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었다. 프랑스의 콩쿠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로맹 가리의 필명으로 발표된 소설이라는 사실이 사후에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소설이기에 일러스트 버전을 사놓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펼쳐보게 되었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난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몰입감을 선사하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모모의 고백은 끝으로 갈수록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예고하며, 이 세상의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는 소회는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모모의 말이기에 커다란 울림을 주며 쉽게 페이지를 닫지 못하게 만든다. 


얼마전 릴스에서 본 외국인 유튜버가 다짜고짜 이런 말을 시작한다. 한국은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고, 자기네 나라보다 몇 배는 비싼 것 같다고. 당연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뭐가 비싸다는 건지 일부러 말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일텐데도 좀 더 지켜보게 된다. 한국이 유튜버인 튀르키에 자국보다 몇 배 비싼 제품은 데오드란트인데, 설명하길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데오드란트를 사도 꽤 오래 사용하지만,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다 사용할 정도로 빈도수가 높기 때문에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게 아니냐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국뽕의 이상한 결론을... 


그런데 사실 외국에 살다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채취가 유독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렇게 서구 사회에 향수가 발달했는지는 여행을 떠나 한 여름에 사람이 가득한 대중교통을 타게 되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고, 그 존엄함을 무너뜨리는 가장 근원적인 시초가 채취가 아닌가랑 생각이 깊어진다. 간난아기때를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상태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기에게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아기를 씻고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스스로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모모가 경멸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몸에서는 악취가 발생되기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성경 말씀이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삶의 척추를 가로지르고 있지 않나 싶다. 소설의 말미에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식물 상태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유태인 동굴로 아줌마를 데리고 간다. 이스라엘의 친척이 로자 아줌자를 데리고 갔다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줌마의 시체와 기이한 동거를 유지한다. 그리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동행은 시신이 썩어가며 풍기는 악취로 인해 아파트 사람들의 신고로 발각되었을 것이다.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시신 옆에 누워 있는 모모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아이가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모모는 이미 숨을 거둬 창백해진 로자 아줌마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막기 위해 롤라 아줌마에게 받은 돈으로 향수를 사서 통째로 부어버린다. 그리고 아줌마의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하고 서툰 솜씨로 마스카라를 그려넣는다. 아줌마와의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냥 바보가 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악취가 풍기는 육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서 지켜본다. 모모는 아줌마가 병원에 실려가면 자신도 빈민구제소에 끌려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줌마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아줌마의 정신이 흐려져 쇼파에 앉은 채로 똥오줌을 싸도 모모는 아줌마를 끌어안고 아줌마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모가 어리기 때문에,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은 소년이기에 아줌마가 풍기는 악취를 견뎌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애써 어른처럼 싫은 티를 내지 않을 필요가 없기에 아무리 자신을 키워준 로자 아줌마라 해도 역한 냄새가 나면 멀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안아주고 아줌마의 손을 놓지 않는다. 


모모에게 도움을 주는 롤라 아줌마와 이삿짐을 나르는 형제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색인종으로 아마도 주류를 이루는 이들에게 배척받는 상태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로자 아줌마 또한 유태인으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고 과거에는 창녀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는 창녀들의 자녀들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좋지 않는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에 7층이나 되는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전개부터가 모모가 살고 있는 곳은 가난한 이들이 머무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모모의 주변인들은 소외와 멸시가 난무하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들이었다. 로자 아줌마의 상태가 어쨌든 비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모모가 살아갈 수 있도록 로자 아줌마를 씻겨주고 마지막 외출도 도와준다. 


사람의 기분을 단숨에 좋게 만들어주는 아주 비싼 향수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고급 향수는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무관하게 비용만 지불할 수 있다면 언제든 구입해서 내 몸에서도 좋은 향기가 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로자 아줌마처럼 너무나도 못생겨지고 머리털도 몇 가닥 남지 않았고 너무 뚱뚱해져서 목 아래부터 다리까지가 드럼통처럼 커진 상태로 똥오줌을 싸서 풍기는 역한 냄새에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은 살 수 없다. 그런 마음은 이 세상의 아주 소수에게만 허락된 사랑이다. 


