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었다. 그동안 많은 단편, 장편 소설을 발표한 작가임에도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준비한 여행 에세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기에 여행 에세이를 보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의 사진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며 다시 이런 시간이 올 수 있을까란 막연한 기분까지 든다. 마치 SF 영화에서 황폐해진 지구의 어딘가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커가며 아주 오래전 멀쩡했던 지구의 모습을 전해듣는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으로 엄청난 액션을 보여주었던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이란 영화에서 제목의 뜻처럼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일정한 알약을 복용하게 하여 인간의 고유한 감정을 조종하려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꽤나 높은 지위에 속한 인물이지만 알약을 복용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불온한 물건들을 소유한 이들을 소탕하는 작업 중에 뜻밖의 의문을 갖게 된다.
영화에서는 책이나 음반, 미술 작품 등을 몰래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잔인하게 사살한다. 주인공은 알약의 복용을 멈추고 인류의 조상이 남긴 문화 유산을 감상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정세랑 작가의 여행 에세이는 그동안 한 여행 한다는 프로들이 써온 여행기와는 사뭇 달랐다. 저자 스스로 마지막 말에 밝혔듯이 어설픈 각도의 사진과 때로는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진들은 '대체 뭐지'라는 의아함을 자아내곤 했다. 그리고 어떤 일정한 계획이나 테마 없이 그저 여행을 하기 힘든 병력을 가졌던 저자가 뉴욕을 계기로 조금 확장된 신혼여행을 비롯한 몇 개의 도시만을 소개할 뿐이다.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 이렇게 아헨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가봤을 법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엮여있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일관성 없는 도시의 맥락에다가 자세한 여행 정보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한 도시 한 도시 쳅터가 넘어갈 때마다 빈 공란으로 써 있는 '( )만큼 ( )을 사랑할 순 없어'라는 짧은 문장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어 지속적으로 맴돌았다. 그리고 비교적 저자의 개인적 감상이 가득한 이 여행 에세이에 '지구'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한 가지 보편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아~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언어, 문화, 습관, 역사, 인종 등이 다를 뿐, 죽을 때까지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지구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도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함께 하는 이들과 웃고 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저 먼 곳에 사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보이지 않게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떠나게 되면 깨닫게 된다. 내가 무심코 버린 쓰레기 하나가, 내가 무심코 행한 무례한 행위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불한 댓가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지구에 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전한다.
"하와이는 아름다웠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기적적으로 형성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는 눈 돌리는 곳마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아주 취약한 것이기도 했다. 하와이 사람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지키려고 해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엉망으로 살면 그대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종류의 취약함 말이다. 그래서 하와이를 사랑하게 된 나는 결심했던 것이다. 하와이에 되도록 가지 않겠다고. 제주를 사랑하면 제주도에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되듯이. 하와이로 은퇴하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여행 책을 쓰며 어떤 장소에 다시 간다면, 하고 여러 번 썼지만 앞으로의 나는 별로 여행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와이가 아닌 어디라도, 여행의 기회를 아직 더 여행해야 할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싶다. 찾아낸 보물들을 충분히 품고 있으므로 비행기를 덜 타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한다. 꼭 가야만 하는 취재나 직접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있을 때는 예외를 두겠지만 기본적으로 삼가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의 여행 책이 달고 맛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필터 삼아 걸러낸 지구의 면면을 살짝 떨어져 탐닉하고 싶다.(396)"
이러한 정세랑 작가의 고백은 영화 속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지키려 하는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았음이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