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
정재영 지음 / Lik-it(라이킷)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재영 님의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을 읽었다. Like-it 시리즈 9번째 책이다. 사실 공구하면 최근에 사용한 적이 별로 없기에 문외한이라는 말이 딱이다. 오히려 어릴때에는 못과 망치를 들고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모험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겁이 많아져인지, 아님 딱히 벽에 액자 걸때 외에는 딱히 쓸 일이 없어서인지 내 책상에 공구라면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와 줄자 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은 한심하고, 조금은 참 편히 살았구나 싶다. 

그럼에도 복스알(소켓)과 깔깔이(래칫 렌치)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잊고 있었던 군생활이 떠올랐다. 포병으로 군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이 있을텐데, 조종수나 정비병이 아니어도 검열이 있는 날에는 전 장병이 포에 들러붙어 분해된 재료들을 기름과 구리스로 범벅이 되어 수입을 하게 된다. 이때 다시 원상태의 조립을 위해서 복스알과 깔깔이를 사용하곤 했는데, 깔깔이가 돌아갈때의 소리가 꽤나 리듬감있고 정확히 조여졌을 때 느껴지는 쾌감 같은게 있었다. 구리스는 얼마나 닦이지 않던지 비누칠을 열 번을 해도 손이 미끄덩 거렸고, 그 손으로 상추쌈에 고기를 싸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 용접에 대한 저자의 예찬과 더불어 용접은 해본적도 없으면서도 알루미늄 용접을 구경하다가 아다리(용접 눈뽕)에 걸려서 하루종일 눈물을 질질 흘렸던 기억도 난다. 

1부에서는 ‘공구로운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어떻게 공구상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공구상으로 적응하고 일을 배워가며 겪은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공구로운 사용 설명서’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간단한 공구에서부터 전문적인 산업용 공구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구체적인 상표의 이름까지 알려준다. 공알못인 나조차도 한 번 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DIY에 대한 동기유발로 충분하다. 아마도 집안의 간단한 작업을 즐겨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자기만의 공구함이나 작업공간을 갖고 싶은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믹스커피에 대한 저자의 소회는 우리나라에 만연되어 있는 직업의 귀천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반성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학원 강사가 수학 가형 7등급은 결국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럴 거면 지이잉~ 용접 기술 배워 호주로 가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10)”는 기사는 우리 사회에서 육체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70년대에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로 대변되던 사무직 노동자와 공장 및 산업 노동자들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본 시선은 아직도 건제하여 망언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누군가가 믹스커피 봉지에 담긴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뜨거운 물에 넣고 봉지를 말아 휘휘 저으면 분명 안 좋은 성분이 녹아내릴 것을 알면서도 그 한 잔에 노고와 시름을 견뎌낼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고 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식품의 믹스커피를 사랑하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가끔은 다른 맛도 보시라고 베트남의 G7커피를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렇게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공장과 아파트가 장난감처럼 쌓아 올려지던 옛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땀 흘리던 우리 부모님들에게 잠깐 숨 돌릴 틈을 만들어준 것이 이 믹스커피 한 잔 아니었을지, 그리고 기분 좋은 달달함과 더불어 적당한 각성으로 현장으로 되돌아가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원천이 아니었을지. 지금 나도 갑자기 믹스커피가 당긴다.(27)”

부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준성 작가의 [카르마 폴리스]를 읽었다. 그야말로 어느 판타지 영화에서 그려볼법한 가시여왕이 지배하는 왕국의 모습이 소설의 커다란 배경이지만,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허구성을 벗겨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부패와 딜레마를 그대로 적용시킬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의 전개는 기존 소설과는 다른 느낌으로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오가며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실제에 있을 법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스피드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갑작스럽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혼령들의 구슬픈 서사도 진행되고 고아 42번이 마주한 조각상의 시선도 특색있게 등장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아 42번이 태어나게 된 경위이다. 관절염을 앓는 유리부인과 남편은 불임의 오랜 시간 끝에 아이를 갖게 되고 유리부인의 임신을 유지할 신체적 건강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시여왕이 통치하는 왕국의 모습이다. 유리부인과 남편은 북쪽 마을에서 부르주아와 지배 계급의 사람들과 유리된 채 난쟁이와 노숙자,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는 곳에서 거대한 댐 건설의 노동자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가시여왕은 댐 공사에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리며 건축사의 말을 무시했고, 결국 만에 하나의 경우의 수가 실제로 벌어져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거대한 볼더 댐은 무너지고 북쪽 마을 사람들은 수장되고 만다. 댐이 무너지며 유리부인과 남편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기적같은 행동으로 유리부인은 간신히 붙은 숨으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부모를 잃은 유리부인과 남편의 간난 아기는 이미 교단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한 P수사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고아원에 보내지게 된다. 볼더 댐의 수장으로 P수사를 기소하려던 모든 이가 죽게 되고 P수사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 여기며 위선적인 고아원장이 된다. P수사는 평소의 악한 성정을 다시 드러내며 어린 아이들을 추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다 그만 21번의 고아를 죽게 만든다. 이후 쥐들의 기이한 행로를 지켜보던 난쟁이 무덤지기가 의로운 젤링거 박사에 투서를 넣게 되고 P수사의 악행은 드러나게 된다. 


