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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이기호 작가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읽었다. 그동안 어째서 저자의 책을 한 권도 만나지 못했던 것인지 한탄이 느껴질 정도로 이번 소설은 너무나도 좋았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까울 정도로, 아니 작가님 이렇게 재미있게 써도 되는 겁니까? 라는 응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좋았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표지에 실제로 저자가 키우고 있는 반려견 이시봉을 형상화한 그림까지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귀여운 비숑 프리제의 모습처럼 개웃기는 등장인물들이 나와 갑작스레 혼자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이름에 봉자가 들어가면 이상하게 재미없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도 그랬고, 지금은 대세 배우가 된 노안의 대명사 현봉식(본명이 보람이라는) 배우님도 그렇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 이시봉에 얽힌 이야기는 웃음과 슬픔과 약간의 추리와 스릴러가 버무려져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순삭하는 기분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인스타그램 DM으로 강아지 이시봉을 확인하는 앙시앙 하우스와 리다의 대화로 시작된다. 여기서 '리다'라는 이름은 이시봉의 견주 이시습이 짝사랑하는 열 살 많은 동네 누나 권하영의 반려견 이름으로 자그마치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사연도 뉘늦게 알려준다.
아무튼 주인공은 말못하는 강아지 이시봉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화자는 이시봉의 견주인 이시습이다. 시습은 스물 살의 백수 청년으로 새벽녘에 시봉이를 데리고 아파트 뒷산을 산책하며 산중턱에서 술을 마시고 내려오는 일상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무력하게 지내는 대책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습은 학교도 중퇴하고 왜 이렇게 지내는 것일까? 시습의 여동생 시현은 정반대로 너무나도 야물딱지게 나오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시습의 엄마는 아들이 이렇게 지내는 것에 왜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시습의 아버지가 잘 다니던 타이어 공장을 갑자기 그만두고 피자집을 차려 열심히 일을 하다가 너무나도 어이없게도 무단횡단을 하다 트럭에 치여 죽게 된 연유가 나오면서 조금씩 이해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피자집의 문을 열고 나와 무단횡단을 하게 된 이유가 시봉이가 갑자기 뛰쳐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시습은 엄마에게서 시봉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방에만 머물게 한다.
앙시앙 하우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헤맨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가 바로 시봉이인 것 같다고 리다에게 연락한 것이고, 리다는 그 사실을 시습에게 알려 앙시앙 하우스의 브리더들이 시봉이를 만나러 광주로 내려온다. 이후 시습은 시봉의 혈통이 프랑스의 왕실에서 키우던 후에스카르라는 고귀한 피를 받은 귀한 품종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시습은 시봉과 함께 서울과 용인의 앙시앙 하우스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시봉이를 애타게 찾던 앙시앙 하우스의 주인 정채민을 만나게 된다. 정채민은 시습에게 그가 시봉을 찾게 된 연유를 설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박유정과 김상우라는 부부와의 인연을 전해주는데 소설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박유정의 유언과는 상반되는 진술이 있었고 그것이 어찌보면 결말에 이르는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주는 기발한 구성은 시습과 그의 친구들 헬스 중독자 정용과 개빡치네를 연발하는 편의점 알바생 수아와의 친밀한 우정이 따스함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극도의 이기주의자인 정채민의 부와 권력이 가짜로 만들어낸 시봉의 혈통에 대한 역사가 얽혀 뒤로 갈수록 긴장감을 드높이게 된다. 특히나 정채민이 들려주는 시봉과 스페인 왕가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의 역사적 인물인 고도이 총리와 고야의 알바 공작부인 그림에 나온 비숑 프리제에 가공할 사연이 덧붙여져 진짜로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든다.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피에르 피졸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빛과 그림자]라는 가상의 책에 나온 이야기는 스페인 왕가의 사냥 밖에 모르는 무능력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수려한 외모의 왕실 근위대 마누엘 고도이에 빠져버린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등장한다. 왕비는 고도이에게 빠져 그가 총리가 되기까지 뒷배가 되어주지만 고도이는 유럽 전역에 엄청난 미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알바 공작부인을 흠모하게 된다. 당대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구애가 불가능했던 고도이는 알바 공작부인에게 베로와 누녜스라는 비숑 프리제 한 쌍을 선물로 보낸다. 고도이가 마지막까지 베로의 집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훗날까지 이어질 후에스카르 혈통을 지켜낸 것이 스페인 왕가의 몰락과 나폴레옹의 점령사까지 이어지며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렇듯 앙시앙 하우스의 주인 정채민 대표는 시습에게 시봉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피력하며 박유정과 김상우에게 속아 시봉의 어미에 해당되는 카이와 루시를 빼앗긴 거짓된 사연을 들려준다. 정채민이 들려준 안타까운 사연의 진위여부를 떠나 시습은 시봉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밀려오게 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봉이를 데리고 왔다는 전북 무안의 개농장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시봉이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피자집을 시작하기 전까지 몸담았던 타이어 공장의 동료직원이었던 이시봉 아저씨의 연락처를 발견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듣게 된다. 시습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타이어 공장은 회사 운영에 관심없던 오너 2세가 함께 유학했던 홍콩의 사모펀드 운영자와 손을 잡고 이익을 취하는 수순에서 애먼 노동자들만 거리에 나앉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펼쳐진다. 당연히 타이어 공장의 노조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경영진의 계약을 저지하기 위해 파업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불의함을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건 손해배상 청구와 더불어 노조지도부의 구속과도 같은 엄벌이었다.
