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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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 님의 [쇳밥일지]를 읽었다. 부제는 "청년공, 펜을 들다"이다. 신간을 둘러보다 제목부터 시선을 사로잡더니 주문하고 책을 받은 날,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강력 추천 도서라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읽는 내내 여러번의 감동과 놀라움과 슬픔이 밀려왔고 한 마디로 이분 진짜 고생 많이하셨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아니 청년공이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 건가 라는 부러움마저 느껴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작가를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가가 너무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면 작은 책 하나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등단한 작가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자신으로 이름 석자가 새겨진 책을 한 권 내기 위해서 아주 오랜시간 준비해 왔으며,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으며, 때로는 생계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글쓰기를 포하기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으며 어쩌면 글쓰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탑재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저자를 폄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의 기자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보낸 유년시절은 정말 기구하다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만큼 불행했다. 감히 그 고통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 조차 죄송할 만큼 저자가 보낸 시간을 나는 조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견뎌내는 시간 동안 아마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아무리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더라도 이건 출발점부터가 너무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 쓰인 몇 몇 단어들의 배치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까지 칭송하고 픈 너무나도 적당한 표현이었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에 맞는 단어는 비슷한 뜻을 가진 수많은 단어들 중에 딱 하나 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저자가 바로 그렇게 딱 하나 밖에 없는 상황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귀중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 책의 내용이 저자가 겪은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편의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면 젊은이들이 이렇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면 안된다는 경계심에 그쳤겠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엄연히 지금도 지속중인 우리 사회의 밑낯이었다. 제대 후 몇개월 동안 노동 현장에서 일해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최저 시급을 겨우 웃도는 월급에 청춘을 저당잡힌 채 미래를 그려볼 수 없는 현장에서 떠날 수 없는 이들의 현실을 그동안 모른척 살아왔다. 입으로는 '그래 많이 힘들겠다, 불공평한 처우는 빨리 개선되어야 할 텐데'라고 흰소리만 내뱉을 뿐 나는 그냥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 내 일신을 돌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실 다 읽고 나서도 수박 겉핧기 식으로 조금이만 노동 현장을 엿보았다고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더 마음을 기울여 노동자들의 소식을 살펴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같은 편린된 일종의 무식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책의 말미에 포터 아저씨가 저자에게 해 준 말이 바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해답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니 칼럼은 전부 챙겨 보거든. 근데 그 왜, 우리 판때기에서만 쓰느 말들이 있잖냐?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다 그대로 다 실을 순 없잖어.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 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란 말이지. 노조 아재들이 이게 안 돼. 맨날 머리띠 매고 메가폰 잡고 소리만 치잖아. 간절한 건 이해하겠는데 촌스러워. 그림이 너무 구리잖아. 우리가 그리 욕해도 결국 가진 놈들은 먹물이잖냐? 그 먹물들이 원하는 양식미라는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우리 얘기를 먹물들 언어로 번역해야 해. 좀 아니꼬워도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지. 넌 그게 되더라. 그래서 니가 중요한 거야. 쇳밥 얘기를 먹물들 알아먹게 쓸 수 있으니까.(283-284)"


