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기호 작가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읽었다. 그동안 어째서 저자의 책을 한 권도 만나지 못했던 것인지 한탄이 느껴질 정도로 이번 소설은 너무나도 좋았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까울 정도로, 아니 작가님 이렇게 재미있게 써도 되는 겁니까? 라는 응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좋았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표지에 실제로 저자가 키우고 있는 반려견 이시봉을 형상화한 그림까지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귀여운 비숑 프리제의 모습처럼 개웃기는 등장인물들이 나와 갑작스레 혼자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이름에 봉자가 들어가면 이상하게 재미없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도 그랬고, 지금은 대세 배우가 된 노안의 대명사 현봉식(본명이 보람이라는) 배우님도 그렇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 이시봉에 얽힌 이야기는 웃음과 슬픔과 약간의 추리와 스릴러가 버무려져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순삭하는 기분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인스타그램 DM으로 강아지 이시봉을 확인하는 앙시앙 하우스와 리다의 대화로 시작된다. 여기서 '리다'라는 이름은 이시봉의 견주 이시습이 짝사랑하는 열 살 많은 동네 누나 권하영의 반려견 이름으로 자그마치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사연도 뉘늦게 알려준다. 


아무튼 주인공은 말못하는 강아지 이시봉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화자는 이시봉의 견주인 이시습이다. 시습은 스물 살의 백수 청년으로 새벽녘에 시봉이를 데리고 아파트 뒷산을 산책하며 산중턱에서 술을 마시고 내려오는 일상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무력하게 지내는 대책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습은 학교도 중퇴하고 왜 이렇게 지내는 것일까? 시습의 여동생 시현은 정반대로 너무나도 야물딱지게 나오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시습의 엄마는 아들이 이렇게 지내는 것에 왜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시습의 아버지가 잘 다니던 타이어 공장을 갑자기 그만두고 피자집을 차려 열심히 일을 하다가 너무나도 어이없게도 무단횡단을 하다 트럭에 치여 죽게 된 연유가 나오면서 조금씩 이해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피자집의 문을 열고 나와 무단횡단을 하게 된 이유가 시봉이가 갑자기 뛰쳐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시습은 엄마에게서 시봉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방에만 머물게 한다. 


앙시앙 하우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헤맨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가 바로 시봉이인 것 같다고 리다에게 연락한 것이고, 리다는 그 사실을 시습에게 알려 앙시앙 하우스의 브리더들이 시봉이를 만나러 광주로 내려온다. 이후 시습은 시봉의 혈통이 프랑스의 왕실에서 키우던 후에스카르라는 고귀한 피를 받은 귀한 품종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시습은 시봉과 함께 서울과 용인의 앙시앙 하우스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시봉이를 애타게 찾던 앙시앙 하우스의 주인 정채민을 만나게 된다. 