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술꾼입니다 - 고양이 홍조 집사의 음주생활 10년 만화 에세이
민정원 지음 / 경향BP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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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원 님의 [이번 생은 술꾼입니다]를 읽었다. '고양이 홍조 집사의 음주생활 10년 만화 에세이'이라는 부연 설명을 보고 옳거니 하고 덥석 집었다. 몸에 술이 맞지 않아서 그런지 술에 대한 미련이 더욱 많이 생긴다. '내가 한 술 했으면 기냥 다 평정했을텐데'라는 망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술을 조금 더 잘 마셨더라면 대인 관계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라는 기대에 이르러, 술을 아주 잘 마셨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수도 있을테니 다행인가라는 단념에 다다른다. 


주변에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가끔은 나도 술을 잘 마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들이 술로 인해서 건강을 헤치고 이제는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니, 왕년에 술꾼이었다는게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듯 싶다. 나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 술을 잘 마시는 것은 하나의 재능이나 능력처럼 비춰졌다. 그런데 간혹 기인같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젊었을 때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했던 분들이 중년이 나이에 이르러 하나 둘 씩 건강의 문제가 발생되고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도 하나의 훈장인지 너털웃음으로 심각한 상황을 넘겨버리며 이런 결론을 맺곤 했다. 사람이 평생 먹을 술의 양이 정해져 있는데, 그게 아주 젊을 때 왕창 마셔버린 사람은 나이들어서 입에도 못대고, 어릴 때 음주가무의 낙을 몰랐던 사람이 늦바람이 불면 그때서야 강호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명 '알콜총량의 법칙'이 그것이다. 


요즘 TV 공익 광고에서 '노담'이라는 줄임말로 청소년 및 흡연자들을 대상으로 금연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금주를 강조하는 공익광고는 보기 힘들다. 술은 담배와는 조금 다르게 음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일까? 적당한 흡연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음주는 때론 서로 권하기도 한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술이 없었다면 아마도 꽤나 재미없고 밋밋하지 않았을까 싶다. 술로 인해 패가망신에 이르기도 하지만 술은 많은 순간 인간의 감정을 노곤노곤하게 만들어 여흥 및 솔직함에 빠지게 만든다. 


술에 대한 개개인이 갖고 있는 웃픈 사연들은 아마도 차고 넘칠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땅을 치며 후회하는 기억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전해주는 소소한 술 자리의 행복들은 분명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는 좋은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결국 술이라는 것도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재료에 불과한 것일 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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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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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었다. 그동안 많은 단편, 장편 소설을 발표한 작가임에도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준비한 여행 에세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기에 여행 에세이를 보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의 사진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며 다시 이런 시간이 올 수 있을까란 막연한 기분까지 든다. 마치 SF 영화에서 황폐해진 지구의 어딘가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커가며 아주 오래전 멀쩡했던 지구의 모습을 전해듣는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으로 엄청난 액션을 보여주었던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이란 영화에서 제목의 뜻처럼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일정한 알약을 복용하게 하여 인간의 고유한 감정을 조종하려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꽤나 높은 지위에 속한 인물이지만 알약을 복용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불온한 물건들을 소유한 이들을 소탕하는 작업 중에 뜻밖의 의문을 갖게 된다. 


영화에서는 책이나 음반, 미술 작품 등을 몰래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잔인하게 사살한다. 주인공은 알약의 복용을 멈추고 인류의 조상이 남긴 문화 유산을 감상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정세랑 작가의 여행 에세이는 그동안 한 여행 한다는 프로들이 써온 여행기와는 사뭇 달랐다. 저자 스스로 마지막 말에 밝혔듯이 어설픈 각도의 사진과 때로는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진들은 '대체 뭐지'라는 의아함을 자아내곤 했다. 그리고 어떤 일정한 계획이나 테마 없이 그저 여행을 하기 힘든 병력을 가졌던 저자가 뉴욕을 계기로 조금 확장된 신혼여행을 비롯한 몇 개의 도시만을 소개할 뿐이다.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 이렇게 아헨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가봤을 법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엮여있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일관성 없는 도시의 맥락에다가 자세한 여행 정보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한 도시 한 도시 쳅터가 넘어갈 때마다 빈 공란으로 써 있는 '(   )만큼 (    )을 사랑할 순 없어'라는 짧은 문장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어 지속적으로 맴돌았다. 그리고 비교적 저자의 개인적 감상이 가득한 이 여행 에세이에 '지구'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한 가지 보편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아~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언어, 문화, 습관, 역사, 인종 등이 다를 뿐, 죽을 때까지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지구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도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함께 하는 이들과 웃고 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저 먼 곳에 사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보이지 않게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떠나게 되면 깨닫게 된다. 내가 무심코 버린 쓰레기 하나가, 내가 무심코 행한 무례한 행위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불한 댓가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지구에 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전한다.