머리속으로는 이성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왔다. 하지만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어느 걸인이 풍기는 토할 것 같은 악취에 깜짝놀라 뒷걸음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모모가 보여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창년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의 아들이며 심지어 제 나이까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모가 자신을 키워준 로자 아줌마의 비참한 말로를 외면하지 않고 용기내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밀 할아버지, 카츠 의사선생님, 롤라 아줌마, 왈룸바 아저씨와 같은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지켜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소외된 변두리 인물이지만 로자 아줌마를 대하는 인격적인 모습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모모는 거리의 부랑아가 될 뻔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같이 거친 삶을 살아온 어른들의 도움으로 그 누구도 감히 행하지 못할 사랑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모모가 들려준 로자 아줌마와 보낸 몇 년의 시간이 자기 밖에 챙길 줄 몰랐던 지난 날을 부끄럽게 만든다. 모모가 전해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어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173)"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제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193)"


"로자 아줌마는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구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에요. 다행히 내가 같이 지내면서 돌봐주고 있어요.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275)"


#에밀아자르 #자기앞의생 #LaVieDavantSoi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병모 작가의 [절창]을 읽었다. 구병의 작가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느꼈던 단어 선택에 대한 탁월함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국어사전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완독이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다다른다. 그래도 꽤나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아무리 한자어라 해도 뜻이 어렴풋이도 전혀 짐작되지 않는 말을 접하게 될 때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저자가 이렇게 난해한 단어들을 한 문장에 두 세개씩 나열되는 것을 보고 유식함을 과장되어 드러내기 위함이다, 혹은 이런 불필요한 미사여구들이 장황하게 반복되어 읽기를 방해한다는 손쉬운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되새기며 문장에 담긴 속뜻을 헤어려보느라 읽기가 중단되고 맥이 끊기는 것이 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이 소설에서 핵심을 가로지르는 정황은 문오언와 아가씨로 호명되는 소녀와의 관계를 염두해둘 때 입으로 드러나는 말로서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오독이 반복되는 세상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멈춰서 가만히 헤아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힘주어 선택한 단어들의 뜻을 헤아려보며 멈춰설 때 독자는 문오와 소녀가 도달하고자 하는 불완전한 사랑의 귀결점에 조금씩 스며들어가게 된다. 그런 면에서 피와 상처가 난무하는 잔혹한 상황과는 대척되는 뜻밖의 비유에 속한 단어들의 행진은 여느 소설보다 더 느리도록 책 읽기에 브레이크를 걸게 함으로써 작품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아이러니의 장치를 제대로 매설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이런 단어가 주는 힘과 더불어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온 대사들이 인용되는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다. 피가 흐르는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녀와 어느 대단한 집안의 떳떳하지 못한 태생으로 불법적인 일을 지속해 온 오언의 만남이 소설의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화자라 할 수 있는 소녀의 상주교사로 발탁된 중년 여성의 시선이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소녀가 화자에게 자신이 살아온 지난 날을 고백하는 쳅터를 제외하고는 화자인 상주교사가 누군가에게 문오를 만난 이후부터의 시간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으로 보이도록 경어체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소설 전체가 상주교사인 여성의 눈으로 보인 장면들을 나열하는 경어체로 진행된 이유가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위한 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오언의 말처럼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보통 분 아닌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요.(328)"라는 찐득한 긴장감을 갖게 된다. 물론 소설이기에 그리고 오언이 해왔던 불법적인 일의 크기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기에, 이야기의 첫머리부터 나오는 입을 열게 만들도록 허벅지에 칼을 꽂는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오언에 대한 혐오스러움이 아닌 연민에서 비롯된 그럴만한 이유와 정황을 찾게 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라 억지로 타당성을 찾아보자면 오언이 린치를 가하며 피를 내뿜게 만드는 상처를 드러내는 이들 또한 정의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니며 순간의 이익을 쫓아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비열한 이들로 비춰지기 때문이라면 너무나도 기울어진 읽기일까? 조금 더 오언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생계의 위협을 받는 소녀의 몸을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소녀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도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오언의 행동은 자해를 하면서까지 소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온전히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의 깊이가 있기에 애써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말을 내뱉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내뱉은 수많은 말들이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왜곡된 시선으로 실망감을 불러일으키는 자멸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댄들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 없기에 이미 한 번 깊이 베어버린 상처의 말은 상대방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박혀 그 무엇으로도 낭자해진 피를 멈추게 만들 수 없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오언은 소녀가 부모에게 버림받아 원에서 자란 것처럼 자신 또한 떳떳하지 못한 출생의 신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기에 1초도 안되 뱉어버릴 수 있는 쉬운 말이 어떤 또 다른 절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언은 소녀에게 말로서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소녀가 원한다고 말할 때까지 손을 맞잡을 때까지 기다린다. 하지만 소녀의 기타 선생님이었던 이가 사실은 소녀를 구출하고 오언을 잡기 위해 잠입한 어떤 특정 기관의 요원이었음이 발각되고, 소녀의 간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기타 선생님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분노에 사로잡힌 소녀는 오언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어버릴 때까지, 필요하다면 세상 모든 인간을 읽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만은 절대로 안 읽어.(268)"


