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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었다. 밀레니엄을 지나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난 제니가 회고하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아주 오래전 고1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친구 S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국영수 과목을 잘해야했다. 배점이 워낙에 높은데다가 단시간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등급을 매기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과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1때 만난 그 친구는 꽤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당시에 주변의 모든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유일하게 사복인 학교였기에) 입성이 좋았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메이커가 눈에 띄는 상하의를 반듯하게 다려입고 체격도 건장하고 비교적 핸섬한 편이라 여러모로 주목을 받곤 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방과후 자율학습 시간에 원하는 등수가 잘 나오지 않아 내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부러울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도 지금의 성적으로는 인서울 대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는지, 어느날 미국에 유학을 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넌지시 내게 건넸다. 나는 '설마, 말도 안되' 라는 심정으로 '얘가 성적이 드럽게 안 오르니까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라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헛된 꿈꾸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좀 더 나은 성적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몇 달 후에 S가 진지하게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1학기를 마치고 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심각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울쩍해졌지만 미국 유학의 꿈에 부푼 친구 앞에서 그런 서운함과 아쉬움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S는 더 이상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았고 몇 달 동안이었지만 짬짬이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가까워진 S와의 공유된 마음이 휑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지나고 S는 정말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S는 한국과 비슷한 미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간 후 정성스럽게 공들인 몇 장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편지의 내용은 미국에서는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헬로나 굿모닝 같은 인사를 하지 않고, "Hey, What's up?"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건넨다는 인사말에 대한 설명이었다. '짜식 잘난 척하기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놈이'라는 혼자만의 코웃음을 치며 나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S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국제 우편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알렸지만, 매번 새로운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을 전하는 S와는 달리 나는 너무나도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해줄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없어서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점점 빠듯해지는 학업 일정이라는 표면적인 핑계들로 연락이 끊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제니는 내 친구 S보다 10년이나 늦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도 칭챙총이라는 대명사로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난무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보니, S도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영어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잘 견뎌낸 것일까, 혹시나 제니와 한나처럼 기막힌 푸대접의 억겹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제니가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반추하는 회고록의 형태를 띤 성장소설이지만, 십대 소녀들의 친구를 사귀고 무시당하지 않고 주류가 되고자 하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의 풋풋한 이야기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제니와 한나가 만난 미국의 백인 주류의 학생들이 보여준 역겨운 행태들은 인간 본성의 추악한 면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약한 자를 따돌리며 비열한 만족감을 얻는데 집중하는가? 사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모국어가 달라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고 피부색 또한 달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배려가 원만히 형성되지 않는 나이 때의 학생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차별과 배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배경으로만 생겨나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똑같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같은 말을 하고 경제적 상황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든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종교의 신심활동 단체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들고 나면 대놓고 따돌리며 무시하지는 않고 때론 다행스럽게도 좀 더 성숙한 누군가가 배제된 이를 감싸며 공동체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나의 유약함을 제니가 비난과 질책의 억척스러움으로 극복해나가는 이민자들의 연대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제니의 한나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로 이어지는 반성의 회고록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주류에서 벗어나 밑바닥을 치며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가장 적대시하며 모멸감을 준 이들과 동일한 모습으로의 변화를 시도하는 비겁함을 지적한다. 제니는 한나의 무능력함을 한탄하고 무시하면서도 한나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니는 한나를 괴롭히던 새라와 노라와 같은 학교의 주류를 이루는 친구들의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제니는 한나를 보호하며 마음으로부터 친구가 되고, 좋은 집안의 자녀로 풍족하게 자란 제니의 선망이 된 아이들은 폐쇄된 캠핑장에서 마약과 성행위를 즐기는 그들만의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니는 생일을 맞이하여 한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가 영원히 후회로 남게 될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제니와 한나가 미국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당한 따돌림과 폭력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자신의 경험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제니와 한나의 미국 학교 적응기를 읽으며 이건 누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상으로서는 감히 그려볼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거나 도와줄 이가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가장 큰 상처와 모멸감을 끊임없이 던진다면 과연 그 지옥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학교 폭력과 따돌림이 너무나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라 그렇게 큰 상처로 아파하는 모든 아이들을 위힌 기도가 절실해진다.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꼭 다른 일들이 일어난대. 되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다 이유가 있고, 그게 또 다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
부스러기라는 게 그냥 영향을 뜻하는 거야?
응, 근데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거.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거.
아까 비가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비에 다 젖었지? 그건 잘 보이잖아. 딱 봐도 비를 맞아서 젖은 거라고 설명이 되잖아.
근데 만약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떤 사람이 쓸려가 죽었어. 그 사람의 연인은 그때 큰 충격을 받아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비가 오며 슬퍼져. 심지어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는데도. 그러면 그 사람이 슬픈 건 비가 많이 온 어떤 날의 부스러기가 되는 거야.(154-155)"
"한나는 언젠가 먼 미래의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내가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일 것이다. 그 애는 그때쯤 나를 갖추는 여러 부분의 기원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제삼의 눈일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제야 사람들이 어떻게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수없이 쌓인 슬픔의 부스러기 위에서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이 미래의 문을 연다.(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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