시습의 아버지는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은 돈으로 집을 마련하고 피자집을 개업하게 된다. 시습의 아버지를 대신해 노조의 홍보부장을 맡게 된 이시봉 아저씨는 회사 본사에서 이루어지는 계약 순간을 급습하게 되고 수많은 이들의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폴로 경기를 흉내내는 오너 2세와 홍콩 사업자의 모습을 보고 그만 꼭지가 돌아 폭력을 휘둘러 구속되게 된다. 이시봉 아저씨는 감옥에서 우연히 강아지 시봉의 어미와 가족들을 키웠던 박유정의 아들 김태형을 만나게 되고, 태형의 부탁으로 개농장에 판 시봉의 어미로부터 갓 태어난 시봉을 데려갈 것을 시습의 아버지에게 부탁한 사실을 시습에게 알려준다.
후반부에 이르러 암에 걸린 외할머니를 돌보고 위해 가평에서 머물던 엄마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고 시습은 두려운 마음으로 한 달음에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엄마를 도와 할머니를 간병하는 사이 시봉이를 맡겼던 리다가 앙시앙 하우스에 연락해 그들이 제시한 돈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을 제시하여 시봉이를 건네고 만다. 집으로 돌아온 시습은 리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시봉을 찾기 위해 수아와 정용과 태형과 함께 앙시앙 하우스로 처들어간다. 시습과 일행을 저지하던 브리더들은 태형 자신이 박유정의 아들이라는 외침으로 인해 용인의 또 다른 앙시앙 하우스에서 있는 정채민 대표에게 데려간다. 소설 속에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태형이 박유정과 김상우 부부의 아들이 아니라 어쩌면 아마도 정채민과 박유정의 불장난 같은 사랑의 소실이 아닐까란 확신은 정채민이 진짜로 찾는 것은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인 시봉이가 아니라 시봉이와 같은 혈통의 강아지를 키우던 박유정이었음을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라며 시습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시봉을 돌려주려 하지 않는 정채민과 그의 직원들의 태도에 화가 난 시습과 그의 친구들과 태형은 시습이 들었던 정채민의 사연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담긴 박유정의 여동생이 들은 유언을 밝힌다. 태형은 애초에 후에스카르라는 왕가 혈통을 가진 비숑 프리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채민의 실체를 밝히려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다 확인한 바라는 말로 반박하지만 정채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습의 무리를 내쫓는다. 쫓겨난 시습과 친구들은 돌아가려다 말고 다시금 시봉이를 돌려달라고 따지려는 찰나 아마도 정채민과 상속 관련하여 갈등을 빚던 호텔을 운영하던 불같이 화가 난 사촌 동생의 등장을 마주하게 된다. 앙시앙 하우스와 시습 무리의 대결로 치닿던 긴장감은 갑작스레 등장한 호텔 오너와 쉐프들이 조장한 시한 폭탄과도 같은 상황으로 절정에 달하고 도망가던 정채민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어이없게도 정채민 대표의 사고로 시습은 시봉을 데려갈 수 있게 되고 사고가 나기 전에 시봉을 내던지 일로 인해 시봉은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봉이 시습을 긴급하게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과정에서 수의사가 하는 말에 소리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물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서 말이 입원이지 보관이랑 뭐가 다르냐는 수의사의 표현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건이 일단락 되고 경찰 조사를 마친 시습은 다시 시봉과 산책할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짝사랑하던 리다 누나의 잠적을 걱정하게 된다. 수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나이에도 아버지에게 맞고 지낸다는 리다 누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염려하던 차에 시봉이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형집행인에게 고문을 받아 죽어가던 길고양이를 살린 릴스의 후속편이 올라오게 된다. 과연 변태같은 고양이 학대자 형집행은 누구인가 따라가던 화면은 정말 어이없게도 집에서 샤워중인 리다의 아버지의 허물처럼 벗어진 옷차림에 집중된다. 시습은 딸이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 고양이를 학대하며 집을 나가면 남겨진 반려견 리다를 고양이처럼 학대할 것이라 겁을 준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DM으로 받게 된다. 떠나버린 짝사랑 리나 누나를 응원하며 시습은 다시 시봉과의 재활 산책을 준비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술을 마시며 방황하던 시기를 마감하고 검정 고시를 볼 것을 다짐한다. 시습은 아버지가 남긴 시봉과 더불어 성장하고 슬픔을 이겨낸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자신을 찾아왔고, 그렇게 이시봉을 만나게 되었다고.(123)"
"박유정이 생각하는 인색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오직 하나뿐인 것이었다. 종교인이 종교만 생각하고,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고,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만 생각하는 것. 그 외는 아무것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338-339)"
시습은 시봉이를 키우면서 시봉이의 순진무구함이 무섭다고 말한다. 새끼부터 키워온 시습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으면서도 좀 더 좋은 간식을 주는 앙시앙 하우스의 사람들에 품에 폭 안긴 시봉은 처절한 배신감을 주기에 충분한 처신을 행하지만, 그건 그냥 동물의 순수한 본능일 뿐이다. 인간과 동물이 유사한 생물학적 기능을 유지하며 살아가지만 시습은 시봉이의 맹목적인 순수함과 열정이 때로는 인간의 인색함과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 사람이 시봉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함으로 모든 것을 추구하다보면 오로지 자기 마음이 결정한 것만 생각하고 염려하는 아주 인색함 사람이 될테니까 말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정채민 대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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