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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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작가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을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이다. 표지에는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의 발명과 홍보의 과정을 거치는 재희와 세희의 이야기에서는 표지에 나온 구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전혀 연결짓지 못했는데, 소설의 중반에 등장하는 학교 이사장 영인의 등장으로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목숨까지 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운전을 하며 꽤나 피곤하고 성가신 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야 당연히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나와 동승한 이의 생명 뿐만 아니라 무고한 타인의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사고의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와 여유를 제공하는 자동차는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차가 사람보다 많은 것 같은 과포화 현상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러시아워와 주차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 한적한 곳에서 두 다리로 여유롭게 거닐면 살고 싶다는 자연인의 욕망이 샘솟는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몇 번의 작은 접촉사고를 경험하고 나니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안전이 보장된 자율주행차가 하루빨리 나왔으면 하는 꿈같은 바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요즘은 새차들의 사양이 워낙 좋아져서 안전에 대한 전자보조장치들이 늘어나서 자동으로 차량의 앞 뒤 간격을 조절해주어 자율주행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지게 되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자율주행 차를 시험삼아 운행하고 발생된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단계에 이른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언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과연 백퍼센트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소설에서 슈마허를 개발하고 출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처음엔 생각만큼 사람들의 호응이 시원치 않았던 것 또한 자율주행 차의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이었다. 슈마허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은 개를 피하려다 전봇대를 들이받은 사건을 계기로 슈마허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고 대표이사인 세희와 노회한 정치인같은 테드는 발명자인 재희의 의견과 상관없이 비밀리에 슈마허에 가격표를 대입시키게 된다. 결국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안전이 보장되는 못하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슈마허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손해가 더 적은 쪽으로 말이다. 


가격표가 주입되어 업데이트된 후 슈마허는 마치 사람들이 꿈꾸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러시아워 시간대에도 시속 80키로를 유지하며 시원한 주행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은 슈마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 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 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19)"


하지만 학교 이사장 영인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붙은 AI 가정교사가 내장된 무버라는 교육용 머신으로 인해 발생된 학생들간의 다툼과 갈등을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학교 내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눈쌓인 거리를 뛰어드는 어린 학생과 부딪쳐 뒹굴다 달려오는 슈마허를 마주하게 된다. 눈길에 미끄러지는 슈마허는 입력된 가격표에 따라 어린 학생을 피해 나이 많은 영인을 선택하여 충돌하게 된다. 심한 골절상을 입은 영인은 슈마허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달려온 것을 기억하며 회사에게 슈마허와 관련된 주행 자료를 요구하게 된다. 


가격표가 입력되었다는 비밀을 알려줄 수 없는 세희는 유능한 중재자 매튜를 통해서 영인과 협상을 진행하지만, 영인은 그 무엇도 필요없다며 진실을 알고자 한다. 회사의 중차대한 사안이 되어버린 영인의 사건은 테드의 이해타산적인 논리로 비약되고 슈마허의 성공에 마취된 세희는 인간의 도리와 같은 윤리적 기준들을 외면한 채, 영인의 사건을 계기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회를 삼으려 한다. 매튜는 영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무너지는 압박을 통해 설득을 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불치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자신과 영인의 마음이 결국은 같은 결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재희의 아들이 무버에 의지하며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재희의 아내는 무버를 사들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이 걷고 뛰며 살 수 있도록 눈물겨운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엄마와 극도의 갈등을 겪던 아들이 아빠 재희에게 눈물을 쏟아내며 걸으려 노력하다 온 몸에 상처가 났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결국 편리와 안전을 도모하고자 만들어낸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의 철학적 물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매트의 회심과 재희의 사직으로 거대한 슈마허 회사와의 본격적인 법적 다툼에 돌입한 영인은 어떤 판결을 받게 될 것인지 열릴 결말로 소설을 끝을 맺지만 이는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게 반드시 수반되는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진리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워 주지 않았나 싶다. 