"하와이는 아름다웠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기적적으로 형성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는 눈 돌리는 곳마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아주 취약한 것이기도 했다. 하와이 사람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지키려고 해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엉망으로 살면 그대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종류의 취약함 말이다. 그래서 하와이를 사랑하게 된 나는 결심했던 것이다. 하와이에 되도록 가지 않겠다고. 제주를 사랑하면 제주도에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되듯이. 하와이로 은퇴하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여행 책을 쓰며 어떤 장소에 다시 간다면, 하고 여러 번 썼지만 앞으로의 나는 별로 여행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와이가 아닌 어디라도, 여행의 기회를 아직 더 여행해야 할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싶다. 찾아낸 보물들을 충분히 품고 있으므로 비행기를 덜 타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한다. 꼭 가야만 하는 취재나 직접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있을 때는 예외를 두겠지만 기본적으로 삼가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의 여행 책이 달고 맛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필터 삼아 걸러낸 지구의 면면을 살짝 떨어져 탐닉하고 싶다.(396)"


이러한 정세랑 작가의 고백은 영화 속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지키려 하는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았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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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 비극적인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사회적 기록
산만언니 지음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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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언니 님의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비극적인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사회적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커다란 사건 중의 하나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흐른다해도 분명히 기억되야만 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사실 그 사건이 발생되기 전까지만 해도 삼풍백화점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시각 나는 택시 안에 있었다. 신입생으로 맞이한 첫 여름 서품식을 마치고 동기들과 택시를 타고 연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택시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긴박한 소식이 들려왔다. 방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아니 21세기가 얼마남지 않은 그 시점에 오래된 건물도 아니고 새로 지은지 6년 밖에 안된 백화점이라는 거대한 건물이 무너진다라는 게 말이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택시에서 내려 뉴스 화면을 통해 본 붕괴 장면은 예상보다 너무나도 심각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 이후 뉴스에서는 연이어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왔고, 오랜 시간 무너진 잔해더미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도 조금은 위로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렇게 오랜 시간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겪게 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기에 붕괴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와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헤아리는 정도로 조금씩 잊혀져 갔다. 


시간이 흘러 PTSD에 대한 교육을 받고 삼풍 백화점에서 살아난 사람들,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세월호에서 구조되었거나 구조작업을 했던 분들이 떠올랐다. 그분들은 그 일이 있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힘들겠구나, 그런 끔찍한 일이 있기 이전과 그 일을 겪고난 이후의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일 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 담긴 글을 읽으며 행여나 나도 그 엄청난 사건들을 하나의 가십으로만 여긴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 개미들이 머무는 곳에 침입자가 나타나는 위협적인 순간에 맞닥드린 개미는 순식간에 공포의 감정을 주변의 다른 개미들에게 전달해주는 페로몬 덕분에 한 공간에 머문 개미들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일사분란하게 대피하거나 다른 대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일종의 강제적인 공감 호르몬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 가진 호르몬은 그런 강제성을 갖지 못하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이 겪는 고통스러운 모습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공감능력은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의 간절한 호소처럼 세월호 사건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남의 고통과 아픔을 제멋대로 재단질 하는 이들은 과연 인간의 호르몬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아픔을 드러내면 주목을 받아 행여나 간신히 메워져 가는 상흔에 새로운 생채기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을 텐데도 용감히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 저자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이 책으로 인해 어디선가 홀로 죽음같은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이 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너에게 새로 주어지는 일상을 지켜내길 바라. 기억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는 소중한 거야. 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두길 바라. 무엇보다 스스로를 좀더 아껴주었으면 좋겠어. 대단히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매일매일 너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어.

