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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틈새 ㅣ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평점 :
이금이 작가의 [슬픔의 틈새]를 읽었다. '광복 80주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 수식된 띠지의 문구가 너무나 걸맞는 역사 소설이다. 이상하게도 일제강점기와 연관된 소설에 유독 관심이 더 쏠린다. 특히나 어릴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제강점기 시기에 강제 징용으로 먼 타지에서의 삶을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자꾸 쓰인다.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그랬고, 저자의 전작인 하와이의 사진 신부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할린에도 이렇게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실 지명의 이름만 익숙할 뿐 지도화면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 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꽤나 큰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3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이지만, 단옥이 엄마 덕춘과 어린 동생과 함께 징용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충청도의 다래울에서 일본 북해도의 최북단 항구에서 배를 타고 화태라는 오래전 이름의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군다나 기후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추운 지역이기에 한 여름의 서늘한 몇 달을 제외하고는 기나긴 추위에 적응하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에 해외여행을 가면 잠자리가 추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숙소의 퀄리티를 떠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온이 너무 잘된 곳에서 자기 때문이다. 침대 생활이 보편화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집은 어디든 온돌이 깔려 있다. 방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단열이 잘 안된 집을 제외하고는 우풍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라디에이터나 온풍기로 보온을 하는 지역의 숙소에서는 당연히 춥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통 숙소인 료칸은 다다미가 깔린 방으로 저녁식사인 카이세키를 먹고 나서 온천을 하고 오면 직원들이 두터운 이불을 깔아놓는다. 온천으로 데워진 몸을 질식시킬 것처럼 두터운 이불 속에 쏘옥 넣고 보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숙박비는 꽤나 비싼데 난방은 영 시원치 않다.
광복 80주년이라 그런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방송들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받을 때는 아니 왜 하필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발발해서 같은 민족끼리 총과 칼을 겨누고 피를 흘리며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이 발생했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만 운이 나빠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주입식 반공교육은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슬픈 역사의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보다 무작정 북한공산당을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이 수없이 많았기에 남과 북의 적대적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한 이들은 빨갱이 멸칭으로 권력을 빼앗길 위기를 모면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전쟁 이전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단옥의 아버지 만석을 비롯한 많은 한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을 당하게 된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징용한 것인지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을까?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도 당시에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만주와 러시아 북단까지 아마도 섬나라 일본이 대륙을 제패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소련과의 전쟁으로 사할린 섬을 남과 북으로 나눠서 지배하고 있던 일본군은 사할린 남쪽에서 나무와 석탄을 채집할 인력을 강제로 조선에서 끌고 간 것이다.
단옥의 아버지 만석이 탄광 숙속에서 벗어나 사택에서 가족들과 머물기 위해 다래울에 있을 아내와 자녀를 초청할 때처럼, 아마도 당시 징용된 수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지옥같은 시간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해도, 한국 전쟁이 끝나도 사할린에 머물던 한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구마 백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함이 밀려오지만, 경제 개발에 눈이 먼 독재 정권은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난 이들의 귀환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과의 외교전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제대로 된 보상금도 받지 못했으며 자체적으로도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고르바초프가 실각하여 열 여섯 개의 나라로 독립하고 사할린 땅이 러시에 귀속되기 전까지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시대에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나았던 때이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정말로 가난할 때 오히려 북한의 경제적 상황이 나은 때가 잠깐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사할린에 머물던 한인들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소련과 북한 국적을 두고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무국적자로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련 국적을 선택해서 제대로 된 배급을 받는 것이, 북한 국적을 얻어 북한 내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안타까움을 갖게 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정보도 부족했고 남과 북이 이렇게 오랜 시간 대치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미에 단옥이 할머니가 되고 나서 모인 가족들은 우리말, 일본말, 러시아말이 섞인 채 대화를 나누게 된다. 거기에 단옥의 남편 진수의 제주도 사투리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언어대통합이 아닐까 싶다. 언어가 이렇게 섞인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민족과 인종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피가 섞여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이주된 첫 세대의 고유한 전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단옥도 남편 진수와의 이별을 감내하며 사할린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곳에 가족과 자신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렇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이들도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알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뿌리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부모와 조부모가 세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이겨낸 것인지 서서히 깨달아가게 되고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띠지에 언급된 것처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말은 너무나도 운이 좋게도 고국의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진정 감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슬픔의 틈새에서도 살아갈 힘을 찾아내고 견딘 화태의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리의 슬픈 역사가 단지 한숨짓고 마는 체념의 장이 아니라 어디서든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 노력한 위대한 흔적임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사할린은 원래 러시아 땅이었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을 넘겨받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선주민인 아이누족이 부르던 이름에서 따와 남사할린을 가라후토라고 명명했고, 조선 사람들은 한자의 음대로 화태라고 불렀다. 자작나무가 많은 섬이라는 뜻이었다.(20)"
"사할린 강제징용 1세대와 그 가족들의 삶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인간의 운명이 그토록 처절하고 기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앞섰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고통스러운 역사보다 그 틈을 헤치고 살아낸 끈질긴 삶 자체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켜낸 삶에 대한 존중과 공감, 그리고 진심 어린 위로임도 깨달았다.
사할린이라는 공간 역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곳은 단지 비극의 무대가 아니었다. 사할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정과 이산, 디아스포라의 상처가 뒤섞인 채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한국, 일본, 러시아(구소련), 북한, 고려인, 그리고 선주민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채 얽히고설켜 살아온 장소였다. 상처와 기억,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을 품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과거의 재현에 머물게 하는 대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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