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살고 죽고 -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 개정판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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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작가의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었다. 부제는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이다. 불과 두 달 전에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고 십년 전에 출판된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서 단숨에 읽게 되었다. 역시나 권남희 작가의 책은 잘 읽힌다. 이 책이 십년 전에 쓰인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생생함이 느껴진다. [혼자여서 좋은 직업]이 번역가로서의 완숙미를 보여주었다면, [번역에 살고 죽고]는 저자가 전문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솔직담백하게 그려져 있기에, 그리고 정말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자상한 안내서가 될 법하기에 펄펄 튀어 오르는 활어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변변한 취미생활도 누리지 못한 채 치열하게 번역을 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란 의문과 더불어 저자의 무서운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몇 번이 강조된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결국은 그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것인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새로운 서문에 딸 정하의 새로운 일상을 전해주었는데, 그것 또한 저자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인 것 같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거나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든 소심한 성격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책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까지 그들과의 일상을 소소히 전해주는 솔직함이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전해줄 것 같다. 엄마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며 커가는 정하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독자들이 저자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결국 우리를 지탱해주고 전진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좋아하는 일을 무던히도 잘 해내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번역가의 위상을 갖게 된 큰 원동력은 분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당위와 일종의 강요가 없다면 무엇인가의 마침표를 찍기란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아마도 이렇게 번역에 대한 책을 당당히 쓸 수 있는 것은 죽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해내어 생계를 이어나간 스스로에 대한 충만함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번역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본 문학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때라 그런지 아니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직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판권 없이도 번역해서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영화 ‘러브레터’의 이야기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 일본 대중 문화가 수입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 노노재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둠의 경로로 영화 ‘러브레터’를 본 친구들이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지 못하는게 너무 한스러워하는 걸 몇 년 후에야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번역한 수많은 일본 작가들의 책이 나오는데, 몇명을 빼고는 모르는 이름이 많아서 그동안 일본 문학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 것이 순전한 나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저자의 이야기와 번역에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지만 꽤나 유명하고 베스트 셀러였음에도 접하지 못한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이렇게 저자가 번역한 작품이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새로운 독자가 생겨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검다, 까맣다, 꺼멓다, 새까맣다, 시꺼멓다, 시커멓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가무잡잡하다, 거뭇거뭇하다, 희다, 하얗다, 허옇다, 새하얗다, 희붐하다, 희뿌옇다, 허여멀건하다, 붉다, 빨갛다, 뻘겋다, 발갛다, 벌겋다, 발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푸르다,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죽죽하다, 파릇파릇하다, 파르스름하다(185)” 

타이핑 하기도 힘든 이런 단어들을 모조리 외울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 뭐를 하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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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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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타인의 집]을 읽었다.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4월의 눈’, ‘괴물들’, ‘zip’, ‘아리아드네 정원’, ‘타인의 집’, ‘상자 속의 남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열리지 않는 책방’ 이렇게 8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지 또한 멋진 작품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소설집의 품격이  한껏 올라가 보인다. 하지만 수록된 단편들을 읽을수록 우리가 처한 현 시대의 상황이 참으로 녹록지 않으며,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 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고 사회 생활을 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예상했던 그 나이를 훌쩍 넘겼음에도 오히려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아지고 잦은 비판과 염세적인 판단으로 활짝 웃는 일이 비일상적인 사건이 되어버렸다. 