정채민은 시습에게 그가 시봉을 찾게 된 연유를 설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박유정과 김상우라는 부부와의 인연을 전해주는데 소설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박유정의 유언과는 상반되는 진술이 있었고 그것이 어찌보면 결말에 이르는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주는 기발한 구성은 시습과 그의 친구들 헬스 중독자 정용과 개빡치네를 연발하는 편의점 알바생 수아와의 친밀한 우정이 따스함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극도의 이기주의자인 정채민의 부와 권력이 가짜로 만들어낸 시봉의 혈통에 대한 역사가 얽혀 뒤로 갈수록 긴장감을 드높이게 된다. 특히나 정채민이 들려주는 시봉과 스페인 왕가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의 역사적 인물인 고도이 총리와 고야의 알바 공작부인 그림에 나온 비숑 프리제에 가공할 사연이 덧붙여져 진짜로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든다.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피에르 피졸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빛과 그림자]라는 가상의 책에 나온 이야기는 스페인 왕가의 사냥 밖에 모르는 무능력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수려한 외모의 왕실 근위대 마누엘 고도이에 빠져버린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등장한다. 왕비는 고도이에게 빠져 그가 총리가 되기까지 뒷배가 되어주지만 고도이는 유럽 전역에 엄청난 미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알바 공작부인을 흠모하게 된다. 당대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구애가 불가능했던 고도이는 알바 공작부인에게 베로와 누녜스라는 비숑 프리제 한 쌍을 선물로 보낸다. 고도이가 마지막까지 베로의 집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훗날까지 이어질 후에스카르 혈통을 지켜낸 것이 스페인 왕가의 몰락과 나폴레옹의 점령사까지 이어지며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렇듯 앙시앙 하우스의 주인 정채민 대표는 시습에게 시봉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피력하며 박유정과 김상우에게 속아 시봉의 어미에 해당되는 카이와 루시를 빼앗긴 거짓된 사연을 들려준다. 정채민이 들려준 안타까운 사연의 진위여부를 떠나 시습은 시봉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밀려오게 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봉이를 데리고 왔다는 전북 무안의 개농장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시봉이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피자집을 시작하기 전까지 몸담았던 타이어 공장의 동료직원이었던 이시봉 아저씨의 연락처를 발견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듣게 된다. 시습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타이어 공장은 회사 운영에 관심없던 오너 2세가 함께 유학했던 홍콩의 사모펀드 운영자와 손을 잡고 이익을 취하는 수순에서 애먼 노동자들만 거리에 나앉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펼쳐진다. 당연히 타이어 공장의 노조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경영진의 계약을 저지하기 위해 파업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불의함을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건 손해배상 청구와 더불어 노조지도부의 구속과도 같은 엄벌이었다. 