"매튜 씨,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 주는 것. 내 전 재산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사람들이 모두 피 흘려 쓰러지더라도 이제는 봐야겠어요. 이 일로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시간이 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한 순간에 내 모든 시간도 내 사람들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요.(123)"


#이혁진 #단단하고녹슬지않는 #위즈덤하우스 #위픽 #we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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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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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이완의 자세]를 읽었다. 창비 소설Q 시리즈 작품이다. 때를 밀러 공중목욕탕에 간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뜨거운 김이 지속적으로 솟아나와 천장에 맺힌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질 때 갑작스레 머리 위에 찬기운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거대한 욕탕을 가진 공간에서 초록색 때타올을 장갑처럼 손에 껴고 살가죽이 벗겨지기 전까지 죽어라 몸에 학대를 가하는 것 같은 노동의 무위를 느끼고 난 다음부터인지, 아니면 이제는 물장구치며 냉탕과 온탕을 함께 왔다리 갔다리 할 유년시절의 친구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온천이 유명한 곳에 여행을 갈 때야 물이 좋다니 몸을 담그고 샤워를 하는 정도로 즐긴 것이 전부인 것 같다. 목욕탕을 정기적으로 갔었던 어린 시절에도 세신사에게 몸을 맡긴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탕비 말고도 따로 세신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알몸으로 플라스틱 침대위에 벌러덩 누워 생전 처음보는 타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까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이들 때에는 때를 밀때 엄청 아프기 때문에, 대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거나 때릴 밀고 난 다음의 시원함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 유라의 엄마 오혜자는 갑작스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타고난 몸매와 피부 덕분에 피부 관리실을 성공적으로 키워나가지만 사기꾼 남자에게 된통 당한 이후 하나뿐이 딸과의 생계를 위해 선녀 목욕탕의 때밀리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엄마와 유라의 거주지는 여탕의 탈의실과 휴게실이 되었고, 유라는 엄마의 세신 실력 향상을 위한 희생양이 된다. 어린 나이의 유라는 엄마의 때밀이 대상이 되어 무한히 반복되는 신세 한탄과 더불어 때타올과 가만히 있으라는 엄마의 손지검으로 인해 벌겋게 얼룩지게 된다. 이후 유라가 무용의 세계에 들어서 지도자의 손길에 몸이 더 굳어지거나 점점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나, 만수 이전의 애인들과도 육적 친밀함을 나눌 수 없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여탕에서 알몸으로 느꼈던 수치심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유라 엄마 오혜자의 억척스러움과 세신일에 있어서의 철두철미한 영업원칙등으로 인해 집과 차도 사고 딸도 명문여대에 보내는 인생역전의 강건함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엄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때밀이 아줌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생각해보면 목욕탕에서 남의 몸의 때를 벗기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엄청난 체력 손실을 요하고, 알몸으로 누워있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도 해야하며, 피로에 쩔은 상대의 몸을 적절히 이완시키는 마사지 실력 또한 필요할 것이다. 분명 정당한 노동을 통해 수입을 얻는 일임에도 아주 오랜 시간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때밀이라고 폄하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몸으로 들어와 머무는 것이 탕 안에서의 룰임에도 불구하고 세신사들만이 유독 속옷을 입고 머무는 특권을 갖고 있다. 그렇게보면 탕 안에서는 세신사가 일반 손님들보다 권력의 상층이 아닐까. 


