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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었다. 2015년 새롭게 번역 재출간된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입했던 것 같은데 책장에 꽂아두고 다른 책은 다 정리하면서도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간을 읽다가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불현듯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다시 꺼내 보니 80페이지 정도에 붙여놓은 표시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그때 억지로 읽으려 해서 인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몰입감이 좋아서 예전에는 왜 읽다가 접어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책을 아무리 좋아해도 때에 따라서 몰입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백페이지 정도 읽다가 얼마전 교보문고에서 특별판이 나왔던 게 떠올라 다음 날 서점에서 바로 구입해서 이어 읽게 되었다. 특별판은 기존판보다 줄 간격이 조금 넓게 나와서 그런지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고 고정이 잘 되어서 그런지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리고 하얀색 바탕에 그려진 빨간 새의 강렬한 이미지가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같은 내용에 심지어 한 페이지에 담긴 글자수가 동일함에도 양장본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아무튼 특별판 덕분에 이번에는 완독을 할 수 있었고 저자의 유일한 또 다른 장편 소설인 [파수꾼]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추수꾼]과 마찬가지로 성장소설의 대표격이라 부를 수 있는 [앵무새 죽이기]는 유사한 형태로 주인공 스카웃이 성인이 되어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깨닫게 된 진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공간과 시간적 배경이 미국 남부의 앨라베마주의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1930년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저자가 살아왔던 시대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막연히 그려낸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가 만났던 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듯이 당시에 흑인에 대한 만연했던 차별적인 시선과 실제의 사건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외국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서 인종차별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긴 개화기에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서양 사람을 보고 코쟁이라고 불렀던 것도 피부색과 겉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하는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권력과 힘을 갖고 있었던 서양 사람들 특히 백인에 대한 시선은 폄하하고 깍아내리려는 시도보다는 막연한 동경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보다 더 체구가 작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노동자로 유입되면서 어느 때는 백이보다도 더 흰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토종 한국인들이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동포에 대한 잠재적 적대감과 심지어 탈북자가 중국동포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까지 더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인종차별을 겪은 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차별을 일삼는 이들이 아무런 동기나 근거없이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해외여행을 하다가 버스를 탔는데 뒤에 앉은 현지의 십대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다가 갑자기 '너희 나라로 꺼져'라는 욕설과 함께 침을 뱉고 내려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일이 그냥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발생된다면 여행 자체를 망쳤다는 화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에 이르지 않을까?
스카웃이 사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현명한 변호사로 마을 주민들의 투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스카웃은 오빠 젬 핀치와 미시시피주에서 방학때만 머물러 오는 딜이라는 친구와 셋이서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들 셋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 중의 하나는 스카웃이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은 부 래들리 아저씨에 대한 궁금증과 무서움을 시험해보는 장난이다. 소설 속에서 몇 번 언급되듯이 메이콤에 사는 스카웃의 이웃들의 거의 대부분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했으며 서로의 가족사를 낱낱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메이콤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아줌마들이 모여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를 여기저기에 알리고 덧붙여 부풀리니 그야말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스카웃 또래의 아이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부 래들리 아저씨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사건으로 인해 집에 감금되다시피 한 상황이 몹시도 궁금했고 과연 아서는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소설의 앞부분은 스카웃과 젬과 딜의 부 래들리 아저씨에게 접근하려는 여러 시도에 대한 모험담이 주를 이루며 흥미를 더해가는데, 곧이어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스카웃의 아빠 애티커스가 변호를 맡게 된 흑인 톰 로비슨의 사건으로 집중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변호사 애티커스는 판사의 부탁으로 톰의 변호를 맡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애티커스의 처신을 몹시 못마땅해한다. 톰은 유얼집안의 장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유죄판결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스카웃은 학교에서 너희 아빠는 검둥이 애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고, 애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앞으로는 더욱 상황이 난처해질 것임을 예고하며 절대로 톰의 변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린다.
사실 이 부분에서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의 위대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자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유없는 모함을 당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의 위협을 가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톰을 변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양심의 소리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닥치게 되면 아무리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결국 불의에 무릎을 꿇게 된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동조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들 모두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가 자녀와 자기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거짓된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기로 한다면, 앞으로는 절대 스카웃과 젬 앞에서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런 위대한 선택으로 인해 스카웃과 젬의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게 된다. 비록 톰의 무죄를 증명할 애티커스의 노련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의 결정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되지만, 유얼은 흑인을 변호하며 모멸감을 준 애티커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할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의 정점은 10월 말의 할로윈을 맞아 진행된 마을 행사에서 스카웃이 햄으로 분장하여 등장하는 연극을 마치고 오빠 젬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다. 평소보다 더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반복되는 이상한 소리에 젬은 스카웃의 입을 다물게 하지만 햄 분장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스카웃은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해 이 거추장스러운 햄 옷을 벗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복수를 다짐했던 유얼이 젬과 스카웃을 공격하게 되고 스카웃이 앞을 볼 수 없어 듣기만 한 정황은 오빠가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이며 크게 다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까스로 위급한 상황이 정리되고 마을 보안관 헥 아저씨에게 발견되어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된 젬은 팔이 반대로 굽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스카웃은 이마에 혹이 나는 정도의 경상에 그쳐 행여나 오빠가 죽지 않았을까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보안관의 확인에 따르면 유얼은 옆구리가 칼에 찔러 나무 아래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고,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아마도 아들 젬이 그랬을 것이라 단정하며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아들의 죄를 덮을 수 없다며 보안관과 설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보안관 헥은 절대로 그럴리가 없으며 유얼은 넘어지면서 칼에 찔린 것이 확실하다며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그때서야 젬의 침대 옆에서 우둑하니 서 있던 한 남자가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는 젬과 스카웃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얼의 공격을 저지한 인물로 추정되었으며 그는 바로 은둔자였던 부 래들리였다. 스카웃은 거추장스러웠던 햄 복장을 벗어던지고 오빠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가 집에만 갇혀 있던 공포를 자아내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아서 아저씨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젬과 스카웃을 구하고 젬의 안위가 걱정되어 스카웃의 집까지 동행했던 아서 래들리는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주 오랜시간의 고립된 생활로 인해 타인과의 교류가 원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칩거한 상태에서도 젬과 스카웃을 위해 옹이구멍에 작은 선물을 놓아두는 선함을 보였기에 그에 대한 뜬소문은 거의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리고 스카웃은 오빠의 안정된 상태를 확인하고 아빠의 말을 따라 아서 아저씨의 손을 잡고 그를 데려다 주게 된다. 부 래들이의 현관 앞에 가는 것만으로도 벌벌 떨던 스카웃은 아서의 손을 잡고 그의 집에 도착해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게 된다. 작품 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카웃은 톰의 재판과 얽힌 사건의 시간을 지나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으로 갖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완전하 달라진 새로운 삶의 시각을 얻게 된다. 이제 스카웃은 부 래들리를 의심하고 무서워하던 이전의 스카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이 유년시절의 스카웃이 겪었던 일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깨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양심을 따르는 결정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서려오는 피해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다. 유얼이 상습적으로 딸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복지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여타의 사람들에게 당했던 무시와 모멸감에 대한 분노를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인 톰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비단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애티커스 변호사처럼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저열하고 비겁한 이들끼리의 담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퇴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은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 존 테일러 판사,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모디 앳킨슨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난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래서 때로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지....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207)"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213)"
"젬, 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마라. 세상만사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진 않단다. 난 다만 이 세상에는 우리를 대신해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을 뿐이야. 너희 아빠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이시거든.(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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