이후 가시여왕의 과거사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녀가 그런 극악무도한 인물이 된 불우한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아주 오래 전 만행을 거듭했던 어느 왕조의 이야기에서 들어봤을 법한 가시여왕의 선조왕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의 전형을 보여주듯이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그리고 가시여왕은 왕가의 충실한 사냥개이자 잔혹한 집행관이 알도 파스칼리노와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은 폭정을 이어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복잡하고도 모든 연결되어 있는 중심에는 고아 42번이 있다. 42번은 박쥐를 닮은 얼굴로 태어나 P수사의 괴롭힘을 당할 위기를 천재적인 암기력으로 모면한 후 전전긍긍한 상태에서 가시여왕의 자폐증에 걸린 아들과의 도플갱어와 같은 얼굴로 궁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가시여왕의 아들은 지하에 유폐된 채 지내오다가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제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그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피의 복수가 넘쳐 흐르는 호러물을 방불케 하며 죄를 지은 이들은 언제일지 모르는 자신이 덫씌운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진실은 포유류이다.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짓은 버섯류이다. 한 번에 수천여 개의 홑씨를 뿌리며 포자번식을 하고, 그늘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자라나기 때문이다. 독버섯은 이따금 떨어져주는 빗물 외엔 그 어떠한 보살핌도 필요치 않았다.(275)"


"대관절 세상이 전혀 알기 쉽게 되어 있지 않은데, 거기에 대고 알기 쉬운 설명을 읊어댄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사기극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손쉬운 설명에만 열광했으니, 이것만큼 그들이 바라는 것이 진리가 아님을 명약관화하게 증명해주는 증거도 없었다.(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쿠다 히데오의 [죄의 궤적 1-2]을 읽었다. 그동안 저자의 이름을 많이 들어왔지만 작품은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명성 그대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존에 읽었던 추리나 범죄물의 형태와는 다르게 범인을 추정하고 구속하는 과정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 실제로 일본에서 1963년도에 있었던 어린이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상당히 많은 경찰들이 등장하지만 주요 인물의 이름만 기억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삿포로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섬나라이고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면적이 그렇게 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홋카이도 섬 하나가 우리나라 남한의 3분의 2정도에 해당된다고 하니,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홋카이도의 주민과 오키나와의 주민은 거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홋카이도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직항편이 신설되고 교통비가 상대적으로 내려가면서 홋카이도는 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겨울에는 눈을 보러 가는 관광지가 되었다. 위도상 상당히 우리나라의 북한보다 높은 지역이 많기에 한 여름에 가도 그다지 덥지 않다. 이야기의 시작은 홋카이도의 최북단 왓카나이시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후 10년 배를 타고 3시간은 가야 도착하는 레분토 섬에서부터이다. 


1956년도 전까지만 해도 청어잡이가 만연했던 레분토 지역은 그 이후로 씨가 말라 다시마를 거둬올려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우노 간지는 물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계부 밑에서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간지는 계부의 폭력으로 자해공갈 사고를 당해 순간 기절하거나 기억을 잃는 장애를 갖게 된다. 이후 간지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빈집털이를 하다 레분토에서 다시마를 거둬들이는 어부일을 하게 된다. 간지는 이웃한 동네의 빈집털이를 해서 모아놓은 장물을 동료에게 걸리게 되고 얍샵한 동료의 꾐에 넘어가 다시마 일을 시키는 주인 집의 털어 레분토를 떠나 도쿄로 가려고 한다. 하지만 간지는 기름이 떨어진 배에서 바다 한가운데 놓이게 되고 구사일생으로 해안가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빈집털이를 통해 여비를 마련하고 도쿄로 오게 되어 전시계상의 집을 털다가 전시계상의 살인의 혐의를 받게 된다. 


악역에 간지라면 그에 대적하는 선인의 역할은 오치아이라는 엘리트 대졸 형사이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형사들 사이에도 대학물을 먹은 사람은 눈엣가시로 여겨지는 듯 하다. 오치아이는 그러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성실하고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오치아이의 수사에는 많은 유능한 선배 형사들이 등장하는데 오바와 닐은 풍부함 경험을 바탕으로 범인의 범주를 줄여나간다. 


