듯 각박해져 갈 때, 긁혀진 마음이 쉽사리 아물지 않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 그 장면의 환영을 만들어 서서히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여행을 하면 하루의 목표는 단순해진다. 현지인에게 말 한마디를 거는 사소한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아닌 이곳의 낯선 음식을 먹는 것 그 자체가 하루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숨 가쁘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집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한 염려는 잠시 설득력을 잃는다. 지금의 여정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너무 멀리 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여행은 어쩌면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85)”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은 학구열이 높기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당시 저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에 심취해 있어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여왕의 끈질긴 권유 끝에 마침내 스톡홀름으로 이동해 여왕의 철학 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선택은 불행의 단초가 되었다. 여왕은 매일 새벽 5시에 강의를 듣고 싶어 했다.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의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며 강의를 준비해야 했고, 반복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결국 폐렴에 걸렸다. 끝내 병세가 호전되지 못해 그는 결국 다음 해인 1650년에 이곳 스톨홀름에서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가 세상과 서둘러 이별한 데에는 이렇듯 여왕의 뜨거운 학구열이 한몫했다.(146)”
“피오르는 ‘내륙 깊이 들어온 만’이란 뜻을 지닌 노르웨이어로 빙하가 침식시킨 ‘U’자형의 깊은 골짜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어 만들어진 좁고 기다란 만을 뜻한다.(208)”
“한자리에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빙하는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다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빙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서서히 미끄러지며 커다란 바위를 부수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바닷물이 들어와 골짜기를 채우면 그것이 피오르가 된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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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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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을 읽었다. 1937년 연해주 일대에 살던 조선인들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시켰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요즘 가장 가까운 유럽 여행이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짧은 휴가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었는데, 그곳 일대에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초 기근과 수탈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연해주에 주인 없는 땅이 많아 러시아에서 조선인들에게 거저 땅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몇 달에 걸쳐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았던 그 당시에 소작농의 삶을 살던 이들이 세간을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결국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어려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일제치하에 들어간 조선 땅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척박한 동토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어느 정도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들에게 스탈린은 다시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넘어 레닌과 스탈린에 이르러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변모한 소비에트연방은 몹시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7만명의 강제 이주는 그들이 죽던지 말던지 신경쓰지 않겠다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등의 지역으로 강제 이송된 후대에 고려인(카레이스키)으로 불리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김숨 작가의 언어로 다시금 살아숨쉬며 우리에게 그들의 역사를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작품은 페르바야-레치카 역에 화물열차에 강제로 태워진 몇몇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여러 등장 인물 중에 주인공에 해당되는 금실은 배가 부른 임산부로 시어머니와 함께 열차에 올랐다. 남편은 떠돌아 장사꾼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간도 땅에 물건을 팔러 다녀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금실 외에도 여러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고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말을 조선말보다 더 잘하고 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고향이 조선이 아닌 러시아였지만 얼굴은 조선인이기에 그들은 상황에 따라 배척받을 수 밖에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까지 화물열차에 실린 채 사방이 가려진 채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한 달 가까이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짐승 취급을 받으며 이동한 터라 열차 안에서 상당 수의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그렇게 죽은 이들을 달리는 열차에서 밖으로 버릴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 그려진다. 
특히나 금실의 시어머니 소덕은 며느리에게 혹시 자신이 죽거든 시체는 아무데나 버리더라도 자신이 입었던 저고리와 치마는 반드시 챙기라고 당부한다. 저고리와 치마에 주머니를 잔뜩 만들어 곡식과 채소의 씨앗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씨앗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간곡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소덕은 열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소변을 보러 간 사이 다시 열차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한달이 지나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들은 트럭에 실려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17만명이나 되는 이들을 이동시키려 했으니 아마도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이송시켰을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 굴을 파고 집을 마련한 금실은 아이를 낳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린 채 열차 안에 함께 있던 이들을 떠올린다.
“지난겨울 그녀는 구덩이를 파고, 갈대로 엮은 멍석으로 그 위를 덮어 땅굴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었을 때 그녀의 손톱 여섯 개가 빠져 있었다.(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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