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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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재수사 1,2]를 읽었다. 한동안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나오지 않아서 궁금해하곤 했는데, TV프로그램의 패널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제는 소설을 안 쓰는건가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야 이 대작을 준비하기 위한 침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사물, 혹은 추리물의 전형적인 긴장감이 아닌 장강명표라 할만한 다른 서사가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역시나 살인사건을 다룬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의 여느 소설과는 다른 명백한 특징이 있었다. 정철희 반장과 박태웅, 연지혜 형사의 수사 진행은 시간의 흐름대로 따라가기에 수월했다. 행여나 시간을 거스르거나 화자들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마지막에 갑작스런 반전을 드러내는 전개였다면 꽤나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형사들의 전개 사이사이에 아직 누군지 모를 살인자의 독백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독백이 살인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정황 설명이 아니라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살인자가 창조해낸 새로운 신계몽주의에 대한 논거이다. 그리고 고전으로 유명하지만 손쉽게 읽히지 않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거론되고 설상가상으로 당시의 거대한 철학적 흐름이었던 니체의 허무주의까지 등장하니 살인자의 독백은 그냥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란 유혹까지 밀려왔다. 한마디로 연지혜 형사의 용의자들에 대한 심문과 그들의 사연이 소개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를 맛보다가 갑자기 너무나도 진지한 하지만 몇 번을 읽어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좀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은 살인자의 독백부분에 읽다보면 소설의 반전처럼 골치아픈 철학 수업을 듣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살인자의 독백이 길어야 3-4페이지에 달했다는 것이다. 마치 숙제를 마치듯이 살인자의 논거를 읽고 나면 연지혜 형사가 등장해 “지겨우셨죠. 이제 저와 함께 달리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2년 전에 발생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정철희 반장의 선택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게 된다.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2000년도에는 그 당시가 엄청나게 발전한 첨단 시대라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겨우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지금의 눈에 비춰봤을 때 뭔가 굉장히 구식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한 디지털화가 되기 전인 과도기 단계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 당시만 해도 PC작업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스마트폰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인터넷이 서서히 보급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미궁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되기는 하지만 민소림과 같은 상황이 지금 재현된다면 아마 한달 이내로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나 소설 중간에 아마도 저자의 생각이 크게 반영된 것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범인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제보라고 할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독서 토론 모임에 대한 내용은 뭔가 인터넷이 상용되기 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혀 모르는 생소한 단어를 보게 되면 바로 검색해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소림이 대학을 다녔던 시기에는 백과서전을 찾아보거나 그 단어를 알만한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뜻을 알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당시에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무조건 자기 말이 맞다고 우겨도 당해낼 재간이 없기도 했다.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내기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고서는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지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자고 하면 토론자 중의 반 이상이 읽지 않고도 참석해서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1시간만 집중해서 웹서핑을 하면 줄거리는 물론이요, 학생에서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서평을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간단한 페이퍼는 이제 실제로 학생 본인이 쓴건지 어디서 부분 부분을 갈무리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찌보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가? 요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우리모두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다. 몇 년 전에 요즘 학생들이 유튜브로 검색을 한다는 말을 듣고 설마했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유튜브로 좋아하는 노래와 영상을 보며 즐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다가 우리가 아무런 의미없는 맹목적인 영상과 기사에 중독되어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의 눈으로 2000년을 바라봤을 때 꽤나 촌스럽고 구식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앞으로의 20년 후엔 지금을 또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살인자의 독백에서 구구절절 반복되는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단어가 꽤나 거슬렀다. 대체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만 같은데, 저자가 이렇게나 자주 이 단어를 반복하는데에는 분명 중요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거슬렸다.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해서 더 그런 것 같다. 결국은 살인자가 자신의 살인을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새로운 사조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죄를 판결해달라는 내용이 단지 살인자 혼자만의 호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거의 모든 것을 개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사회가 과연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기 전에 실제로 그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살인자’라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실존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근대화 이전의 미개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류가 만든 인본주의 중심의 수많은 정치 문화 철학 종교 사상들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살인자인 김상은이 민소림이 내뱉은 ‘점박이’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분노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불공평함에서 기인한다면 살인자의 기나긴 독백과도 같은 변명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유독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미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오타모반이라는 누군가에게는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될 수 있는 부분과 대조적으로 맞아떨어졌다. 미인과 오타모반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지울 수 없으며, 미인과 오타모반이 있는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머리속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타모반이 있는 한은수와 김상은을 연지혜 형사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낯설다 또는 뭔가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얼굴을 보게 되면 누구나 다 첫인상을 통한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 민소림처럼 오타모반을 한 사람의 개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다면 김상은이 점박이라는 말을 듣고도 칼로 심장을 찌르지 않았겠지만, 그동안 김상은이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시선에 대한 분노가 단번에 점박이라는 말로 표출된 것이다. 


명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시각을 통해 그림에 담긴 구도와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미적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감각이 없다거나 현저하게 떨어진다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거나 잘생겼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친절하거나 다정하거나 거칠거나 무뚜뚝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을 통해 첫인상의 수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발동되는 미적감각으로 인해서 아름다움의 구조를 가진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한다. 그게 미적감각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발동한 것인지 사랑인지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이러한 미적감각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차별을 유발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차별을 일삼는 반응을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미인이었던 민소림이 오타모반을 개성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원래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관대한 것일까?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 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 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 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 모두 학살자이다.(1권-182)”


“우리가 타인, 혹은 다른 생명에게 공감할수록 그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 감정이입 능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키울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게는 판단의 지침이 되고, 그런 개인들이 모이면 ‘보다 다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종이게 그려진 캐릭터가 좌절하는 만화 속 한 장면을 보고 슬퍼서 눈물 흘린다. 새끼 고양이가 괴롭힘당하는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분노한다. 그러나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12만 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여기서 끔찍한 고문과 학대 행위가 자행된다’는 뉴스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1권-214)”


“자연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보기 좋은 외모라는 건 굉장히 강력한 힘이죠. 미인 유전자를 물려받아 태어나는 아이들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그 힘을 가장 크게 누리게 돼요. 그런데 그 나이에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은 자기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 큰 건지, 그 힘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애타게, 아니면 괴롭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피해를 입어요.(1권-373)”


“미모라는 건 복잡한 힘이에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그 사람들에는 미모를 지닌 본인도 포함됩니다. 때로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큰돈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부서지기도 쉽죠.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사라져버리고요. 그 힘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른 힘, 예를 들어 물리력이라든가 지혜라든가 평판 같은 것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에요. 사용법이 극히 까다로운 힘이에요. 경험이 없을 때에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런 경험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쌓이는 게 아니죠. 특히 고전문학은 그런 데에는 쓸모가 없어요.(2권-70)”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2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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