그 외에 이야기의 한 축에는 미키코 라는 산야의 여관을 운영하는 딸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키코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1세대로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미키코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배경이 그려진다. 미키코는 산야를 중심으로 한 좌익 단체와 경찰 및 야쿠자의 세계에 둘러싸여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온전한 세계관을 지키려고 한다. 미키코의 철없는 동생은 야쿠자 똘마니가 되어 간지를 만나게 되고 천성이 착해서인지 간지를 지켜주려다 엉뚱한 일을 겪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경찰에 붙잡힌 간지는 요시오 어린이의 유괴와 애인이었던 여인의 살해를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범죄 현장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탈출하여 계부를 죽이려 삿포로로 간다. 이를 알게 된 오치아이와 다른 형사들이 간지를 다시 붙잡게 되는 과정은 소설이 아니라 눈 앞에서 영화가 그대로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감 넘치게 잘 묘사되어 있다. 바로 눈 앞에서 간지가 엄지 손가락을 빼서 수갑을 풀고 숨이 멋을듯 헐떡이며 도망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간지가 오바와의 심문에서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하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흔히 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책의 제목이 [죄의 궤적]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때, 간지의 말은 어느 누군가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한 사람에게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사이코다 소시오패스라고 규정지으며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치부해버렸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 예, 그래도. 적어도 태어날 때부터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뭔가 구원받았다고 할까...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충분히 지독한 일을 당했고,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도 다소는 용서받지 않을까 하는....

-그럴 리 없잖아. 도둑을 만난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쳐도 용서받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유는 있어요.

-그런 게 이유가 돼?

-오바 씨는 몰라요. 나쁜 짓이라는 건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훔치는 것은 내 탓만이 아니에요. 나를 만든 것은 아방이와 오마이니까요.(2권 3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 - 2021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허남훈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남훈 작가의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을 읽었다. 2021 한경신춘문예 당선작이다. 표지만 보면 정말 무표정한 이모티콘처럼 노잼 그 자체일 것 같지만 막상 첫장 첫문장부터 늪에 빠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몰입이 되었다. 또 한 명의 놀라운 페이지 터너의 탄생이 아닌 싶을 정도로 글을 읽고 있지만 마치 눈 앞에 허수영의 삶이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그냥 허수영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세밀하게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저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소설의 주인공 허수영은 지방 일간지의 기자 생활을 하다가 대형신문사에서 새로 발간되는 스포츠 일간지의 경력 기자로 채용된다. 그런데 그런 번듯한 직장을 가진 허수영 기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로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허수영은 보험설계사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보험설계사로서의 허수영의 성장 일기와 보험설계 일을 배우며 제일스포츠 기자로서 겪었던 일들이 교차로 나온다. 그리고 그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좋아보이는 신문사를 스스로 그만두었는지 알려준다. 허수영과의 고등 절친인 사카이(경계, 갈림길, 기로)는 통상적인 조연이 아니라 사카이의 삶도 꽤나 비중있게 그려진다. 9급 공무원 시험을 몇년 째 준비하며 독서실에서 버티던 사카이는 몇달 간 지옥 같은 독서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공시생활을 버티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용직 노동을 하러 지방으로 떠난다.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가 진행되고 허수영과 사카이의 도전이 위태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눈에 띄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아 한편으로는 덜 긴장된 마음으로 허수영과 사카이를 응원할 수 있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자 사직서를 낸 허수영에게 “부장은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을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괜찮겠냐며 만류했다.(8)”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자신이 오랫동안 몸 담았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나 점점 고도화 전문화되어가는 사회 구조 속에서 나이든 지원자가 지원하는 영역에 경험이 전무하다면 고용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채용할 이유를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허수영 기자처럼 공황장애를 앓게 되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고 버티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렇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병을 앓게 되면서도 하고 있는 일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을 하지 못한다. 내게 기댄 가족들 때문에, 이게 아니면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지금 죽을만큼 힘들어서 당장 그만두고 싶더라도 막상 떠나고 나면 절대로 지금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넘어가지 않는 숨을 억지로 삼키며 오늘도 버틴다. 