"나는 강사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빌려 튀어나온 세상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교육과 대학 서열화는 결국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소산물인 돈이 만들어낸 결과물, 평등과 이해는 돈이 되지 않는다. 돈이 안 되니 가르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자연히 자신의 욕망 외 다른 가치를 모른 채 어른이 된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이런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 강사 같은 이들은 삶에 순위를 매겨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고, 실패한 이들에게 냉소를 퍼부어왔다. 공부 안 한 너희들이 잘못했어. 그러니까 힘든 일을 하는 건 당연한 거야. 열심히 살아온 자신은 응당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배워왔을 터.(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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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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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재수사 1,2]를 읽었다. 한동안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나오지 않아서 궁금해하곤 했는데, TV프로그램의 패널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제는 소설을 안 쓰는건가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야 이 대작을 준비하기 위한 침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사물, 혹은 추리물의 전형적인 긴장감이 아닌 장강명표라 할만한 다른 서사가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역시나 살인사건을 다룬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의 여느 소설과는 다른 명백한 특징이 있었다. 정철희 반장과 박태웅, 연지혜 형사의 수사 진행은 시간의 흐름대로 따라가기에 수월했다. 행여나 시간을 거스르거나 화자들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마지막에 갑작스런 반전을 드러내는 전개였다면 꽤나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형사들의 전개 사이사이에 아직 누군지 모를 살인자의 독백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독백이 살인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정황 설명이 아니라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살인자가 창조해낸 새로운 신계몽주의에 대한 논거이다. 그리고 고전으로 유명하지만 손쉽게 읽히지 않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거론되고 설상가상으로 당시의 거대한 철학적 흐름이었던 니체의 허무주의까지 등장하니 살인자의 독백은 그냥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란 유혹까지 밀려왔다. 한마디로 연지혜 형사의 용의자들에 대한 심문과 그들의 사연이 소개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를 맛보다가 갑자기 너무나도 진지한 하지만 몇 번을 읽어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좀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은 살인자의 독백부분에 읽다보면 소설의 반전처럼 골치아픈 철학 수업을 듣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살인자의 독백이 길어야 3-4페이지에 달했다는 것이다. 마치 숙제를 마치듯이 살인자의 논거를 읽고 나면 연지혜 형사가 등장해 “지겨우셨죠. 이제 저와 함께 달리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2년 전에 발생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정철희 반장의 선택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게 된다.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2000년도에는 그 당시가 엄청나게 발전한 첨단 시대라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겨우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지금의 눈에 비춰봤을 때 뭔가 굉장히 구식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한 디지털화가 되기 전인 과도기 단계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 당시만 해도 PC작업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스마트폰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인터넷이 서서히 보급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미궁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되기는 하지만 민소림과 같은 상황이 지금 재현된다면 아마 한달 이내로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나 소설 중간에 아마도 저자의 생각이 크게 반영된 것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범인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제보라고 할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독서 토론 모임에 대한 내용은 뭔가 인터넷이 상용되기 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혀 모르는 생소한 단어를 보게 되면 바로 검색해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소림이 대학을 다녔던 시기에는 백과서전을 찾아보거나 그 단어를 알만한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뜻을 알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당시에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무조건 자기 말이 맞다고 우겨도 당해낼 재간이 없기도 했다.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내기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고서는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지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자고 하면 토론자 중의 반 이상이 읽지 않고도 참석해서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1시간만 집중해서 웹서핑을 하면 줄거리는 물론이요, 학생에서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서평을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간단한 페이퍼는 이제 실제로 학생 본인이 쓴건지 어디서 부분 부분을 갈무리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찌보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가? 요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우리모두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다. 몇 년 전에 요즘 학생들이 유튜브로 검색을 한다는 말을 듣고 설마했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유튜브로 좋아하는 노래와 영상을 보며 즐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다가 우리가 아무런 의미없는 맹목적인 영상과 기사에 중독되어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의 눈으로 2000년을 바라봤을 때 꽤나 촌스럽고 구식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앞으로의 20년 후엔 지금을 또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살인자의 독백에서 구구절절 반복되는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단어가 꽤나 거슬렀다. 대체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만 같은데, 저자가 이렇게나 자주 이 단어를 반복하는데에는 분명 중요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거슬렸다.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해서 더 그런 것 같다. 결국은 살인자가 자신의 살인을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새로운 사조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죄를 판결해달라는 내용이 단지 살인자 혼자만의 호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거의 모든 것을 개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사회가 과연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기 전에 실제로 그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살인자’라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실존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근대화 이전의 미개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류가 만든 인본주의 중심의 수많은 정치 문화 철학 종교 사상들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살인자인 김상은이 민소림이 내뱉은 ‘점박이’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분노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불공평함에서 기인한다면 살인자의 기나긴 독백과도 같은 변명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유독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미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오타모반이라는 누군가에게는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될 수 있는 부분과 대조적으로 맞아떨어졌다. 미인과 오타모반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지울 수 없으며, 미인과 오타모반이 있는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머리속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타모반이 있는 한은수와 김상은을 연지혜 형사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낯설다 또는 뭔가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얼굴을 보게 되면 누구나 다 첫인상을 통한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 민소림처럼 오타모반을 한 사람의 개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다면 김상은이 점박이라는 말을 듣고도 칼로 심장을 찌르지 않았겠지만, 그동안 김상은이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시선에 대한 분노가 단번에 점박이라는 말로 표출된 것이다. 