오언의 불행한 결말은 소녀의 이 매정한 말로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오언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깨진 컵으로 손에 피가 철철 흘려내려도, 유리조각으로 그러진 쇄골이 흰 셔츠를 붉게 물들여도 그 상처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던 소녀가 통상적인 교통 사고의 반작용과는 반대로 핸들을 꺾어 소녀를 지켜내며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오언의 마음을 마침내 읽어내게 된다. 죽음의 선택만이 소녀에게 온전히 자신을 읽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오언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아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사람 사이로 범람하는 급류 한가운데 놓인 다리의 안정성과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다리가 끊어졌거나 애초에 다리 따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서로의 사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암실 속에서 서로를 보고 듣고 헤아린다는 착각과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63-64)"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344)"


#구병모 #절창 #문학동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in3452 2025-11-0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속의사건에
끌려가기보다는
곳곳에숨겨진쉼표가많아
책을펼쳐놓은채
멍하니,,,
허공을바라보는시간이
더욱길어졌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내
맘대로덧칠을하고.
맘껏상상하며,
문오언에게도
알수없는연민을느꼈습니다
님의탁월한서평에크게공감합니다,,,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었다. 2015년 새롭게 번역 재출간된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입했던 것 같은데 책장에 꽂아두고 다른 책은 다 정리하면서도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간을 읽다가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불현듯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다시 꺼내 보니 80페이지 정도에 붙여놓은 표시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그때 억지로 읽으려 해서 인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몰입감이 좋아서 예전에는 왜 읽다가 접어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책을 아무리 좋아해도 때에 따라서 몰입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백페이지 정도 읽다가 얼마전 교보문고에서 특별판이 나왔던 게 떠올라 다음 날 서점에서 바로 구입해서 이어 읽게 되었다. 특별판은 기존판보다 줄 간격이 조금 넓게 나와서 그런지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고 고정이 잘 되어서 그런지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리고 하얀색 바탕에 그려진 빨간 새의 강렬한 이미지가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같은 내용에 심지어 한 페이지에 담긴 글자수가 동일함에도 양장본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아무튼 특별판 덕분에 이번에는 완독을 할 수 있었고 저자의 유일한 또 다른 장편 소설인 [파수꾼]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추수꾼]과 마찬가지로 성장소설의 대표격이라 부를 수 있는 [앵무새 죽이기]는 유사한 형태로 주인공 스카웃이 성인이 되어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깨닫게 된 진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공간과 시간적 배경이 미국 남부의 앨라베마주의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1930년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저자가 살아왔던 시대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막연히 그려낸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가 만났던 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듯이 당시에 흑인에 대한 만연했던 차별적인 시선과 실제의 사건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외국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서 인종차별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긴 개화기에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서양 사람을 보고 코쟁이라고 불렀던 것도 피부색과 겉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하는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권력과 힘을 갖고 있었던 서양 사람들 특히 백인에 대한 시선은 폄하하고 깍아내리려는 시도보다는 막연한 동경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보다 더 체구가 작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노동자로 유입되면서 어느 때는 백이보다도 더 흰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토종 한국인들이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동포에 대한 잠재적 적대감과 심지어 탈북자가 중국동포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까지 더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인종차별을 겪은 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차별을 일삼는 이들이 아무런 동기나 근거없이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해외여행을 하다가 버스를 탔는데 뒤에 앉은 현지의 십대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다가 갑자기 '너희 나라로 꺼져'라는 욕설과 함께 침을 뱉고 내려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일이 그냥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발생된다면 여행 자체를 망쳤다는 화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에 이르지 않을까? 