시습의 아버지는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은 돈으로 집을 마련하고 피자집을 개업하게 된다. 시습의 아버지를 대신해 노조의 홍보부장을 맡게 된 이시봉 아저씨는 회사 본사에서 이루어지는 계약 순간을 급습하게 되고 수많은 이들의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폴로 경기를 흉내내는 오너 2세와 홍콩 사업자의 모습을 보고 그만 꼭지가 돌아 폭력을 휘둘러 구속되게 된다. 이시봉 아저씨는 감옥에서 우연히 강아지 시봉의 어미와 가족들을 키웠던 박유정의 아들 김태형을 만나게 되고, 태형의 부탁으로 개농장에 판 시봉의 어미로부터 갓 태어난 시봉을 데려갈 것을 시습의 아버지에게 부탁한 사실을 시습에게 알려준다. 


후반부에 이르러 암에 걸린 외할머니를 돌보고 위해 가평에서 머물던 엄마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고 시습은 두려운 마음으로 한 달음에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엄마를 도와 할머니를 간병하는 사이 시봉이를 맡겼던 리다가 앙시앙 하우스에 연락해 그들이 제시한 돈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을 제시하여 시봉이를 건네고 만다. 집으로 돌아온 시습은 리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시봉을 찾기 위해 수아와 정용과 태형과 함께 앙시앙 하우스로 처들어간다. 시습과 일행을 저지하던 브리더들은 태형 자신이 박유정의 아들이라는 외침으로 인해 용인의 또 다른 앙시앙 하우스에서 있는 정채민 대표에게 데려간다. 소설 속에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태형이 박유정과 김상우 부부의 아들이 아니라 어쩌면 아마도 정채민과 박유정의 불장난 같은 사랑의 소실이 아닐까란 확신은 정채민이 진짜로 찾는 것은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인 시봉이가 아니라 시봉이와 같은 혈통의 강아지를 키우던 박유정이었음을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라며 시습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시봉을 돌려주려 하지 않는 정채민과 그의 직원들의 태도에 화가 난 시습과 그의 친구들과 태형은 시습이 들었던 정채민의 사연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담긴 박유정의 여동생이 들은 유언을 밝힌다. 태형은 애초에 후에스카르라는 왕가 혈통을 가진 비숑 프리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채민의 실체를 밝히려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다 확인한 바라는 말로 반박하지만 정채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습의 무리를 내쫓는다. 쫓겨난 시습과 친구들은 돌아가려다 말고 다시금 시봉이를 돌려달라고 따지려는 찰나 아마도 정채민과 상속 관련하여 갈등을 빚던 호텔을 운영하던 불같이 화가 난 사촌 동생의 등장을 마주하게 된다. 앙시앙 하우스와 시습 무리의 대결로 치닿던 긴장감은 갑작스레 등장한 호텔 오너와 쉐프들이 조장한 시한 폭탄과도 같은 상황으로 절정에 달하고 도망가던 정채민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어이없게도 정채민 대표의 사고로 시습은 시봉을 데려갈 수 있게 되고 사고가 나기 전에 시봉을 내던지 일로 인해 시봉은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봉이 시습을 긴급하게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과정에서 수의사가 하는 말에 소리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물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서 말이 입원이지 보관이랑 뭐가 다르냐는 수의사의 표현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건이 일단락 되고 경찰 조사를 마친 시습은 다시 시봉과 산책할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짝사랑하던 리다 누나의 잠적을 걱정하게 된다. 수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나이에도 아버지에게 맞고 지낸다는 리다 누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염려하던 차에 시봉이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형집행인에게 고문을 받아 죽어가던 길고양이를 살린 릴스의 후속편이 올라오게 된다. 과연 변태같은 고양이 학대자 형집행은 누구인가 따라가던 화면은 정말 어이없게도 집에서 샤워중인 리다의 아버지의 허물처럼 벗어진 옷차림에 집중된다. 시습은 딸이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 고양이를 학대하며 집을 나가면 남겨진 반려견 리다를 고양이처럼 학대할 것이라 겁을 준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DM으로 받게 된다. 떠나버린 짝사랑 리나 누나를 응원하며 시습은 다시 시봉과의 재활 산책을 준비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술을 마시며 방황하던 시기를 마감하고 검정 고시를 볼 것을 다짐한다. 시습은 아버지가 남긴 시봉과 더불어 성장하고 슬픔을 이겨낸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자신을 찾아왔고, 그렇게 이시봉을 만나게 되었다고.(123)"


"박유정이 생각하는 인색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오직 하나뿐인 것이었다. 종교인이 종교만 생각하고,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고,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만 생각하는 것. 그 외는 아무것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338-339)"


시습은 시봉이를 키우면서 시봉이의 순진무구함이 무섭다고 말한다. 새끼부터 키워온 시습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으면서도 좀 더 좋은 간식을 주는 앙시앙 하우스의 사람들에 품에 폭 안긴 시봉은 처절한 배신감을 주기에 충분한 처신을 행하지만, 그건 그냥 동물의 순수한 본능일 뿐이다. 인간과 동물이 유사한 생물학적 기능을 유지하며 살아가지만 시습은 시봉이의 맹목적인 순수함과 열정이 때로는 인간의 인색함과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 사람이 시봉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함으로 모든 것을 추구하다보면 오로지 자기 마음이 결정한 것만 생각하고 염려하는 아주 인색함 사람이 될테니까 말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정채민 대표처럼...