명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시각을 통해 그림에 담긴 구도와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미적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감각이 없다거나 현저하게 떨어진다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거나 잘생겼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친절하거나 다정하거나 거칠거나 무뚜뚝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을 통해 첫인상의 수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발동되는 미적감각으로 인해서 아름다움의 구조를 가진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한다. 그게 미적감각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발동한 것인지 사랑인지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이러한 미적감각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차별을 유발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차별을 일삼는 반응을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미인이었던 민소림이 오타모반을 개성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원래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관대한 것일까?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 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 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 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 모두 학살자이다.(1권-182)”


“우리가 타인, 혹은 다른 생명에게 공감할수록 그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 감정이입 능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키울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게는 판단의 지침이 되고, 그런 개인들이 모이면 ‘보다 다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종이게 그려진 캐릭터가 좌절하는 만화 속 한 장면을 보고 슬퍼서 눈물 흘린다. 새끼 고양이가 괴롭힘당하는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분노한다. 그러나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12만 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여기서 끔찍한 고문과 학대 행위가 자행된다’는 뉴스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1권-214)”


“자연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보기 좋은 외모라는 건 굉장히 강력한 힘이죠. 미인 유전자를 물려받아 태어나는 아이들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그 힘을 가장 크게 누리게 돼요. 그런데 그 나이에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은 자기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 큰 건지, 그 힘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애타게, 아니면 괴롭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피해를 입어요.(1권-373)”


“미모라는 건 복잡한 힘이에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그 사람들에는 미모를 지닌 본인도 포함됩니다. 때로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큰돈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부서지기도 쉽죠.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사라져버리고요. 그 힘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른 힘, 예를 들어 물리력이라든가 지혜라든가 평판 같은 것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에요. 사용법이 극히 까다로운 힘이에요. 경험이 없을 때에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런 경험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쌓이는 게 아니죠. 특히 고전문학은 그런 데에는 쓸모가 없어요.(2권-70)”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2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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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너에게 줄게
잰디 넬슨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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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디 넬슨의 [태양을 너에게 줄게]를 읽었다. 원제는 “I’ll give you the sun”이다. 이란성 쌍둥이 노아와 주드는 미술계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노아와 주드의 엄마는 쌍둥이를 CSA예술고등학교에 보낼 계획을 세우게 되고 노아는 비범한 실력을 보여주며 예술계 학교에 가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지만, 주드는 엄마의 참견과 계획에 반항하며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노아의 관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들이 열셋 일때, 그리고 주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는 그들이 세살 더 먹은 열여섯 때의 일이다. 그리고 노아와 주드에게 3년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되고 그들은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틴에이저의 발랄하고 예민한 모습을 그리고 있기에 개방적인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성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고 때로는 큰 상처가 되는 다루기 힘든 재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노아의 이야기 시작부분에서는 어디나 그렇듯 등치 큰 몇명 아이들의 무리를 형성하여 힘이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장면이다. 노아 또한 아직 여린 몸과 마음으로 그들을 애써 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고약한 장난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노아가 몸부림 치는 사이 노아를 괴롭히던 제퍼는 노아의 성정체성을 눈치채게 되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순탄치 않음을 예고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노아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듯 엄마와 합심하여 CSA에 들어가 무지몽매한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노아의 계획은 차근차근 잘 진행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노아의 옆집에 나타난 브라이언이라는 고등학교 야구선수가 등장하며 노아의 마음을 한 순간에 잡아간다. 노아는 브라이언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지만 브라이언이 자신과 같은 감정인지 확신하지 못하며 안절부절하게 된다. 이에 반해 주드는 엄마의 간섭에 보란듯이 반항하며 ‘그런 애’가 되어간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노아에게만 집중된 것 같아 주드는 그 나이 때가 아이들이 그렇듯이 못된 짓을 일삼으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하지만 열여섯살이 된 주드는 뭔가 달라졌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난할 때 흔히 곁들이는 말이 있다. ‘곱게 자라서 그래. 뭐 고생을 해 봤어야 알지’ 라는 말들. 사실 곱게 자라는 게 나쁜 일이 아닐 뿐더라, 그렇게 자란 사람의 잘못 또한 결코 아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 쓸데없는 고생을 하지 않고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세상 모든 일이 잘 될거라는 밝고 희망찬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이 어찌 나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자란 사람을 바라보면 속이 뒤틀리게 된다. 특히나 그렇게 곱게 자란 사람이 나보다 잘나가고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깎아내리고 싶어한다. 상대적 박탈감과 못난 자신에 대한 불만족을 그렇게 애둘러 드러내게 된다. 속좁은 이들이 곱게 자란 이를 폄훼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것은 그도 나와 같은 굴곡진 삶을 살아야 인생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태생부터 출발점이 다르고 누릴 수 있는 혜택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에 불행은 왜 나에게만 주어진 것일까란 좌절감과 염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번 뒤틀어진 마음은 쉽게 곧아지지 않는다. 나쁜 말과 마음을 습관적으로 내뿜다보면 어느덧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게 된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다. 