목욕탕은 화려한 겉옷을 벗고 알몸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장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에 드러난 것처럼 오회장이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한 쪽 가슴을 절제한 상태에서 아무렇지 않게 알몸을 보여주는 것을 기이하게 받아들이는 내용이 나온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오회장의 모습에 그제서야 외회장처럼 유방암 수술을 한 사람, 자궁을 적출한 사람, 또 다른 신체 부위를 수술하고 여전히 아파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아픔을 공유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목욕탕은 조금 위험한 곳이다. 뜨거운 수증기와 물 때문에 타일 바닥은 항상 미끄럽고, 뜨거운 욕탕물은 갑작스러운 심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곳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 또한 목욕탕에서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을 만난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반 대중들이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겼던 목욕탕마저 정상이라는 개념의 차별이 아주 오랜시간 지속되어온 장소였다는 것을 이번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여탕이 온갖 사람들이 구별 없이 드나드는 곳처럼 개방되어 있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멀쩡한, 나무나 멀쩡한 몸을 가진 사람들만 자신 있게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란 게 눈에 보였다. 목욕탕에서는 체력 소모가 컸다. 대중탕은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오갈 수 있었다. 여탕 입구 유리문에는 전염병 환자와 음주자의 출입을 금하고 뇌심혈관 질환자와 노약자의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84)”


유라가 엄마에게 있어서 때밀이의 세계에서 벗어나 유라가 배우는 무용의 고고한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저버리며 무용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엄마는 평소의 습관처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라는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홀몸으로 힘겹게 아이를 키워낸 엄마들의 진부한 한탄인지만 누구보다도 엄마의 지난 고된 삶을 잘 알기에 유라와 같은 자녀들은 진절머리 나는 그 대사에 함부로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은 그 감사한 마음과는 반대로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냐고’ 대들며 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유라는 진부한 막말과 더불어 남자와 모텔에 갔다는 커밍아웃으로 욕탕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이때 엄마의 대답은 막돼먹고 싶은 유라의 막말을 단숨에 들어가게 만드는 기막힌 응대이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돼.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 이제 잠 좀 자자. 너도 집에 들어가 잘 거 아니면 옷 벗고 편하게 누워서 자. 잠 안 오면 온탕에 한번 들어갔다 오고.(165)”


꿈을 포기하는 것으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의 원천인 목욕탕이라는 장소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유라의 고뇌 또한 극심한 육체적 노동에 길들여진 지친 엄마에게 있어서는 별 것 아니라는, 그까이꺼 다음에 또 하면 된다는 초연함을 보여준다. 정말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유담 #이완의자세 #창비 #소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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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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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십여년 전에 더블린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 덕분에 아일랜드를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의 여행 루틴이 되어버린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아일랜드 관련 여행책자를 검색해보았다. 서유럽의 유명한 나라들은 도시 이름으로만 된 여행책들이 주르륵 열거되었지만, 아일랜드를 다녀와서 쓴 여행기나 여행 정보를 담은 안내서들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최신의 여행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래 전에 쓰였던 여행기를 읽으며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란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팩토리에 불과했는데,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오색찬란한 오래된 성경이라든지,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이라든지, 코크를 지나 블라니성에 올라 허리를 젖혀 금구의 언변을 얻기 위한 성벽에 입맞춤하는 전통이라든지, 골웨이의 클리프모허와 같은 어마어마한 절벽 아래의 바닷가를 벌벌 떨며 바라본 순간이라든지, 그리고 아일랜드 특유의 펍문화를 즐기고 왔던 기억이 난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의 세계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못 보고 온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알게된 충격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꽤 근래에 이르기까지 신교와 구교의 충돌로 오랜시간 반목하며 지내왔다는 점이다. 그냥 의견충돌이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논쟁 수준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신교의 지역과 구교의 지역이 나눠져 있을 정도라니, 이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가 정치문화 및 그들의 삶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내려 도저히 화합이나 관용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과거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나라처럼(사이비만 아니라면) 종교에 관대한 나라에서 지내다보면 어차피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하나의 종교이면서도 갈라진 믿음의 형식으로 인해 서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유럽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아주 오랜 시간 거의 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연결되어 있었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막강했고 절대자인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까지 선별하여 내릴 수 있었으니 일반 대중들의 두려움과 맹목적인 복종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 옛날 얘기가 아니냐고 치부해 버렸을 때,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여전히 어느 수녀회가 운영하던 세탁소가 착취와 폭력이 난무했다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소설 속 식당 여주인의 말처럼 10대의 어린 소녀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음을 외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역시나 유사한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갔던 사건과도 유사한 일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아닐까 싶다. 