#이기호 #명랑한이시봉의짧고투쟁없는삶 #우리집막내이시봉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 일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사이 꼭꼭 숨은 내 자리 찾기
하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현 작가의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를 읽었다. 부제는 "일하는 나와 글쓰는 나 사이 꼭꼭 숨은 내 자리 찾기"이다. 몇년 전 띵 시리즈 중에 아이스크림을 주제로 한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를 읽고 나서 당시 레어템이었던 아이스팜 자두바를 찾아 맛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아이스크림에 대해 잘 아는 것일까 신기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오랜 시간 일해온 마트에서의 경력이 아마도 좋아하는 것을 더 잘 알게 된 배경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무려 14년 동안 마트에서 일하며 7권의 책을 출간하기까지의 개인적 역사를 우리 사회에 팽배한 노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솔직담백하게 전하며, 저자가 함께 일했던 언니의 말처럼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전통시장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의 대부분 지역은 현대화된 대형마트에 점점 잠식되어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형마트에 주차를 하고 카트를 끌고 거대한 책장같은 진열대에서 하나씩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마쳐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와 수납함에 생필품을 정리하는 것이 어느덧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요즘은 거의 모든 식료품의 당일배송이 가능해져서 장을 보러 갈 시간조차 없는 이들은 마트에도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캐셔분들은 워낙에 손이 빨라 긴 결제대기줄이 생겨도 금방금방 일을 마무리 하지만(아마도 이건 본성이라기 보다는 빨리빨리 문화와 컴플레인으로 인해 지적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않을까 싶지만), 유럽에서 지낼 때 마트를 가면 참을 인자를 이마에 새기며 심호흡을 해야만 할 때가 비일비재였다. 개네들은 대체 왜 그렇게 여유롭고 설렁설렁 일을 하는 것일까? 내돈내산인데도 행여나 캐셔가 갑자기 결제창구를 닫고 길게 늘어선 옆 줄로 가라고 할까봐 노심초사할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루는 20유로도 안되는 양의 장을 보고 나서 잔돈이 없어서 아무 생각없이 500유로 짜리 지폐를 낸 적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작은 단위로 바꾸기가 용이하지 않아 마트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안이한 생각이 불러온 파장은 결제를 위해 길게 늘어선 현지 주민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캐셔는 무려 480유로의 거스름돈을 한 장 한 장 보란듯이 소리를 내며 계산대 위에서 세며 '숫자가 맞는지 잘 보라고' 라는 뜻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개진 나는 불현듯 내 뒤에 서 있는 현지인들의 신기한 눈빛의 부담과 두려움을 느끼며 후다닥 봉지를 들고 숙소로 내달렸었다. 지금이야 그런 어리버리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우스개소리의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마트에서 장을 볼때마져 긴장했었던 때가 아련하게 떠오르며 우리나라 마트의 친절과 편리함에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된다. 


예전에 염정아 배우가 주연한 영화 '카트'에서 마트 직원들이 처한 부당한 대우를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실제로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분들은 대부분 중년 여성이다. 판촉을 위한 행사 인력으로 나온 경우는 제외하고는 젊은 여성을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듯이 망하면 남자는 공사장, 여자는 마트라는 공식이 생겨난 이유는 노동 시장에서 공사장과 마트는 별다른 자격 없이도 생계를 위해 뛰어들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일자리라는 생각이 팽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세상 어떤 일도 처음부터 쉬운 일은 없어서 나름의 노하우를 체득하기까지 몸과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은 결국 경험해봐야 아는 것일까? 


어쩌면 저자와 엄마가 공통적으로 마트에서 일하며 삼게 된 가장 큰 화두인 드라마의 단골 대사 중의 하나인 "당신이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해?" 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마트 노동자들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근무한 중년 여성보다 신입에 불과한 저자의 수당이 더 높다는 것 또한 마트에서 노동력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기이한 구조로 편성되었는지 또한 단편적으로 엿 볼 수 있다. 이런 저런 부당함이나 미래에 대한 특별한 비전이 없음에도 저자가 오랜 시간 마트에서의 일을 놓치 못한 것은 오로지 글을 쓸 수 있는 생활 반경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직장을 구해 영혼을 갈아넣을 정도로 주어진 일에 전력을 다하다 보면 어느샌가 책을 읽고 글을 쓸 여력이 1도 남아 있지 않는 일상이 반복된다. 저자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과 현실에 안주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을 때 대부분은 그나마 안정된 길을 선택하게 된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나면 지금 안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길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주위의 사람들이 헛물켜지 말고 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성화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을 놔버리게 된다. 저자 또한 마트에서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여기 있지 말고 나가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으라는 조언과 엄마 또한 언제까지 마트에서 일 할 것이냐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 위한 용감한 결단은 지속되고 이렇게 마트에서 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들 수 있는 에세이가 완성되었음에 박수를 보내며, 마트를 그만 두 저자가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지 기대가 된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일하는 내내 그게 궁금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마트 밖의 내가 진짜라고, 마트에서의 나는 연기를 통해 만들어낸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의 거짓말이 모여 내가 되고 있었다. 그 속도는 아주 느리지만 동시에 아주 빠르기도 해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182)"


