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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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규 님의 [여섯 밤의 애도]를 읽었다. 포털사이트의 연예면 기사는 종종 누구누구의 몇주기라는 기사를 내보내곤 한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유독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이름이 더욱 눈에 띄곤 한다. 그들의 얼굴은 오래전 젊을 때의 사진이 아님에도 너무나도 젊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다는 건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감하게 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때로는 반복되는 아니 그보다 더 힘든 일들이 생겨남에도 우리는 쉽게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매번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모두 참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다. 좀 더 나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이런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살한 이들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왜? 라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주변의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 중에 누군가가 자살을 선택하여 사별자가 된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저서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명사의 자살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사별자가 된 듯한 느낌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나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연예인이 그러한 선택을 했다면 팬으로서의 심리적 충격과 혼란을 상상 이상일 것이다.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거나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했다면 그런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살 사별자를 위로하는 전형적인 말 중의 하나인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또한 당사자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혈연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 집에서 같이 살지만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만일 지금 힘들어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가 얼마나 힘든지, 그 힘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자세히 알기 위한 시도를 깊이있게 기울이지 않는다. 때로는 가족임에도, 아니 가족이니까 더 거친말로 위로 아닌 조언을 건네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잘 견뎌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지나치기도 한다. 


자살예방을 위한 캠페인에 자주 등장하는 '자살 경고신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주변에 자살할 위험의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지만, 실제 자살 사별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살한 가족들이 경고신호를 보냈음에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행여 어떤 이들은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권리와 자유가 없었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관계성은 우리는 살아숨쉬게 만들고 나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 밤의 애도]에 나온 자살 사별자들이 자조 모임에 나온 대화의 내용을 보면 사별자들의 느끼고 경험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기에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어떤 상태가 되어야 제가 괜찮은 건가요?>라고 내담자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상담을 시작할 때 들었던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요?'라는 질문은 시간이 흘러 이렇게 변한다. 괜찮은 상태라는 것은 사별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애도에 관한 여러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사별 경험을 사별자 자신이 겪었던 삶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어떤 윤색도 하지 않으며 고인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슬프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별자가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런 상태는 물리적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인에 대해, 고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힘겹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다.(147-148)" 


메리골드: '꼭 오고야 말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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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의 황소
한이리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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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리 작가의 [게르니카의 황소]를 읽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추상화를 보면 도대체 이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고개를 가우뚱 거리게 된다. 그림에 담긴 심오한 뜻을 알 필요는 없다. 그저 명화를 감상하고 각자가 느낀 바를 마음 속에 담고 타인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자 하는 너그러움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땡큐가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어디선가 내가 감추고만 싶은 진실을 향해 황소가 뿔을 내밀며 내 심장으로 돌진해 올 것만 같았다. 주인공 케이티가 심각한 자아분열을 겪으면서도 진실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국인 10살 된 소녀가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된 계기에 대해서부터이다. 10살에 입양이 되었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케이티는 한국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교도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연을 갖고 있다. 케이티를 입양한 칼 번햄은 정신병원의 부원장이었기에 케이티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 친모처럼 자라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해 어릴때부터 케이티에게 약을 복용하도록 했다. 케이티는 입양된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가 미술관에서 <게르니카>를 보게되고 그녀의 잠재된 미술에 대한 재능에 눈을 뜨게 된다. 케이티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지만 아버지가 주는 약을 복용하고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약을 끊고 17살에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온 케이티는 다시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게 된다. 약을 끊고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케이티는 병원의 환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우연히 병원의 비밀스러운 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방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복제해 비밀의 문을 열게 된다. 그곳에는 에린이라는 실제로는 케이티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이 갇혀 있었다. 에린은 케이티가 간절히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보여주며 자신의 그림을 갖고 싶다면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다. 케이티는 에린의 그림을 갖고 싶어 에린을 탈출시키고 아버지와의 연락을 끊게 된다. 케이티는 니콜을 통해서 DD에게 그림을 보여주게 되고, 점점 케이티의 그림은 인정받기 시작한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에린을 감금했다고 착각하며 케이티는 백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리게 되고, 결국 돈이 바닥나자 다시 니콜에게 연락을 취해 그동안 그린 그림을 DD에게 보여준다. 케이티는 일약 미술계의 핫한 스타가 되고 정체를 숨긴 신비주의 화가가 된다. 하지만 니콜이 케이티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고 자신을 구타하고 도망친 에린이 실제하는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하려 애쓰게 된다. 결국 에린은 자신이 만든 또 다른 자아라는 것을 알게 된 케이티는 아버지의 병원의 비밀의 방은 곧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린을 다시 마주한 케이티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케이티는 살인을 저지른 엄마와 그녀에 의해 죽은 아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버지 칼 번햄의 소아성애적인 욕구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케이티의 한국 이름은 수진으로 뉴욕에서 청과점을 운영하던 수진의 가족은 갈비를 먹고 오던 칼 번햄이 수진을 노리고 벌인 우발적인 교통사고의 보상금을 무마시키기 위해 수진을 칼 번햄에게 넘기게 된다. 결국 수진을 케이티로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는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전락시켰고 뇌전증의 전조가 있던 케이티에게 지속적인 약물 복용을 통해 오랜 시간 그녀를 지배해왔던 것이다. 약물 복용으로 정신분열 증세가 심했던 케이티는 에린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냈고 엄청난 미술 작품을 창조해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케이티가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을 감금하며 망가뜨린 아버지에게 복수를 마치며 자신의 행적을 쓴 일기를 태우기 직전까지의 고백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후벼파는 통각의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소설과 동일한 설정은 아니더라도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로 감금당해 인생을 저당잡힌 이들의 사연이 떠올랐다. 어쩌면 저자가 그렇게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위해 이 책을 바치려 한 것은 아닐까 기대해본다. 