스카웃이 사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현명한 변호사로 마을 주민들의 투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스카웃은 오빠 젬 핀치와 미시시피주에서 방학때만 머물러 오는 딜이라는 친구와 셋이서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들 셋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 중의 하나는 스카웃이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은 부 래들리 아저씨에 대한 궁금증과 무서움을 시험해보는 장난이다. 소설 속에서 몇 번 언급되듯이 메이콤에 사는 스카웃의 이웃들의 거의 대부분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했으며 서로의 가족사를 낱낱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메이콤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아줌마들이 모여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를 여기저기에 알리고 덧붙여 부풀리니 그야말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스카웃 또래의 아이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부 래들리 아저씨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사건으로 인해 집에 감금되다시피 한 상황이 몹시도 궁금했고 과연 아서는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소설의 앞부분은 스카웃과 젬과 딜의 부 래들리 아저씨에게 접근하려는 여러 시도에 대한 모험담이 주를 이루며 흥미를 더해가는데, 곧이어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스카웃의 아빠 애티커스가 변호를 맡게 된 흑인 톰 로비슨의 사건으로 집중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변호사 애티커스는 판사의 부탁으로 톰의 변호를 맡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애티커스의 처신을 몹시 못마땅해한다. 톰은 유얼집안의 장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유죄판결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스카웃은 학교에서 너희 아빠는 검둥이 애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고, 애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앞으로는 더욱 상황이 난처해질 것임을 예고하며 절대로 톰의 변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린다. 


사실 이 부분에서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의 위대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자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유없는 모함을 당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의 위협을 가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톰을 변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양심의 소리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닥치게 되면 아무리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결국 불의에 무릎을 꿇게 된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동조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들 모두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가 자녀와 자기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거짓된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기로 한다면, 앞으로는 절대 스카웃과 젬 앞에서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런 위대한 선택으로 인해 스카웃과 젬의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게 된다. 비록 톰의 무죄를 증명할 애티커스의 노련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의 결정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되지만, 유얼은 흑인을 변호하며 모멸감을 준 애티커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할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의 정점은 10월 말의 할로윈을 맞아 진행된 마을 행사에서 스카웃이 햄으로 분장하여 등장하는 연극을 마치고 오빠 젬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다. 평소보다 더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반복되는 이상한 소리에 젬은 스카웃의 입을 다물게 하지만 햄 분장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스카웃은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해 이 거추장스러운 햄 옷을 벗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복수를 다짐했던 유얼이 젬과 스카웃을 공격하게 되고 스카웃이 앞을 볼 수 없어 듣기만 한 정황은 오빠가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이며 크게 다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까스로 위급한 상황이 정리되고 마을 보안관 헥 아저씨에게 발견되어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된 젬은 팔이 반대로 굽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스카웃은 이마에 혹이 나는 정도의 경상에 그쳐 행여나 오빠가 죽지 않았을까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보안관의 확인에 따르면 유얼은 옆구리가 칼에 찔러 나무 아래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고,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아마도 아들 젬이 그랬을 것이라 단정하며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아들의 죄를 덮을 수 없다며 보안관과 설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보안관 헥은 절대로 그럴리가 없으며 유얼은 넘어지면서 칼에 찔린 것이 확실하다며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그때서야 젬의 침대 옆에서 우둑하니 서 있던 한 남자가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는 젬과 스카웃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얼의 공격을 저지한 인물로 추정되었으며 그는 바로 은둔자였던 부 래들리였다. 스카웃은 거추장스러웠던 햄 복장을 벗어던지고 오빠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가 집에만 갇혀 있던 공포를 자아내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아서 아저씨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젬과 스카웃을 구하고 젬의 안위가 걱정되어 스카웃의 집까지 동행했던 아서 래들리는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주 오랜시간의 고립된 생활로 인해 타인과의 교류가 원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칩거한 상태에서도 젬과 스카웃을 위해 옹이구멍에 작은 선물을 놓아두는 선함을 보였기에 그에 대한 뜬소문은 거의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리고 스카웃은 오빠의 안정된 상태를 확인하고 아빠의 말을 따라 아서 아저씨의 손을 잡고 그를 데려다 주게 된다. 부 래들이의 현관 앞에 가는 것만으로도 벌벌 떨던 스카웃은 아서의 손을 잡고 그의 집에 도착해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게 된다. 작품 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카웃은 톰의 재판과 얽힌 사건의 시간을 지나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으로 갖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완전하 달라진 새로운 삶의 시각을 얻게 된다. 이제 스카웃은 부 래들리를 의심하고 무서워하던 이전의 스카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이 유년시절의 스카웃이 겪었던 일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깨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양심을 따르는 결정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서려오는 피해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다. 유얼이 상습적으로 딸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복지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여타의 사람들에게 당했던 무시와 모멸감에 대한 분노를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인 톰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비단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애티커스 변호사처럼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저열하고 비겁한 이들끼리의 담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퇴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은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 존 테일러 판사,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모디 앳킨슨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난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래서 때로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지....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207)"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213)"


