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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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작가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을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이다. 표지에는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의 발명과 홍보의 과정을 거치는 재희와 세희의 이야기에서는 표지에 나온 구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전혀 연결짓지 못했는데, 소설의 중반에 등장하는 학교 이사장 영인의 등장으로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목숨까지 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운전을 하며 꽤나 피곤하고 성가신 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야 당연히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나와 동승한 이의 생명 뿐만 아니라 무고한 타인의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사고의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와 여유를 제공하는 자동차는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차가 사람보다 많은 것 같은 과포화 현상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러시아워와 주차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 한적한 곳에서 두 다리로 여유롭게 거닐면 살고 싶다는 자연인의 욕망이 샘솟는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몇 번의 작은 접촉사고를 경험하고 나니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안전이 보장된 자율주행차가 하루빨리 나왔으면 하는 꿈같은 바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요즘은 새차들의 사양이 워낙 좋아져서 안전에 대한 전자보조장치들이 늘어나서 자동으로 차량의 앞 뒤 간격을 조절해주어 자율주행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지게 되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자율주행 차를 시험삼아 운행하고 발생된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단계에 이른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언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과연 백퍼센트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소설에서 슈마허를 개발하고 출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처음엔 생각만큼 사람들의 호응이 시원치 않았던 것 또한 자율주행 차의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이었다. 슈마허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은 개를 피하려다 전봇대를 들이받은 사건을 계기로 슈마허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고 대표이사인 세희와 노회한 정치인같은 테드는 발명자인 재희의 의견과 상관없이 비밀리에 슈마허에 가격표를 대입시키게 된다. 결국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안전이 보장되는 못하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슈마허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손해가 더 적은 쪽으로 말이다. 


가격표가 주입되어 업데이트된 후 슈마허는 마치 사람들이 꿈꾸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러시아워 시간대에도 시속 80키로를 유지하며 시원한 주행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은 슈마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 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 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19)"


하지만 학교 이사장 영인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붙은 AI 가정교사가 내장된 무버라는 교육용 머신으로 인해 발생된 학생들간의 다툼과 갈등을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학교 내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눈쌓인 거리를 뛰어드는 어린 학생과 부딪쳐 뒹굴다 달려오는 슈마허를 마주하게 된다. 눈길에 미끄러지는 슈마허는 입력된 가격표에 따라 어린 학생을 피해 나이 많은 영인을 선택하여 충돌하게 된다. 심한 골절상을 입은 영인은 슈마허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달려온 것을 기억하며 회사에게 슈마허와 관련된 주행 자료를 요구하게 된다. 


가격표가 입력되었다는 비밀을 알려줄 수 없는 세희는 유능한 중재자 매튜를 통해서 영인과 협상을 진행하지만, 영인은 그 무엇도 필요없다며 진실을 알고자 한다. 회사의 중차대한 사안이 되어버린 영인의 사건은 테드의 이해타산적인 논리로 비약되고 슈마허의 성공에 마취된 세희는 인간의 도리와 같은 윤리적 기준들을 외면한 채, 영인의 사건을 계기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회를 삼으려 한다. 매튜는 영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무너지는 압박을 통해 설득을 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불치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자신과 영인의 마음이 결국은 같은 결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재희의 아들이 무버에 의지하며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재희의 아내는 무버를 사들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이 걷고 뛰며 살 수 있도록 눈물겨운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엄마와 극도의 갈등을 겪던 아들이 아빠 재희에게 눈물을 쏟아내며 걸으려 노력하다 온 몸에 상처가 났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결국 편리와 안전을 도모하고자 만들어낸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의 철학적 물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매트의 회심과 재희의 사직으로 거대한 슈마허 회사와의 본격적인 법적 다툼에 돌입한 영인은 어떤 판결을 받게 될 것인지 열릴 결말로 소설을 끝을 맺지만 이는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게 반드시 수반되는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진리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워 주지 않았나 싶다. 


"매튜 씨,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 주는 것. 내 전 재산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사람들이 모두 피 흘려 쓰러지더라도 이제는 봐야겠어요. 이 일로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시간이 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한 순간에 내 모든 시간도 내 사람들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요.(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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