"은행과 식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학교와 주유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제 그 질문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크고 중요한 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시선이라고. 은행에도 학교에도 진상은 존재하지만 그곳의 무례함이 이곳의 무례함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마주치는 무례함의 기저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이런 일이나 하는 주제에 감히 네가?' 아무리 꼭꼭 숨겨도 예상치 못한 순간 아주 작은 틈을 통해 툭 삐져나오는 그 마음을 나는 귀신같이 포착하곤 했다.(207)"


#하현 #어쩌다마트일을시작하게됐어요? #위즈덤하우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꽤 낙천적인 아이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소윤 작가의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50번째 작품이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경계를 너무나도 쉽게 넘어서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너무나도 재미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런 형식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누구일지 궁금해지고 저자의 현재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책머리의 소개에는 순간 헉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스탠드업 코미디가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공연장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고학력 개그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의 작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전적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주인공 원소윤의 삶은 나이와 시대를 떠나 우리 삶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희극과 비극의 순간들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와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저자의 이름과 같고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내용도 동일하기에 작가의 실제적 경험담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소설의 시작은 유서깊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려져 앞으로 펼쳐질 내용 또한 종교와 관련된 일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윤의 할아버지가 치릴로, 할머니가 소피아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로무알도와 로무알다라는 세례명을 갖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비극을 견디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고통을 뜻하는 참척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참혹하고 슬픈 감정을 애둘러 표현한 이 한자말을 접하고 나서는 부모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따로 표현하는 말이 생겨났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어린 자식을 병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어린 아기의 무덤을 부모가 알지 못하게 봉분도 만들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은 누구나 오가며 밟을 수 있도록 봉분 없이 묻는 풍습이 있었다. 천하의 불효자식이니 단죄해야 한다는 발상에 근거하여. ~~ 친척 어른들은 아기의 묫자리를 부모가 알아선 안 된다며 두 사람이 장지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없었던 일로 치고 빨리 잊으라고, 매일 찾아가서 울고불고하지 말라고. 천하의 바보들, 봉분 좀 안 쌓는다고 그게 없었던 일이 되겠나. 하여튼 그때나 지금이나 잊고 말고에 대해 오지랖 떠는 인간들만큼 한심한 부류도 또 없다.(100)"


소윤은 아기가 떠난 시점이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에 오빠의 부재로 인한 기나긴 공허함을 알 수 없을 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견뎌냈을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상상과 공감으로 진득하게 마주한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기함을 금치 못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채널을 돌리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금방 잊게 된다. 때로는 그런 비극이 행여나 자신에게도 전염될까 싶어 후다닥 도망가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참으로 어이없게도 너무나도 갑자기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생겨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급체해서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듯이 울분을 터트린다. 신파의 클리세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라는 자아성찰과 고백이 이어진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간절한 기도를 바치게 되고, 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만일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선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하고 견디는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아 이게 삶의 우연성이구나" 언제가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서 자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에게 이런 독설을 날리는 내용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당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죠?" 처음 그 말을 읽었을 때에는 아니 대체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을까 불같이 화가 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독설의 말을 들은 여인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마음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의 순간들은 예기치 못하게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위로를 해왔던 시간들을 단숨에 돌아볼 수 있도록 우연히 극도의 고통이 벌어진다. 