"젬, 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마라. 세상만사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진 않단다. 난 다만 이 세상에는 우리를 대신해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을 뿐이야. 너희 아빠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이시거든.(397)"


#하퍼리 #앵무새죽이기 #ToKillaMockingbird #열린책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혜진 작가의 [오직 그녀의 것]을 읽었다. 서점을 갈 때마다 매순간 놀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이렇게 매일 신간이 쏟아져나오는 것인가이다. 아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은 반대로 늘어나는 것인지? 출판계가 호황이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책을 내서 때돈을 버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내게 맞는 책, 또는 내게 필요한 책을 선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예고편을 보고 어느 정도 감이 오면 좋을텐데 띠지에 씌인 문구나 미리보기 몇 페이지만 읽고 나서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그냥 무작정 책을 사들이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먼지만 쌓이게 한 책도 꽤나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홍석주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은 지금보다 몇 십년 전으로 석주가 대학을 다닐 때에 학생 운동이 정점이 아니지만 여전히 데모가 지속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 사용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전동타자기를 쓴다던지, 손으로 필사를 하는 장면들은 지금과는 사뭇다른 아날로그 시대의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저작권과 관련된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관습이나 도서정가제가 실행되지 않아 도매급으로 책이 팔리던 때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석주를 비롯한 출판계에 일생을 투신한 이들의 책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또 얼마나 다양한 신간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와의 만남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체감이 된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북토크가 열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작가의 이야기를 귀담에 듣는다. 소설 속에서도 석주의 회사 산티아고북스에서 발행한 여행 에세이의 북토크가 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석주는 그 여행 에세이가 별로 탐탁지 않았고 북토크에 참석한 독자가 친구의 죽음 이후 그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너무나도 사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의아함을 갖는다. 하지만 곧 석주는 책이란 저자의 생각과 경험만을 전하는 저자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몇몇 사람이 손을 들고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 감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책에 표정을 더하고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독자들의 내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완성되어가는 듯했다. 

행사가 끝났을 때 석주는 그 책 [내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 완전히 다른 책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거의 매일 독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지금껏 진지하게 독자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책이므로 성패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했는지도.(187)"


북토크에 몇번 참석해보고 나니 석주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단순히 나 혼자 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저자를 중심으로 편집자가 사회를 보거나 또 다른 작가가 사회를 보면서 그 책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감상이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도록 이끄는 분위기가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을 길게 만들어주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바랐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형 출판사의 교열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석주는 굉장히 소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보인다.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20대 초반의 새내기 직장인은 이미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였던 숙달된 상사의 지시와 호된 질책을 무던히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수용의 자세를 보여준다. 석주가 살았던 시대의 엄격한 상하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여타의 직장인들을 다룬 소설에서 반복된 상사에 대한 불만과 불합리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했던 피곤함에서 벗어나 성실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후배를 적정한 선에서 배려하고 가르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읽는 내내 마음이 밝아졌다. 