“나는 이제 널 불태워 없앨 것이다. 오래 전 게르니카를 함락시켰듯 널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나면 이제는 영영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세상 어느 역사책에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 나라에서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사랑을 가능하도록 만들어보려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결코 속을 수 없는 거짓에 속아보려고 내가 얼마나 많이 눈 감았었는지. 결코. 갚을 수 없는 원수를 갚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했고, 결코 가능할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꿈속을 헤매었으며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는지. 

정말로 영영 아무도 모를 것이다. 머지않아 나 자신조차도 그러니 이제는 안녕. 나는 지금 이 노트와 함께 그 모든 신기루들을 불태우고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다시는 그 어떤 환상에도 속지 않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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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만드는 사람입니다 띵 시리즈 13
김민지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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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님의 [카레 만드는 사람입니다]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3번째 책이다. 카레 하면 저자의 책에 나온 것처럼 강황이 듬뿍 들어가서 노란색이 주를 이루는 오뚜기 카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레를 그렇게 생각하고 인도에서도 비슷한 카레를 먹지 않을까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런데 카레에 고수가 들어가고 향신료 카레로 이렇게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한다니 새로운 신세계가 열린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랜시간 우리나라 음식에 들어간 향신료를 먹어왔음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먹었던 향신료에 대한 역한 기억 때문인지, 향신료에 대한 거부감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내가 생각보다 향신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번화가에 별다방이 한 집 건너 있지만, 불과 15년 전만 해도 다른 프렌차이즈 커피숍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였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았기에 별다방에 갈 때마다 차이티를 마시곤 했다. 그때는 이름이 타조차이티였는데, 지금은 그냥 차이티라고 부르고 최근에는 아예 메뉴에서도 없어졌다. 하긴 함께 간 사람들 중에 나 말고 그 티를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는 하다. 내가 차이티라떼를 주문해서 마시고 있으면 같이 간 사람이 한 번 맛보고 그 특유의 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었다. 그 특유한 맛을 내는 게 바로 향신료였고, 그 이름은 정향 클로브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야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뱅쇼를 마시고 입맛에 참 맞는다고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와인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빼놓을 수 없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처럼 좀처럼 와인을 끓여서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뱅쇼라는 말에 해당되는 이탈리아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독일어는 쓰는 오스트리아에서는 글루바인이라는 말로 끓인 와인을 표현한다. 오래전 12월 말 오스트리아의 추운 도시를 걷다가 우리나라 포장마차처럼 노상매대에서 파는 글루바인을 마셔보게 되었다. 손발이 얼어 덜덜 떨고 있었는데, 따뜻한 와인을 커다란 머그컵에 받아서 후후 불어가며 조금씩 마시자 몸이 따뜻해지다못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얼굴은 벌개졌지만 추위를 이기고 도심을 더 돌아볼 수 있었다. 요즘은 뱅쇼라는 말이 흔해지고 와인바가 심지어 어느 카페에서도 판매를 하지만 그때만 해도 와인을 끓이면 그 이상야릇한 맛이 나는지 알았다. 알고보니 뱅쇼 곧 글루바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갔는데, 그 중에 중요한 향신료가 바로 정향이었다. 역시 정향은 나랑 뭔가 잘 맞는 식재료인 것 같다. 