석탄 목재상인 주인공 빌 펄롱은 아내 아이린과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빠다. 펄롱의 탄생과 유년시절은 순탄치 않았는데,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에 가까웠다. 나중에 어렴풋이 자신을 아끼고 돌봐준 네드가 아버지일 것이라 짐작하게 되지만, 열여섯 살에 펄롱을 나은 엄마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여유있는 집안의 가사일을 하다가 아이늘 낳게 된 것이다. 소설에서 미시즈 윌슨은 개신교도로 나오고 펄롱이 땔감을 납품하는 큰 고객인 수녀원은 가톨릭을 상징하며 큰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아비없이 윌슨 부인 집에 얹혀 살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거리의 부랑아나 어딘가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애처로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윌슨이 결혼을 하고 석탄 목재상의 일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다섯 딸이 배를 곯지 않도록 먹이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원하는 선물을 사줄 수 있었던 것은 윌슨 부인의 자비로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임을 펄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로운 모습의 대명사인 윌슨 부인의 아량과 따뜻함과는 정반대의 매몰찬 모습으로 등장하는 수녀원장은 석탄광에 갇히 맨발의 어린 소녀를 발견한 펄롱에게 마치 그 소녀를 아끼고 돌보는 것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펄롱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위선적인 행위에 속아넘어가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펄롱의 딸들은 그 수녀원과 담벼락 하나로 붙어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딸들이 앞으로 더 잘 되기 위해서는 그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그 도시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착취 당하는 소녀를 보고 와서 아내에게 연민에서 비롯된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지만, 아내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을 건넨다. 어찌보면 아내 아일린의 대답이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일 것이다.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하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 덤태기를 내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지금 당신의 어줍지 않은 동정의 마음이 다섯 딸의 인생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암시까지. 펄롱은 아내의 말에 위압감을 느끼며 거리를 나서게 된다. 과연 이렇게 모른척, 못본척 하는게 옳은 걸까, 하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 엄청난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함이 지속되는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된다. 


펄롱의 고뇌와 갈등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내와 딸들의 설레이는 분주함과는 또 다른 대척점을 이루며 자신을 돌봐주던 네드를 찾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네드가 머물던 윌슨 부인의 집에서 그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처음보는 낯선 여자에게서 네드와 닮았는데 친척이 아니냐는 물음을 듣게 된다. 아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알게 되다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이지만, 네드와 윌슨 부인과의 추억을 곱씹는 펄롱은 자신을 이렇게 살게 해준 그들의 따뜻한 애정을 되물림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 맨발의 소녀를 석탄광에서 데리고 나와 보란듯이 시내를 거닐며 앞으로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불운한 일들을 기꺼이 감내할 것임을 다짐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은 그 사소해 보이는 관심과 애정이 결국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사회를, 세상을 바꿀 것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개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19-121)”


#클레어키건 #이처럼사소한것들 #다산책방 #홍한별 #clairekeegan #smallthingslike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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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생애 소설Q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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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완벽한 생애]를 읽었다. 창비 소설 Q 시리즈 작품이다. 심각한 문제를 회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속에서 떨쳐내고 싶지만 찰나의 순간 일뿐 지속적으로 걱정과 불안이 앞다투어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도 되는거냐고 채근질을 해댄다. 당장 일어나 뭔가를 하려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꾸만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단죄하려는 태도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책감을 전염시킨다.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그렇게라도 자신을 학대하는 순간 찰나의 자유를 느끼기에, 그 단죄의 자유에 중독되어 나와 너의 삶을 갉아먹는다. 


윤주와 시징과 미정은 모두 이별을 맞이했지만 그 이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고통스러운 순간을 인내하게 된다. 살아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인 살갗을 벗겨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고통 이후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그러한 고통이 나에게 다가온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만한 설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들의 죽음 등 예기치 못한 일들이 삶을 온통 휘젓고 다닐 때 파고가 높아진 마음이 가라앉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며 다 괜찮다는 납득이 절실하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회복될 수 없다. 