저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편의 주인공들에게 벌어지는 각자 다른 사건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공통적으로 그들의 중심에는 어떤 집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삶이 영위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주는 일터나 나의 육신이 원활히 순환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입에 넣어야 하는 식도락의 만족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아무 걱정없이, 아무런 눈치없이 온전히 내 한 몸을 편히 누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집이다. 그런데 그 편안한 집을 얻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서처럼 주인이 누군인지도 모를 땅에다 철저히 고립된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움막같은 집을 짓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도시의 인프라가 만족스럽고 어떤 위협이나 불안감 없이 안정된 삶을 취할 수 있는 내 소유의 집을 갖는 것은 어쩌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특히나 부모님의 도움 없이 자립된 삶을 살고 싶은 강렬한 자존감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상으로 받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부모님이 나의 터전을 마련해준다면, 그 누가 쉽게 그 안락한 손길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러한 행운을 누리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태평하게 극소수의 이들이 누리는 안락함을 중산층의 표본이라고 내뱉는다. ‘타인의 집’의 주인공인 ‘나’는 세입자의 세입자로 쾌조씨와 계약을 맺고 화장실이 달린 안방에서 혹시나 이 안락한 계약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재화언니가 쿠키와 레몬청을 권하며 화장실을 함께 쓸 수 있느냐는 제안을 외면하자 싸늘한 관계가 지속된다. 설상가상으로 보일러가 고장나서 쾌조씨가 계약을 맺은 집주인이 집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게 되고, 나를 비롯한 희진, 재화언니는 세입자가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 쓰는 방은 쾌조씨의 방으로 급변경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돈내산 미니냉장고와 그녀의 유일한 사친 스타벅스 한정판 텀블러 20개가 들어간 박스는 생활가전 버리는 곳에 놓아두게 된다. 집주인은 집을 내놓아 여러 부동산의 비딩을 즐기며 돌아가게 되고 주인공이 자신의 방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물건을 찾으로 내려가보니 이미 냉장고와 텀블러들이 사라져버렸다. “환하디환한 햇살이 창밖으로 보이는 음울한 뒷산과 대조를 이뤄 광휘로 가득한 쓸쓸함을 빚어낸다. 풍경과 빛과 음악, 그리고 고독한 내 존재는 완벽을 이룬다. 절망과 비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때도 있었지만 어쩌면 삶이란 꽤 괜찮은 건지도…. 머릿속의 생각을 맺기도 전, 두 귀가 쫑긋 선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한순간 모든 걸 망쳐놓는다.(136-137)” 타인은 내 삶의 구원자일수도 있지만 이렇듯 내 삶을 망쳐놓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내면의 어둠은 바깥으로 발설할수록 몸집을 부풀려 결국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영화는 학창 시절과 짧았던 직장생활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78)”

“영화는 말없이 운전을 했다. 왜 귀에는 덮개가 없을까. 눈은 감아버리면 되고 입은 닫아버리면 되고 숨은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참아버리면 그만인데 귀는 왜 이렇게 속수무책인 걸까. 왜 의지로는, 자력으로는 단 한마디로 막아낼 수가 없는 거지. 게다가 나는 지금 손으로 귀를 막을 수도 없잖아.(85)”

“내 어깨 위의 무게감이 다만 근육의 피로감이기를, 절망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지 않기를, 불행과 우울의 악취가 스며들지 않기를.(170)”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성을 갖추고 때로는 억울함을 견디며 손해 보는 느낌을 묵묵히 참아 넘기는 것. 그것이 나 같은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소리 없는 투쟁이다.(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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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 맛의 멋을 찾아 떠나는 유럽 유랑기
문정훈 지음, 장준우 사진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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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 교수의 [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를 읽었다. 맛깔나는 글과 장준우 셰프의 화보 같은 사진 덕에 잠깐이나마 스페인의 시골 순례를 마친 것 같은 황홀함이 밀려온다. 특히나 스페인하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곳이 아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거의 가본 적이 없을 것만 같은 진짜 스페인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서 그런지 스페인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분명 읽는 동안 ‘아 나 이거 아는데, 나 이거 먹어봤는데’라는 감탄사를 수없이 외치지 않았을까하는 하나마나한 한탄을 내뱉고 있다. 스페인 대사관에서 6개월짜리 비자를 받고 나오면서 마스크는 조만간 벗지 않을까란 기대를 했었던 작년 겨울이 생각난다. 사람 사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나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초난감의 상황이 닥쳐올 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 모두가 처절히 경험하고 있다. 