소윤은 제목의 [꽤 낙천적인 아이]처럼 고시원에서의 삶도, 재계약이 어어지지 않아 퇴사하는 일도, 갑작스러운 엄마의 낙상 사고로 간병을 하는 시간도 기꺼이 마주하며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인다. 억겹의 슬픔이 다가오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치릴로, 소피아, 로무알도, 로무알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기쁨을 기쁨으로 누린다. 각박해진다는 말은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다는 것으로 다가온다. 감정의 동물이 몸과 마음으로 발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며 시시껄렁한 개그를 던지고 무안해지는 공격을 받더라도 피식 웃게 되는 일을 선택한 것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꽤 낙천적이지 않고서는 참 살기 힘든 세상이기에 말이다. 


"서툰 농담으로 주변을 썰렁하게 하던 코미디언이 한 사람 앞에 진담 같은 농담을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을 이 소설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장이라면 가족의 슬픔, 운명의 횡포, 세상사의 표리부동, 서늘한 이별의 예감 속에서 비극을 증류해 희극을 얻고 희극을 제련해 유머를 빚는 과정은 이 소설의 내핵에 숨겨진 성장이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다. 성장하되 끝내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백미가 있다. 함부로 성숙해지거나 자칫 철들지 않는 '나'는 한 손에 농담을, 한 손에 허구를 들고 세상을 향한 담대한 긁기를 시전한다. 두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의 보폭처럼 씩씩한 속도로 스탠드업 코미디 서사의 빅뱅을 시작한다.- 박혜진 평론가 해설 중(267-268)"


#원소윤 ##꽤낙천적인아이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토너 (리커버 특별판)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다. 작품이 발표된지 50년이 지나서야 주목받기 시작했기에 아마도 저자는 생전에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이 표명하는 주제이기도 한 남들이 생각하는 소설가로서의 성공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자가 영문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며,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처럼 만족스러운 평범한 삶을 살아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저자의 자전적 소설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기존의 소설과는 색다른 감동에 다다르게 된다. 스토너는 뭔가 우유부단하고 야망이 없어 주어진 운명에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표면적인 것들을 중시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스토너란 소설 속 인물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더 없이 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그가 평생을 학생과 교수로 보내게 될 미주리 대학이 있는 컬럼비아에서 40마일 떨어진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한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가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에 윌리엄 또한 아버지를 도와 농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업대학을 진학해 살림이 보탬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가 영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존의 흐름대로라면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윌리엄에게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그따위 쓸데없는 문학을 공부해서 뭐하냐고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윌리엄의 진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윌리엄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학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간은 괴짜나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 아처 슬론 교수였다. 아처 슬론 교수는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윌리엄의 내면에 숨겨진 교육자로서의 적당한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이다. 