석주는 성실한 사수들을 만나 제대로 일을 배웠지만 갑작스러운 회사의 구조 조정에서 밀려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고 석주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산티아고북스에서의 일상이 시작된다. 편집부의 대리부터 시작하여 어느덧 은퇴를 앞둔 주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석주가 보여준 성실함과 인내는 책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읽고 또 읽고 수정할 부분을 엄선하고 개선될 방향을 모색하고 저자와 수없이 오갔을 연락과 어느 정도의 양보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을 타협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석주는 묵묵히 살아낸다. 사랑하는 원호와의 결혼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저자와 국가의 통제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석주와 원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발생된다. 


사실 석주가 맏딸로서 중식당을 운영하며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 자라 안정된 교사라는 직업을 기대했던 부모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과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찾아뵈었던 원호의 부모가 결혼하고 나면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원호의 뒷바라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낙담함을 느끼는 장면은 그녀가 결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석주는 다소곳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평범한 삶을 포기할 만큼 용감했다. 석주가 편집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원호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 수 있었던 것은 첫 직장에서부터 아주 오랜시간 한 글자 한 글자가 이어져 책 한권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귀중하게 여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석주의 변화와 단단함은 평범해서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깊이 있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석주의 하루는 이른 아침 원룸을 나서면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시작되었고 저녁 무렵 같은 풍경을 되짚어 오면서 끝이 났다. 멀리서 보면 단조로워서 똑같은 하루를 이어붙인 것 같은 나날,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리 새로웠다. 조마조마하고 필사적인 마음 사이로, 이상한 기대감과 설렘 사이로 속절없이 흩어지는 시간은 너무 빨라서 모두 기억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으나 석주를 그 일상의 진짜 주인으로 만들었다.(115)"


"어린 시절, 석주는 사랑을 정념, 충동, 정열과 같은 단어로 이해했다. 운명에 의해 선택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무엇. 다른 모든 것을 단번에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엇. 석주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은 극적이기보다 안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건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211)"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른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263-264)"