노아와 주드는 순서를 바꾸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선택을 한다. 상처를 극복하고 마주하며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서로를 외면한다. 그렇게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면 어쩌면 영영 그 회복의 씨앗이 매말라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아와 주드에게는 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와 브라이언과 오스카 랠리가 있었다. 그들과의 소모적인 감정 싸움 속에서 노아와 주드는 브라이언과 오스카의 진심을 알게 되고 서로의 용서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노아와 주드의 엄마는 마치 혼령처럼 주드의 곁을 맴돌며 노아와 주드가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애도의 눈물은 한데 모아 영혼을 치유하는 데 써야 한다.(213)”

“플라톤의 설화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머리 둘, 팔 넷, 다리 넷이었는데, 워낙 강하고 자아도취가 심해서 제우스가 모드 반으로 갈라 전 세계에 흩어놓았대. 결국 인간은 평생 자신의 다른 반쪽, 즉 영혼을 나눠 가진 이를 찾아 헤매는 운명이 되었지. 가장 운 좋은 인간들만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내는 거야.(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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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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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무 교수의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을 읽었다. 부제는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이다. 난처한 이라는 줄임말로 시작된 미술 이야기가 어느덧 7권에 이르렀고 이번 시리즈도 역시나 방대한 양과 수많은 작품 사진을 함께 둘러보느라 완독하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문제는 읽을 때는 다 알것 같고 역사적 배경과 위대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곁들여저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잘 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거의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르네상스의 절정에 달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과 하이 르네상스를 지나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매너리즘의 대한 설명 등은 중세 이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을 인상깊게 남겨주었다. 


코로나 이전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이탈리아의 여정에 바티칸 박물관과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신청했다. 바티칸 박물관은 3번째였고 피렌체에도 여러번 갔었지만 해설사 투어를 신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막상 투어를 신청하고 해설사의 진행대로 설명을 들으니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미술 작품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바티칸 박물관 투어에서는 한적한 공간의 바닥에 앉아 무려 1시간 넘게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오래된 작품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에 그의 생애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자세한 내용 또한 휘리릭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번 르네상스 부분에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자 그당시 해설사에게 들었던 내용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사진첩을 뒤적거려 내 손으로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살펴보았다. 사람에 치이면서도 해설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점점 지쳐가던 모습이 떠올라 잠시 여행에 추억에 빠져들었다. 특히나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대체 이곳에 사람이 없을 때가 과연 있기는 한걸까란 생각이 들며 여전히 ‘사일런스’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안전요원들의 목소리가 맴도는 듯하다.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성당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이 성당이나 저 성당이나 다 비슷해보여 감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사실 신자가 아니고 미술과 건축에 관심도 없다면 아마 그런 생각이 드는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신앙 유무와 미술, 건축에 대한 노관심이어도 몇 백년 전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금의 서유럽 국가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평범한 성당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알아갈수록 지금의 가톨릭과는 사뭇 다르게 이어져온 교회의 흑역사에 암담함과 더불어 언제든 그러한 일들이 반복될 수 있음을 항상 상기해야 함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상당수의 유럽 사회에서 성당들이 카페와 레스토랑, 박물관 또는 숙박시설 심지어 나이트클럽으로 팔려나가는 상황과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것은 그런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현상 유지만 해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 부유함과 종교적 신심활동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교회에서는 사적인 모임이 권력과 부를 공유하는 모임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 봤을 때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종교에 더욱 깊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 해외선교사들의 원조를 받으며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젯밥에 관심을 기울이다 열성신자가 된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에 반해, 우리보다 훨씬 먼저 경제적 부를 이루며 안정된 선진국에 진입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종교세로 성당을 운영하는 곳이 많고 종교 분열 이후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벌였던 몇 나라에서는 아직도 신교와 구교의 지역 감정이 남아있기도 하다. 어찌보면 비운의 역사를 들여다보다 화려하게 꾸며진 성당에 대한 설명을 읽게 되면, 결국 성경에 나온 진리를 따르는 삶보다 빛좋은 개살구처럼 겉치장에만 열을 올린 결과물들이 후대에 이르러 귀중한 유물로 여겨지고 보호를 받게 되는 현실이 조금 어이없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코로나 이전의 피렌체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라 냉정과 열정사이의 아오이와 준세이가 오른 두오모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만 한다고 했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피렌체의 명물이 베끼오 다리 또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진촬영은 불가능하다. 독사진을 찍으려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충 한장 찍고 지나가버리게 된다. 그런데 그 베끼오 다리의 아래 상점가 위가  코지모 1세라는 강력한 군주 개인을 위한 통로로 사용되었다니 그것 또한 놀랍기도 하고 암살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오늘날의 고풍스러운 다리로 남게 되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16세기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소개하며 팔라디오라는 건축가의 이름이 꽤 낯익게 다가왔다. 팔라디오 건축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템플 포르티코는 이미 우리나라의 건축물에도 볼 수 있는 그리스 로마식 기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이름이 친숙하게 다가온 이유는 바로 비첸자에서 팔라디오가 설계한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테아트로 올림피코의 사진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고 실내 극장임에도 절묘하게 적용된 원근법으로 너무나 입체적으로 다가오던 무대 위의 구조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마무리하며 예고된 바로크 미술은 어떨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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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 유튜버 하루데이가 기록한 낭만적인 도시 풍경
하루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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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작가의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유튜버 하루데이가 기록한 낭만적인 도시 풍경"이다. 저자의 유튜브 채널을 찾아본다면 책에 나오는 장면들을 상상이 아닌 직관적으로 볼 수 있을테지만 휴대폰은 잠시 내려놓고 간간이 나오는 사진에 대리만족을 하며 뉴욕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읽어나갔다. 군 제대 후 미국에서 6개월 간 어학연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려서 그런건지 그 이후로는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겨도 도통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특히나 총기 사고가 빈번이 일어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더더욱 미국에 대한 흥미는 줄어들었다. 대체 저렇게 불안한 나라에서 어떻게 사는 것일까란 생각이 증폭 될 때마다 우리나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인상도 비슷하다는 반응을 떠올리곤 한다.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하면 항상 따라 붙는 질문은 남이냐 북이냐이다. 농담섞인 질문일수도 있고,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질문 이면에는 대체 한국 사람들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듯 사느냐라는 의구심이 담겨 있다. 하기야 잊을만 하면 미사일을 동해상에 쏘는 북한을 24시간 적대해두고 사는 것이 빈번한 총기 사고보다 더 위험하게 보일 수 도 있겠다만, 그래도 미국의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꽤나 많다. 


