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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평점 :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읽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디스하는 비아냥의 뉘앙스가 담긴 재미와 더불어 '그래 말 그대로 글을 쓰려면 앉아 있어야 하지'라는 당연한 귀결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람마다 책을 고를 때의 취향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아마도 단연코 소설이 가장 많이 읽히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당근 제일 재미있으니까, 근데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재미를 뛰어넘는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심지어 SF소설의 등장인물도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겉모습만 보고 지나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다. 사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몇 배는 힘들다. 그러다보니 친한 사이라도 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때가 많고, 그러다보니 나중에 시한폭탄이 터지듯 고름이 터져나오는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왜 자기한테 자세히 말하지 않았느냐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사람들의 속내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들이라도 부턱대고 자신의 상처와 아픈 과거를 손쉽게 드러낼 수 없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타이밍과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을 만한 신뢰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쓸데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기회를 놓치기가 일쑤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내 주위의 사람들을 한 명씩 대입시켜 보곤 한다. 가끔씩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평소에 아예 재쳐놓았던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런 황당한 행동은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란 미약한 이해의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엊그제 저녁 8시가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평소 듣던 라디오에서 갑자기 한강 작가의 이름이 거론되며 축하드린다는 인사가 들려왔다. 설마하는 마음에 검색창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오 마이 갓! 노벨문학상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어 줄줄이 이어지는 단신들을 살펴보았다. 이튿날부터 대서특필된 한강 작가님에 대한 기사는 메인 페이지를 도배하기 시작했고 서점가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한다. 어떤 분의 인터뷰 대답처럼 우울한 소식만 이어지던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에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정말 오랜만에 흐믓해지는 소식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인스타그램의 기성작가들은 거의 다 한강 작가의 사진을 올려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고 노벨문학상을 원어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평소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이 번역되어도 거의 읽지 않았는데, 나 또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생경한 기분이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독서의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요즘 MZ 세대에는 또 다른 유행으로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골린이, 테린이처럼 단명하지 말고 책린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꿈꿔봤을 소설 쓰기에 대한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따끔하게 정석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서처럼 다가왔다. 다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정말 소설가들은 대단한 분들이구나, 애시당초 이렇게 긴 호흡의 글을 상상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라는 처음의 결론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책머리를 읽을 때에는 아주 희미한 희망이 엿보였지만 책장을 덮으며 충실한 독자로 남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리뷰를 남기는 것으로 저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단번에, 쉬지 않고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에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던 우리의 글을 얼마나 어떻게 고쳐서 좋은 글로 만들 수 있느냐에 관한 일입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천재나 괴짜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일정하게 좌절하고, 일정하게 고치는 사람만이,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에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29)"
이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천부적인 재능만으로는 숙련되고 노련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부단히 자신을 부수고 무척이나 지루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위선의 탈을 벗고 나올 수 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 지적을 한다면 그건 더욱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가져온다. 때로는 분노에 이르고 이성을 잃어 비논리적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고집한다. 그리고 결국 지금보다 한 걸음 뒤로 퇴보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밀 퇴와 두드를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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