삿포로에서 스프 카레를 맛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카레도 향신료로 적절한 맛을 구현했던 것 같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마치 관습적으로 노란 레토르트 카레를 밥에 비벼서 먹는 것이 국률인 것인양 받아들였는데, 카레만큼은 반드시 ‘떠먹파’야만 한다는 지론을 통해 그동안 유난스럽게 비비지 않고 떠먹어왔던 나의 습관이 칭찬받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저자의 카레집을 방문해 책에 나온 카레를 하나씩 맛보고 싶다.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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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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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님의 [장면들]을 읽었다. 부제는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이다. 읽는 내내 '이렇게 무식하게 살아왔어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무관심하게 살아왔어도 되는 것인가' 란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기에 전반적인 소식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심도있게 살펴보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분노유발지 처럼 읽고 나면 욕 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 오히려 멀리하는게 심상에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신이 뭔데'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우리나라 언론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자가 이 말을 들었던 배경에 대한 내용은 조금은 충격적이고 이 세상의 구조가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1부에서는 '어젠다 키핑'이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JTBC 앵커로서 보도했었던 굵직한 내용들의 전말을 알려준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어젠다 키핑은 저자가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전에 어젠다 세팅이 있었다면 어젠다 키핑은 어떤 정치적, 사회적인 커다란 이슈를 단순히 기사거리로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심도있게 많은 이들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함께 토론하며 해결책을 찾아나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의제의 다양한 방향을 보도하는 것이다. 사실 기존의 방송국 뉴스는 꽤나 큰 특종이 있다 하더라도 한달 이상 같은 내용을 주제로 삼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 다른 뉴스거리가 계속 발생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청률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시작한 <뉴스룸>은 달랐다. 종편이 시작될 때 한 목소리로 욕하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JTBC 뉴스를 사람들이 보기 시작했고, 마치 어떤 드라마의 인기처럼 뉴스가 재미있다는 말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뉴스룸>의 인기는 비단 저자와 같은 걸출한 앵커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근간을 흔들만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되었을 때, 예전처럼 그냥 뉴스거리를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 매체들은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공정성을 지니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켜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많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공영방송의 시대가 지나 개인방송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면서 진실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한 내용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보내고 있기에 더욱 더 '어젠다 키핑'은 중요한 화두였다고 생각된다. 


2부에서는 저널리즘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MBC에서 JTBC의 앵커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더불어 그가 추구하는 보도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사실 어찌보면 진보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저자가 이미 보수 언론이다 못해 기득권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오고 있는 조중동 중의 하나이자 삼성과 친족관계로 얽힌 방송국에서 과연 예전처럼 뉴스를 진행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고 보란듯이 JTBC의 뉴스는 중앙일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세이에서 한 지붕 두 가족이라는 소제목으로 진보 성향의 TV 방송과 보수 성향의 신문이 사주의 전략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다름'이 축적된 결과를 어느덧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이란 '민주주의, 인본주의, 합리적 진보'라는 말로 정리한다. 언론의 존재 목적은 바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기에 그 방법으로 합리적 진보를 선택한 이유 또한 전해준다. 


마치 지난 10년 동안의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아주 예리하고 눈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너무나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준 교과서를 읽은 듯한 느낌이다.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세태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언론인이 있기에 아직은 뉴스를 보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황하는 존재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안정한 것이니

흔들리고, 방황하며 실패할지라도.

그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32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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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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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의 [일기] 에세이를 읽었다. 아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지금도 매일 매일 일기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들은 귀한 시간을 내어 그렇게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첫 번째 에세이를 이렇게 솔직하게 심지어 [일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생각과 삶을 낱낱이 드러낼 수 있다는 용기에 감탄을 넘어 경외의 마음까지 든다. 일명 ‘소신’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조금 수월할지 모른다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보아 잃을게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나마 갖고 있는 것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성향이나 정의로움에 대한 일관된 반응들은 사회생활이라는 명목하에 타협과 방관을 종용하곤 한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의 생각과 의견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말을 듣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일탈과 같은 행동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오랜시간 지켜왔던 내면의 보물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껍데기만 남은 모습으로 여생을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비관적, 염세적 생각에 치우친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근래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숨으로 현실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렇게 용기백배의 글을 잃을 때면 소시민처럼 자신을 억누르고 살기 위해 헌신짝처럼 버려두었던 내면의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 들게 된다. 보편적 행복과 소위 평범하게 사는 일상을 선택하지 않고 마비가 올 정도로 글쓰기에 몰입하며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번 에세이를 읽으며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정의로움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비겁함이 떠올랐다. 비겁함은 참으로 쉽다. 마치 리모콘으로 TV를 켜고 수백개의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때우듯이 나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잠재운다. 그리고 의미없는 시간을 소비하며 문제의 중심에서 나를 회피하게 내버려둔다. 그래서 이렇게 온 세상의 눈과 얼음을 녹일 정도로 뜨거운 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다. 비겁하게 지내온 시간에 대한 변명을 한참이나 써 내라는 요구를 듣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세월호가 침몰한 장소가 진도 부근이니 모뉴먼트는 거기 설치하라고, 그것이 마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공평한 의견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참사나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에 모뉴먼트를 세워 제대로 기억하고 재발을 경고하는 일에 늘 소홀했던 이 사회의 사정을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의견이다. 나는 그런 의견들에서 어찌되든 알 바냐, 사라져버리라고 말하는 악의마저 느낀다. 세월호 침몰은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끝난 사건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도와 안산에서 전국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사건이므로 나는 산보하는 길에, 산보하는 길에도, 그 기억들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을 생각하고 다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게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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