윌리엄이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으며 강사로서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윌리엄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군입대를 앞두게 된다. 소설에 나온 배경으로 보아 강제징집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하여 미국의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면 귀환 후에 받게 될 보상이나 명예가 꽤나 드높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반대로 입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별다른 신상의 변화는 없을지 모르지만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윌리엄과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박사 과정을 밟던 두 명의 친구인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는 마땅하다는 듯이 입대를 결정하고 윌리엄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슬론 교수와의 면담과 친구들의 종용에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고든이 윌리엄의 선택을 비아냥거리는 거리고 전사한 데이비드와는 는 달리 살아돌아와 점차 학교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지만 윌리엄은 그런 말과 변화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꼽는다면 당연히 이디스와의 결혼과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외도, 그리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 그의 지도교수인 로맥스와의 끝이없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너에게 있어서 아내 이디스와 동료교수 로맥스는 마치 그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희대의 빌런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스토너는 이디스와 일찌감치 이혼을 했을 것이고, 고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과장이 되어 로맥스가 스토너에게 했던 것처럼 괴상한 시간표를 수행하도록 괴롭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캐서린과의 운명같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 아내 이디스가 알게 되어 아무렇지 않은 듯 비난하는 소리를 감내하거나 학교에서 소문이 나 평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캐서린과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캐서린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스토너의 모습은 자기가 손에 쥔 것을 결코 놓을 수 없는 비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 스토너의 결단은 지옥과도 같은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에 다시 자신을 내던져 캐서린이 다른 곳에서 그녀의 노력과 성과에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열어주는 가슴아린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주인공 스토너의 말년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의 만남은 조금은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 후반에 긴장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파생될 수많은 갈등과 논쟁의 시간의 서막을 열게 된다. 사실 찰스 워커와 로맥스 교수의 얼토당토하지 않는 주장과 행태를 지켜보면 누구라도 스토너를 대신해서 화를 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로맥스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워커 군을 그렇게 감싸고 도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권한을 갖게 된 이가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작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대를 거부한 윌리엄에게 비아냥거리던 고든이 같은 교수 생활을 하며 학장으로서의 중립과 스토너가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스토너는 로맥스의 불의한 결정과 행동에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아주 오랜시간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것처럼 아내 이디스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그로 인해 자신과 멀어지게 된 딸 그레이스에 대한 그리움을 견뎌낸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스토너가 더 이상 로맥스의 폭정과도 같은 시간표 배정에 항거라도 하듯이 보란듯이 고학년의 주제들을 신입생들에게 다루며 로맥스와의 갈등은 절정에 달하지만, 종신교수로서의 수업 주제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스토너는 작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스토너의 정년퇴직 문제로 다시 한 번 로맥스의 비열함과 부딪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토너의 건강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대한 종양을 제거받는 수술까지 받게 된다. 스토너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디스의 반응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마치 스토너가 캐서린을 만나는 것을 알게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를 마치 남일 대하듯이 하는 디아스의 정신상태를 견딘 스토너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번역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겉으로 봤을 때 스토너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애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든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이나 충분히 학과장을 할 수 있었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학생과의 논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종국에는 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노교수의 슬픈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스토너를 밖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스토너 자신에게는 이디스와 삶을 견뎌내는 것 그리고 딸 그레이스가 알콜중독자가 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 그리고 로맥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오랜 시간 신입생들에게 간단한 개론 과목만 강의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살아내며 어느 순간 진정한 교육자와 남편과 아버지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교정의 빛을 그리워하며 충만해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토너의 삶은 진실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폭풍같은 일들을 항구하게 견뎌낸 방파제처럼 묵묵히 자신이 삶을 걸어간 스토너 교수를 생각하며 우리 시대의 정말 필요한 귀한 얼굴이지 않을까 싶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276)"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대한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398-399)"