보통 신입 보험설계사는 지인과 가족부터 시작하여 계약을 따내려 하지만 허수영은 신문사에서 알게 된 그 좋은 인맥을 절대 이용하지 않겠다며 처음부터  집중한다.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신입 허수영은 나름대로의 전략으로 접근하지만 첫 계약을 따내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 소설의 말미에 허수영은 보험설계사를 그만둘 무렵 사카이의 건강보험을 하나 계약하게 된다. 그런데 B형 간염 보균자인 사카이의 보험은 간과 관련된 질병에는 부담보가 적용되는 조항이 있고, 6개월 후 간염균이 활성화 되었는지를 검사한 것으로 인해 5년이 지난 후에도 간에 관련된 질병은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이에 허수영은 보험 정관의 문제를 물고 늘어져 간염균의 추적 검사를 한 것 만으로 재진단을 적용하여 각종 보장에서 제외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임을 금융감독원에 질의하여 응답을 얻어낸다. 

“배달을 가다 가끔씩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고. 그럴 때 일단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간다고. 가다 보면 다시 생각이 나더라고. 소설을 쓰는 동안 그 말씀을 자주 떠올렸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에 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붙들 수 있는 건 언젠가는 독자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달렸고 이렇게 당신에게 닿았다.- 작가의 말 중에서(3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조 작가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었다. 이제는 뮤지션 요조보다 작가 요조가 더 잘 어울리는 듯한 그리고 제주의 무사 책방 주인이라는 겸직 또한 저자만의 매력적인 이력인듯 하다. 이제는 가수가 화가가 배우가 책을 쓰는 것이 더 이상 선입견을 갖지 않은 채, 책을 사랑하고 자신이 생각을 언제든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변화가 아닐까 싶다. 어느 출판사와 문화사의 문예제를 통해서 등단한 이들에게만 작가라는 칭호를 붙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고립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개별출판을 통해서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훨씬 출판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더불어 저자가 말하듯이 도서 정가제에 대한 상반된 이해들 가운데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가운데에서도 '책이 너무 비싸지 않냐?'는 의견을 경청한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으면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너무 많아 돈독이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가진 돈이 스스로 돈을 벌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잔고 속 0의 개수가 버블버블 늘어나서,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들은 신나고 흥겹게 그 독에서 유영한다. 반대편에서는 누군가 돈이 턱없이 부족해서 돈독이 오른다. 당장 다음 달의 평범한 일상이 불투명하고 요원해서, 아무리 일해도 도무지 여유 있는 삶이 도래하지 않고 언제나 현실이 빠듯하고 거칠어서, 원하지 않는데도 내몰리듯 돈독이 올라 지나치게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 책값이 너무 비싸다며 도서 정가제의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도, 동네 책방의 생태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며 도서 정가제의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도 어쩐지 후자의 이유로 돈독에 노출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170)"


저자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인 경우도, 뮤지션인 경우도 많은데 작년에 읽은 책 중에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죽은 자의 집 청소]의 저자 김완 님을 만났다는 내용에서는 부러움이 배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에서 <거룩함과 거룩함>라는 전시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갖고 태어난 순수함을 지키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나갈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복잡한 아픔들에 주로 모른다는 말로 안전하게 대처해왔다. 빼어나고 노련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손사래도 치고, 뒷걸음질도 친다. 그 와중에 김완이나 고승욱 같은 사람은 모르는 채로 가까이 다가간다. 복잡한 아픔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기어이 알아내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손을 내민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96)"


어쩌면 저자가 이런 담백한 삶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쳐왔기에 버스 기사의 선글라스와 마스크 속에 감춰진 구겨진 얼굴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게 아닐까? 서울에서 서점을 운영할 때 서점 앞에 맘대로 세워놓은 차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한 저자의 한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동일한 분노와 더불어 '참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라는 푸념과 혹시 나도 어디선가 그런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을까란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허혁 작가의 [나는 그냥 버스 기사입니다]라는 책이 내용에 견주어 저자는 놀라운 깨달음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그들의 구겨진 얼굴이, '징그럽게 외롭고 고독한 삶의 대목'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도 '구겨진 얼굴'은 많다. 집회 현장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은 조용하고 얌전하지 않다. 늘 화를 내고, 얼굴을 빨갛게 만들며 언성을 높이고, 머리를 깎고 피를 토할 듯 절규하고 있다. 나는 그 구겨진 얼굴들을 보며 이제 절대로 '저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고 싶을 만큼 매일같이 겪는 불평과 차별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듣지 않고 변하지 않아 결국 얼굴이 꾸깃꾸깃 구겨진 채로 거리에 나온 노동자들과 여성들, 장애인들, 그 밖의 약자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구겨진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얼굴을 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당신의 얼굴이 이렇게 구겨지도록 만들었는지를 묻는 것. 최대한 자주 그 구겨진 얼굴을 따라 옆에 서는 것. 책방을 운영하면서 힘들고 귀하게 배운 태도이다.(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