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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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십여년 전에 더블린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 덕분에 아일랜드를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의 여행 루틴이 되어버린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아일랜드 관련 여행책자를 검색해보았다. 서유럽의 유명한 나라들은 도시 이름으로만 된 여행책들이 주르륵 열거되었지만, 아일랜드를 다녀와서 쓴 여행기나 여행 정보를 담은 안내서들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최신의 여행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래 전에 쓰였던 여행기를 읽으며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란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팩토리에 불과했는데,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오색찬란한 오래된 성경이라든지,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이라든지, 코크를 지나 블라니성에 올라 허리를 젖혀 금구의 언변을 얻기 위한 성벽에 입맞춤하는 전통이라든지, 골웨이의 클리프모허와 같은 어마어마한 절벽 아래의 바닷가를 벌벌 떨며 바라본 순간이라든지, 그리고 아일랜드 특유의 펍문화를 즐기고 왔던 기억이 난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의 세계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못 보고 온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알게된 충격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꽤 근래에 이르기까지 신교와 구교의 충돌로 오랜시간 반목하며 지내왔다는 점이다. 그냥 의견충돌이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논쟁 수준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신교의 지역과 구교의 지역이 나눠져 있을 정도라니, 이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가 정치문화 및 그들의 삶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내려 도저히 화합이나 관용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과거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나라처럼(사이비만 아니라면) 종교에 관대한 나라에서 지내다보면 어차피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하나의 종교이면서도 갈라진 믿음의 형식으로 인해 서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유럽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아주 오랜 시간 거의 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연결되어 있었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막강했고 절대자인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까지 선별하여 내릴 수 있었으니 일반 대중들의 두려움과 맹목적인 복종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 옛날 얘기가 아니냐고 치부해 버렸을 때,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여전히 어느 수녀회가 운영하던 세탁소가 착취와 폭력이 난무했다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라는 소설 속 식당 여주인의 말처럼 10대의 어린 소녀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음을 외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역시나 유사한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갔던 사건과도 유사한 일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아닐까 싶다. 


석탄 목재상인 주인공 빌 펄롱은 아내 아이린과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빠다. 펄롱의 탄생과 유년시절은 순탄치 않았는데,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에 가까웠다. 나중에 어렴풋이 자신을 아끼고 돌봐준 네드가 아버지일 것이라 짐작하게 되지만, 열여섯 살에 펄롱을 나은 엄마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여유있는 집안의 가사일을 하다가 아이늘 낳게 된 것이다. 소설에서 미시즈 윌슨은 개신교도로 나오고 펄롱이 땔감을 납품하는 큰 고객인 수녀원은 가톨릭을 상징하며 큰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아비없이 윌슨 부인 집에 얹혀 살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거리의 부랑아나 어딘가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애처로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윌슨이 결혼을 하고 석탄 목재상의 일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다섯 딸이 배를 곯지 않도록 먹이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원하는 선물을 사줄 수 있었던 것은 윌슨 부인의 자비로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임을 펄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로운 모습의 대명사인 윌슨 부인의 아량과 따뜻함과는 정반대의 매몰찬 모습으로 등장하는 수녀원장은 석탄광에 갇히 맨발의 어린 소녀를 발견한 펄롱에게 마치 그 소녀를 아끼고 돌보는 것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펄롱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위선적인 행위에 속아넘어가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펄롱의 딸들은 그 수녀원과 담벼락 하나로 붙어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딸들이 앞으로 더 잘 되기 위해서는 그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그 도시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착취 당하는 소녀를 보고 와서 아내에게 연민에서 비롯된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지만, 아내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을 건넨다. 어찌보면 아내 아일린의 대답이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일 것이다.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하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 덤태기를 내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지금 당신의 어줍지 않은 동정의 마음이 다섯 딸의 인생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암시까지. 펄롱은 아내의 말에 위압감을 느끼며 거리를 나서게 된다. 과연 이렇게 모른척, 못본척 하는게 옳은 걸까, 하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 엄청난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함이 지속되는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된다. 


펄롱의 고뇌와 갈등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내와 딸들의 설레이는 분주함과는 또 다른 대척점을 이루며 자신을 돌봐주던 네드를 찾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네드가 머물던 윌슨 부인의 집에서 그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처음보는 낯선 여자에게서 네드와 닮았는데 친척이 아니냐는 물음을 듣게 된다. 아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알게 되다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이지만, 네드와 윌슨 부인과의 추억을 곱씹는 펄롱은 자신을 이렇게 살게 해준 그들의 따뜻한 애정을 되물림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 맨발의 소녀를 석탄광에서 데리고 나와 보란듯이 시내를 거닐며 앞으로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불운한 일들을 기꺼이 감내할 것임을 다짐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은 그 사소해 보이는 관심과 애정이 결국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사회를, 세상을 바꿀 것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개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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