#존윌리엄스 #스토너 #김승욱역 #본투리드에디션 #알에이치코리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었다. 밀레니엄을 지나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난 제니가 회고하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아주 오래전 고1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친구 S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국영수 과목을 잘해야했다. 배점이 워낙에 높은데다가 단시간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등급을 매기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과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1때 만난 그 친구는 꽤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당시에 주변의 모든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유일하게 사복인 학교였기에) 입성이 좋았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메이커가 눈에 띄는 상하의를 반듯하게 다려입고 체격도 건장하고 비교적 핸섬한 편이라 여러모로 주목을 받곤 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방과후 자율학습 시간에 원하는 등수가 잘 나오지 않아 내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부러울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도 지금의 성적으로는 인서울 대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는지, 어느날 미국에 유학을 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넌지시 내게 건넸다. 나는 '설마, 말도 안되' 라는 심정으로 '얘가 성적이 드럽게 안 오르니까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라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헛된 꿈꾸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좀 더 나은 성적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몇 달 후에 S가 진지하게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1학기를 마치고 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심각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울쩍해졌지만 미국 유학의 꿈에 부푼 친구 앞에서 그런 서운함과 아쉬움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S는 더 이상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았고 몇 달 동안이었지만 짬짬이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가까워진 S와의 공유된 마음이 휑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지나고 S는 정말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S는 한국과 비슷한 미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간 후 정성스럽게 공들인 몇 장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편지의 내용은 미국에서는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헬로나 굿모닝 같은 인사를 하지 않고, "Hey, What's up?"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건넨다는 인사말에 대한 설명이었다. '짜식 잘난 척하기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놈이'라는 혼자만의 코웃음을 치며 나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S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국제 우편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알렸지만, 매번 새로운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을 전하는 S와는 달리 나는 너무나도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해줄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없어서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점점 빠듯해지는 학업 일정이라는 표면적인 핑계들로 연락이 끊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제니는 내 친구 S보다 10년이나 늦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도 칭챙총이라는 대명사로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난무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보니, S도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영어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잘 견뎌낸 것일까, 혹시나 제니와 한나처럼 기막힌 푸대접의 억겹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제니가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반추하는 회고록의 형태를 띤 성장소설이지만, 십대 소녀들의 친구를 사귀고 무시당하지 않고 주류가 되고자 하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의 풋풋한 이야기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제니와 한나가 만난 미국의 백인 주류의 학생들이 보여준 역겨운 행태들은 인간 본성의 추악한 면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약한 자를 따돌리며 비열한 만족감을 얻는데 집중하는가? 사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모국어가 달라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고 피부색 또한 달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배려가 원만히 형성되지 않는 나이 때의 학생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차별과 배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배경으로만 생겨나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똑같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같은 말을 하고 경제적 상황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든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종교의 신심활동 단체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들고 나면 대놓고 따돌리며 무시하지는 않고 때론 다행스럽게도 좀 더 성숙한 누군가가 배제된 이를 감싸며 공동체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나의 유약함을 제니가 비난과 질책의 억척스러움으로 극복해나가는 이민자들의 연대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제니의 한나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로 이어지는 반성의 회고록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주류에서 벗어나 밑바닥을 치며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가장 적대시하며 모멸감을 준 이들과 동일한 모습으로의 변화를 시도하는 비겁함을 지적한다. 제니는 한나의 무능력함을 한탄하고 무시하면서도 한나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니는 한나를 괴롭히던 새라와 노라와 같은 학교의 주류를 이루는 친구들의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제니는 한나를 보호하며 마음으로부터 친구가 되고, 좋은 집안의 자녀로 풍족하게 자란 제니의 선망이 된 아이들은 폐쇄된 캠핑장에서 마약과 성행위를 즐기는 그들만의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니는 생일을 맞이하여 한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가 영원히 후회로 남게 될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제니와 한나가 미국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당한 따돌림과 폭력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자신의 경험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제니와 한나의 미국 학교 적응기를 읽으며 이건 누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상으로서는 감히 그려볼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거나 도와줄 이가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가장 큰 상처와 모멸감을 끊임없이 던진다면 과연 그 지옥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학교 폭력과 따돌림이 너무나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라 그렇게 큰 상처로 아파하는 모든 아이들을 위힌 기도가 절실해진다.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꼭 다른 일들이 일어난대. 되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다 이유가 있고, 그게 또 다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 

부스러기라는 게 그냥 영향을 뜻하는 거야?

응, 근데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거.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거. 

아까 비가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비에 다 젖었지? 그건 잘 보이잖아. 딱 봐도 비를 맞아서 젖은 거라고 설명이 되잖아. 

근데 만약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떤 사람이 쓸려가 죽었어. 그 사람의 연인은 그때 큰 충격을 받아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비가 오며 슬퍼져. 심지어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는데도. 그러면 그 사람이 슬픈 건 비가 많이 온 어떤 날의 부스러기가 되는 거야.(154-155)"


"한나는 언젠가 먼 미래의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내가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일 것이다. 그 애는 그때쯤 나를 갖추는 여러 부분의 기원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제삼의 눈일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제야 사람들이 어떻게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수없이 쌓인 슬픔의 부스러기 위에서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이 미래의 문을 연다.(338)"


#김서해 #여름은고작계절 #위즈덤하우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