어쩌면 이런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불과한 생각들을 오랜만에 접어둘 수 있는 글을 읽게 되어서 반가웠다. 하루 저자의 뉴욕에 대한 글은 미국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에도 맨하튼의 거리를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작은 새싹을 틔우게 했으니 말이다. 사실 부르마불에서 가장 비싼 도시라인에 있는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은 대도시답게 사람도 엄청 많고 높은 빌딩이 즐비한 마천루가 상당하며 덕분에 이래저래 볼거리도 많을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하루 관광객이 로마 내의 주민들보다 더 많이 오는 곳에서 살아봤기에 그 대도시의 정신없음과 더러움에 상반된 활기와 열정을 잘 알고 있다. 로마에서 사람에 치이다가 한 적한 작은 소도시를 방문할 때면 '그래 이 한적함이야 말로 진짜 이탈리아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로마에 돌아와 하교길에 은은한 불빛에 반사된 그윽한 시간의 향기를 내뿜는 콜로세움을 지나치도라면 그 여운은 어느 곳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니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으려면 길가에 치이는 개똥과 홈리스들의 구걸과 지리내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뉴욕은 어쩌면 세계 경제의 심장부라고 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모여들었다가 떠나는 곳이기에 저자의 글처럼 '어디 출신이냐'는 보편적 질문도 쉽게 던지지 못하는 세계화가 이루어진 도시가 아닐까 싶다. 요즘처럼 인종차별에 대한 각별한 시각이 두드러지는 세기를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피부 색깔이나 인종, 국가에 대한 무지몽매한 차별이 남아 있기에 해외에서 행여나 억울한 대우를 받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센트럴파크의 공원이 주는 자연에 대한 공존과 여유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기도 하지만 인위적으로 형성된 대형 공원이 많지 않아서 센트럴파크와 같은 공원이 무척이나 부럽기만 하다. 제주도의 걷기 좋은 숲길에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것처럼 서울 한복판에 몇 시간 동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조성된다면 지금의 삭막함은 조금이나마 상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와 개의 천국인 뉴욕에서는 자신이 키우지 않는 동물에 대한 배려심이 돋보이고 홈리스와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약물 복용에 대한 지나친 관용과 아플 때 상상을 초월하는 병원비에 대한 공포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브로드웨이와 같은 문화와 예술을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것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 소장한 위대한 예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게 된다면 하루 작가의 글을 떠올릴 것이고 가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유튜브를 통해 대리만족하면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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