미정과 함께 제주도의 제2공항 건설을 반대는 집회에 누구보다도 앞선 활동가인 보경 언니라 칭하는 중년의 여성에게 숨겨진 사연 또한 이런 고통의 순간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형태의 인재로 인해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생사를 달리한 자식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 뿐만이 아니라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된 모든 과정이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한 이들이 있다면 그에 응당한 벌을 받는 과정과 온전히 애도할 수 있는 포용의 연대와 시간이 필요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어서 빨리 그 이별을 종결시키라고 명령하듯 윽박지르는 모습에 인간 존재에 대한 하염없는 섬뜩함이 밀려온다. 과연 너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그렇게 쿨하게 일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윤주는 오랜시간 선우와의 연애와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여전히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채로 방송작가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미정이 머무는 제주로 떠나게 된다. 제주로 떠나면서 자신의 방을 에어비엔비에 올려 시징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고 시징에게 의도치 않게 메모를 남기게 된다. 시징은 홍콩에서 만난 은철과의 우연한 재회를 기대하며 윤주의 방이 있는 영등포에 도착한다. 윤주와 선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는 가난에 대한 대물림의 두려움이었다. 

“돈 걱정 없이 학점을 관리하고 영어를 배우러 해외에 나가고 비싼 영상 제작 강의를 듣는 스터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외로웠다. 자꾸만 끈이 풀리는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절대로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고, 잘 달리고 싶고 잘 달릴 수 있는데도 패배가 결정된 경기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다른 선수들이 매끄럽게 달리는 동안 끈을 다시 매기 위해 수시로 주저앉아야 하는 경험을 세대에 걸쳐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비참하다고, 비참하게 이용당하는 것뿐이라고.(57-58)”

선우의 끝없는 말에 언제나 그가 혼자일 것이라 믿었지만, 윤주가 다시 취업한 독립 프로덕션의 신입 피디 제안을 위해 선우를 찾아가지만, 금속 공장에서 퇴근한 후 배가 부른 아내의 함께 장을 보고 행복하는 얼굴을 보며 윤주는 완전한 이별을 깨닫게 된다. 


윤주와 미정 그리고 시징이 이별이 이유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애써 붙잡고 있던 죄책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말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도록 인고해온 시간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보기 싫은 못난 모습을 자꾸만 투영시키는 서로의 존재가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너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다 괜찮다’고 전해온 포용 덕분에 윤주와 미정과 시징은 손을 흔들며 이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어떤 미안함은 편리하다는 것을 문영이 알까. 누군가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 둘레에 벽을 쌓아서 자신에 대한 의심과 혐오 그리고 열등감을 사전에 차단하는 그런 미안함도 있다는 것을.(33-34)”

우리가 느끼는 모든 삶의 상실과 실패는 마치 누군가의 미안함을 반드시 양산해내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상실과 실패로 인해 불완전해진 것만 같은 삶의 단면 또한 생애의 한 과정이라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내 좋은 친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고,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라고요. 친구의 그 말을 상기할수록, 그가 나와 헤어진 뒤에야 다른 사람과의 정착을 결심한 걸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의 생애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것뿐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요. 그것이 우리 각자의 여행이겠죠. 물론 필연적인 과정들을 통해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151)”


“이별에도 만남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

한때 나는 시간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었다. 시간이야말로 신의 몸이며 신의 언어라고.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에게 간절한 방식으로 시간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차피 각자의 속도로 살아간다. 벗어날 수 없는 어느 시절이 무거워서, 하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그때에 더 머물러야 한다면… 아무리 덜어내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남아 나의 오늘을 가로막는다면… 나는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시징처럼, 윤주처럼, 그리고 미정처럼.