계란프라이를 먹을 때 흰자부위만 슬슬 떼어 먹고 노른자부위만 남겼다가 한 숟가락에 떠 먹는 습관이 있다. 맛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는 것을 누리는 기회를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태리에 산지 1년이 넘어서야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피렌체의 두오모에 올랐었다. 스페인에서 지내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를 했다. 어쩌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후회나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금 점원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처럼 황망함이 밀려왔다. 이걸 어찌해야 하지? 땅바닥에 늘어붙어 점점 흐물흐물한 액체로 변해가는 아이스크림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손으로 주워서 다시 과자콘에 넣을 수도 혀를 내밀어 핥아먹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버럭 승질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친절한 누군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새로운 콘을 사다준다면 바닥에 떨어뜨린 실수를 아쉬워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콘을 조심스럽게 맛보겠지만, 우리 삶에서 그런 새로운 콘은 주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바닥에 떨어져 형태를 잃고 물처럼 변해버려 여러 사람의 발에 밟혀 끈적거리는 흔적을 망연히 바라봐야만 하는 때가 온다. 

우리 모두는 부단히 그 시간을 버텨오고 있다.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대로 써버린 지난 시간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인고의 시간을 어떠한 벌을 받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소중하고 아껴온 것들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양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해도 나 대신 누군가가 그 좋은 것을 누렸을 것이라는 기대를 바라는 시기로 생각하고 싶다. 

“기후적 요인으로 인해 아스투리아스에서는 예로부터 사과를 많이 길렀고, 사과를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다. 스페인에서는 이 술을 시드라라고 한다.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역에서도 비슷한 기후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역시 사과주를 많이 생산하는데, 프랑스어로는 시드르cidre라고 부른다. 영국에서는 이를 또 사이더cider라고 부른다. 우리가 먹는 사이다랑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맞다. 그 사이다가 이 사이더고, 그게 또 시드르고 시드라다. 우리가 탄산음료로 마시는 사이다의 기원이다. 오래전에 유럽의 사과주 맛에 흥미를 느낀 일본 친구들이 설탕물에 약간의 향료와 탄산을 주입해 일본식 사이다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실제 영국식 사이더와 프랑스식 시드르는 강한 탄산감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사이다와 유사점이 있다.(111-112)”