#김혜진 #오직그녀의것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철 대삼각형 오늘의 젊은 작가 51
이주혜 지음 / 민음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주혜 작가의 [여름철 대삼각형]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51번째 작품이다. 별자리에 별 관심이 없던터라 제목을 보고 내용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표지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밤하늘을 수놓은 밝기가 조금씩 다른 별이 점처럼 찍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소설의 첫머리에 오리온 자리에 대한 서양과 동양의 해석이 길잡이처럼 나왔음에도 '여름철 대삼각형'이 세 개의 빛나는 별에 대한 독특한 명칭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갑자기 '우주소년단'에 들어갔다. 그동안 별과 별의 마당인 우주에 관심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더 늦기 전에 뭔가 단복을 갖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표면적 이유였을테고, 초등학생 때 보이스카웃 활동에 돈이 많이 들어가 애초에 가입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뒤늦은 보상심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주소년단의 단복은 스카웃 단복처럼 그럴싸한 스카프와 베레모은 커녕 어디서 물을 들인건지 모를 시퍼러둥둥하니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회비를 지불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단복을 입고 남쪽의 먼 지역까지 캠프에 참가하여 처음보는 아이들과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했던 기억이 남았다. 지금도 앨범 어딘가에 우주 공간에서 조이스틱을 움직여 이동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빌을 타고 몹시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처음보는 이들과 순식간에 친해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성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국에서 지극히 촌스러운 단복을 입고 모인 이들과 친분을 쌓고 거대한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 별자리를 재미있게 논할 줄 알았다. 우주소년단 모임 때문에 별자리에 더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성인이 될때까지 반딧불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남쪽 나라의 휴양지에서 반딧불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고, 야트막한 배를 타고 현지 가이드의 후레쉬 불빛에 반응하는 엄청난 무리의 반딧불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때 가이드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반딧불에게 후레쉬 불빛을 비추는 것이 그들의 개체수를 줄이기 때문에 얼마 안가 반딧불 투어를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어떨까? 그런데 최근에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반딧불 투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한 해의 어느 짧은 계절에만 볼 수 있는 반딧불을 구경하기 위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스마트폰 불빛과 어린 아이들의 반짝이는 신발 불빛까지 차단한 채 앞사람과 여러번 박치기할 뻔 하며 1시간 넘게 어둠의 곶자왈을 걸었다. 띄엄띄엄 눈 앞을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아니 그 옛날 선비들은 반딧불로 글공부를 했다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반딧부를 잡은 것인가, 그때 반딧불은 지금보다 더 크고 밝았던 것인가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히며 어서 이 코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꽤나 많이 걸어서인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가 대절되어 있었는데, 차에 오르니 근래에 빅히트를 친 '나는 반딧불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짧은 생을 살다가는 자연의 반딧불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돈벌이가 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반딧불 투어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어린이들이 무척 많았기에 요즘 저출생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엄마, 아빠, 조부모의 손을 잡고 아마도 처음 마주할 반딧불을 볼 생각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소설 속 중년의 세 여성과 우주와 시오가 무주의 반디별 소풍 프로그램에 참석해 다른 이들이 대부분 가족 단위로 참석했다는 것을 의식했던 것처럼, 제주의 반딧불 투어 또한 유사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 태지혜, 송기주, 반지영은 비슷한 또래의 중년 여성이다. 태지혜가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손을 털듯 쉽게 이혼했다면, 송기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의 손에 자라 사랑인지도 모른 채 남편의 고백과 직진에 결혼하여 태어난 딸 시오에게 전심전력을 다하지만 점점 손에서 멀어지는 관계를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상태라면, 반지영은 오십대의 엄마를 지난한 암투병으로 떠나보내고 재벌집 사모의 운전기사로 살며 친자식보다 사모 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그려진다. 


그리고 태지혜에게는 이혼하고 7년이 지난 후 시누이의 딸 우주가 고등학생의 몸으로 갑작스럽게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아이를 지우고 검정고시를 봐 대학에 갈때까지 함께 살게 해달라는 어이없는 부탁을 받게 된다. 송기주는 딸바보인 남편 지철과 다르게 시오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시오는 점점 더 멀어지며 급기야 독립을 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을 들어간다. 시오의 서운한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만 당장이라도 시오의 원룸에 가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반찬을 한가득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며 '너 노예냐'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던진다. 반지영은 엄마의 바람대로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지만 영어 수행능력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수호의 엄마가 학교에 이의제기를 하며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지영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은 수호 엄마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인해 느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수호의 성정체성을 드러나게 만든 자신의 무심경함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이 중년 여성에게는 공통된 삶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바로 반복되는 악몽을 꾼다는 것이다. 


태지혜와 우주, 송기주와 시오, 반지영과 수호가 가족과 직장이라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나이와 무관한 깊은 연관을 맺게 되면서 세 명의 여성이 밤마다 시달리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미 어그러져 버린 다음 세대와의 연결을 회복하는 길 뿐임을 무주 여행을 통해서 드러난다. 여름철 대삼각형 별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망원경으로 별을 구경하는 여정을 통해 나이를 잊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시시덕대는 엄마 세대의 모습을 보고 서운한 마음을 소거하는 시오의 모노레일을 탄 산 중턱의 산행과 기꺼이 용기를 내어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게를 넘는 동굴을 통과하는 우주의 새벽 산책은 누구나 반짝이는 별처럼 빛을 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요히 인정하게 만든다. 당신이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그 사람이 가만히 희붐한 빛을 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기를...


"잠은 잠깐의 죽음과 다름없는데 꿈이 있어 우리가 그 죽음의 허방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삶 쪽으로 건너오는 거라고. 

악몽이라도? 

악몽이라도.

그럼 악몽은 조약돌이면서 닻이기도 하네?

고통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조약돌. 삶에 드리운 닻.(120-121)"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삶이란 이토록 예측 불가능하면서 동시에 유한하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201)"


#이주혜 #여름철대삼각형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