그들은 과거를 그저 사라지는 시간으로 두지 않았다. 과거를 외면하는 방법으로 현재를 훼손하지도 않았다. 현재도 과거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생애를 충실하게 살아냈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과거를 돌보면서 현재를 지켜내는 사람. 함부로 끝내지 않고 떠밀리듯 시작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나의 생애를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 - 최진영 발문 중에서(159-160)”


#조해진 #완벽한생애 #창비 #소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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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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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진 작가의 [골드러시]를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입국심사". "캠벨타운 임대주택", "골드러시", "졸업 여행", "헬로 차이나", "한국인의 밤", "외출 금지", "배영" 이렇게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얼마 전 읽은 문지혁 작가의 소설집이 미국 유학생과 이민자들을 배경으로 했다면, 서수진 작가의 소설집은 호주를 배경으로 한 이민자들이 이야기가 여러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국과 호주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영어가 공용어인 곳이 두 나라에게 아마도 가장 많은 교민과 유학생이 거주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가본 적은 없지만 두 나라에서 한동안 머물다 온 동료들이 있기에 그곳의 이야기를 자주 듣곧 했다. 전해들은 얘기들로는 각 나라의 특성이 명확히 그려지지 않기에 장점을 들을 때는 '아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공감하게 되고, 인종차별과도 같은 어이없는 일들의 예를 들을 때면 '대체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살까'라는 막연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단정적일수 있겠지만 문지혁 작가의 [고잉 홈]과 서수진 작가의 [골드러시]를 읽고 보니 미국에는 유학을, 호주에는 워킹홀리데이의 비율이 높은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유학이든 워홀이든 일정기간이 지나면 비자발급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게 아니라면 결국은 영주권과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 될 것이다. 외국에서 비자 갱신을 위한 서류 준비와 발급 과정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지난하고 짜증나는 일인지. 비자 발급 관공서 직원의 갑질과 행여라도 책 잡힐까 두려워 온갖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비자 연장이 수락된 날 마치 엄청난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파티라도 벌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일부 잘사는 나라들의 횡포라 단정지으며 우리나라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국뽕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자를 연장하려는 제3세계 국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비자발급 기관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친절하거나 인격적인 대우가 이뤄지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전쟁과 정치불안이 지속되다보니 곳곳에서 자국을 탈출하여 보다 안전한 곳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난민이 속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북한 덕분에(?) 육로가 차단되어 불법밀입국자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지만, 배를 타고 밀입국하거나 워홀비자로 입국하여 자취를 감취는 불법체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농업 및 제조업 분야에서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수지타산을 맞추기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에서 이주민 노동자들과의 삶은 불가피하고 더욱 잘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분위기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미국이나 호주에서 받았던 인종차별을 대물림하듯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 시선이 팽배한 것 같다. 더군다나 몇 년 전에 제주도에 머물던 예맨 난민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놀랍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사람 사는 곳 어딜가나 마찬가지라고, 혹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지내보면 괜찮다'고 한다.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순순혈통인 것처럼 떠벌였지만 막상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심지어 저 멀리 유럽과 남미의 피가 섞인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인종, 언어, 문화 등이 다른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과 수단일 뿐 그것이 한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의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가장 많은 판단기준을 설정하는 인간의 편협한 뇌기능은 특히나 우리날에서는 피부색으로 적대와 호의를 순식가에 갈라치게 만든다. 


문지혁 작가가 추천사에 "이민자가 꼭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만을 부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어딘가를 떠나 새로운 곳에 도착하고,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며, 결국에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므로, 따라서 서수진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국의 인물들은 단순한 디아스포라의 일원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뒷표지)"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미국이나 호주처럼 먼 곳으로 이주하여 사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학교와 직장 등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고 그리워하기도 몸서치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서수진 작가의 단편 속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민자로서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행여나 좌절감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적인 충동이 무한한 해결책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새로운 이민자의 삶을 지속할 뿐이니까 말이다. 


#서수진 #골드러시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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