“피멘톤은 스페인 고춧가루다. 스페인어로 피미엔토pimiento는 피망 고추를 의미한다. 피멘톤은 피미엔토를 가루로 낸 것이다. 피미엔토를 프랑스어로 피망piment이라고 하며, 독일, 헝가리 등의 동유럽에서는 파프리카paprika라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영어로 페퍼peper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피미엔토 중에서 작고 매운 고추를 칠레chile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이를 칠리chili라고 하고 한다. 한국에서 피망은 초록색, 파프리카는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을 주로 지칭한다. 위의 어원들을 보면 우리 나름대로 괴이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작은 매운 고추 칠레와 세상에서 가장 긴국가 칠레는 어떤 연관도 없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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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 - 그림책 작가 이석구의 매일매일 아빠 되기
이석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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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구 작가의 [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을 읽었다. 부제는 '그림책 작가 이석구의 매일매일 아빠 되기'이다. 등장인물이 그림으로 표현되어서 그런지 아빠와 딸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귀엽게 느껴진다. 아빠는 퉁퉁한 몸집에 거의 삭발머리에 가까운 모습이고 딸은 유쾌하고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유연한 몸집을 가진 아가의 모습이다. 아마도 인간이 태어나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자녀 출산에 대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자녀를 낳고 싶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이가 싫어서라거나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을 갖고 싶지 않아서라든가의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자녀를 낳은 것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사회구조의 탓이 큰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저자가 그린 아빠와 딸의 일상은 행복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다 못해 넘처 흐를 것만 같아, 저절로 '부럽다, 부러워'라는 말이 터져나올 듯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에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린이들의 말과 행동은 가끔씩 우리를 섬뜩하게도, 기가 차게도, 경탄하게도 만든다. 책에 나온 딸도 상상치도 못한 답변들을 내놓아 웃음을 빵 터트리게 만들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지적해 어른들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특히나 만화를 보던 딸이 "너같이 약해 빠진 녀석은 필요 없다"라는 대사에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고 "왜! 청소 같은 걸 시키면 되잖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너무나도 재미있고 아이의 순진하고 진지한 모습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외침과 더불어 청소 밀대를 돌리고 있는 아빠가 그려진 장면은 더 큰 웃음을 선사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사소한 일상의 대화와 몸짓 덕분에 자녀를 낳아 키우는 고된 과정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외부 회의 자리에서 가방을 열었다가 딸이 등원하며 넘기고 간 곰 인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던 일(그 친구의 이름은 '안녕곰'이었다), 밍밍한 라볶이의 맛을 조금은 즐기게 된 일(그렇지만 언제쯤 칼칼하게 먹을 수 있을까), 아주 긴 코끼리 미끄럼틀에 관심만 보이고 타지 못하는 딸 대신 혼자 느낀 스릴(으아아아아아). 딸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순간들이 한 장 한 장 쌓여 간다. 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똑같지는 않은 하루.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하루. 우리가 함께 그리는 하루들이다.-작가의 말 중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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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 - 동백과 한란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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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고구려7]을 읽었다. 장장 5년 만에 7권이 나와 그 이전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란 우려가 있었지만, 읽다보니 조금씩 과거의 인물들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2011년 고구려 시리즈가 발간되며 처음으로 E-Book 을 다운받아 읽기 전용 테블릿이 아닌 지금 스마트폰의 반쪽 만한 것으로 어딘가 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홀린 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작은 폰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읽을 자신이 없지만 당시에는 그 작은 폰 안에 전혀 알지 못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영화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10부작을 예상한다고 하니 8권는 언제 또 나올지 모르겠다. 이번 7권은 소수림왕 고구부와 그의 동생인 고국양왕 고이련의 이야기이다. 고이련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광개토대왕 고담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다음 권에서는 고구려의 엄청난 활보가 예상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기 기 때문이겠지만 고구부는 정말로 신선이라고도 불릴만한 엄청난 예지와 담력과 분수를 아는 인물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그 옛날 백제와 신라, 가야의 땅이기에 현재의 북한과 중국 영토에 속한 고구려의 지형에 대한 묘사와 풍속들은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려온다. 아마도 북한 사람들이 고구려를 읽는다면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하의 낙랑을 둘러싼 수많은 부족 국가들과 고구려의 대치 상황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유도하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외교를 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무력으로 침략하고 노략질을 일쌈는 부족들이 많았고, 언제 어느 때 침탈해 올지 모르는 경계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고구부의 노련하고 몇 수 앞을 내나보다는 혜안도 중요하지만, 고이련의 철저한 전쟁 준비는 독자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고이련의 기개와 충절 그리고 한결같이 고구려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단련은 비록 눈 앞의 거대한 거란족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대승의 기회를 놓아버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으로 회군하는 결정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이련의 억울하고 참담한 선택을 종용했던 태왕 고구부는 고구려의 역사를 찾는 7년의 방랑 생활을 마치고 참으로 그답게 동생 고이련에게 태왕의 자리를 이양한다. 실로 무협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전장의 모습과 더불어 고구부와 고이련의 충직하고 한결같은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그려졌다. 이런 왕들만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아마도 더욱 공부하기 수월했으리라. 

“서너 달이 지날 무렵에야 비로소 국정을 파악하기 시작한 이련은 경악했다. 고구려 조정의 신하들이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위인들이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의 소임만을 겨우 수행할 뿐, 나라의 크고 작은 일어날 적마다 그들은 망부석처럼 이련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간혹 비루한 의견이나마 내놓는 자가 있거든 다른 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데에만 급급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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