또 세상에 얼어나는 모든 불행의 서사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그냥 바람이 불고 비가 오듯, 어떤 일들은 이유 없이 일어나. 우리네 인생도 그래. 이해하려 애쓰지 마. 그냥 받아들여. 깊이 고민하지 마. 그리고 명심해. 네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잊지 마. 시작된 모든 일에는 끝이 있어.(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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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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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읽었다. 출간 예고를 보고 양장본과 저자 싸인이 있는 초판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며칠 늦게 사전 예약 주문을 했다. 출간일 다음 날 바로 도착한 책이 양장본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며 서지를 살펴보니 벌써 9쇄! 정유정 작가의 인기와 독자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단숨에 느껴졌다. 아쉬움을 삼키고 다음에는 꼭 예고를 보자마자 주문 예약을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역시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의 연속과 신유나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이코패스에게 휘말려 옴싹달싹 못하는 주변 인물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미 저자의 악의 연대기에서 등장한 주인공들의 보여준 인간 내면에 극악함이 신유나라는 30대의 여성을 통해 책의 제목처럼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 불행을 가져올만한 요소들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모습으로 치환되었다. 신유나와 신재인 자매의 불행한 관계의 전개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두 자매의 어머니는 왜 작은 딸의 서늘한 잔인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란 문제의 근원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유나가 완전히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행했던 기이한 행동들의 단초는 그가 어린 시절에 부모와 완전히 유폐된 채 할머니에게 감금되는 벌을 감수하며 지냈던 2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영원히 부모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신유나의 맹목적인 행복을 향한 잔혹한 행동들을 정당화시켰다.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전작에서는 악의 주인공들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듯이 진행되었다면, 이번 작품의 악인 신유나는 신유나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 그려진다. 신유나의 언니 신재인, 신유나의 전남편 서준영, 현남편 차은호, 그리고 신유나의 딸 서지유 혹은 차지유의 관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신유나가 딸 지유에 대한 태도나 준영과 은호의 대화에서 비춰지는 혹시나 이 여인이 범인일까 라는 의구심이 그렇게 강렬하게 들지는 않는다. 유나가 동거한 대학동기, 러시아의 애인, 아버지를 졸음 운전으로 죽게 만든 사람이 아니었을까에 대한 의심을 잠재울 만큼,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딸 지유의 관점에서 엄마 유나를 바라봤을 때 유나는 집착이 강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설마 그렇게 잔인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닐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나의 언니 재인과 서준영의 동생 민영의 만남과 은호가 대학동기 진우에게서 듣게 된 유나의 과거를 통해서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듯이 하나의 결론을 향하고 있었다. 재인과 은호는 자기들의 의심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무런 자구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유나의 산재물이 되기를 자처한다. 소설의 말미에 유나의 악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극의 절정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지유는 꿈이라 착각했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음이, 악몽을 꾸게 만들고 아빠 인형을 갖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각성하게 되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한다. 반달늪에서 벌어진 죽음을 앞둔 이들의 사투는 한 인간이 무책임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며 타인의 불행을 망각한 채 저지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서 얻은 결과라면, 우리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얼음 속에서 얼굴을 밖으로 내밀 수 없어 숨쉬지 못하는 누군가를 외면하는 잔인한 인간이 되어버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불시에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해올줄은 몰랐다. 사실을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고민한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머뭇대다 대답했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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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 맛, 향기, 빛깔에 스며든 인문주의의 역사
권은중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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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중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를 읽었다. 부제는 ‘맛, 향기, 빛깔에 스며든 인문주의의 역사’이다. 신간 검색을 하다가 ‘볼로냐’라는 제목을 보고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에 대한 여행 책자나 인문서적들은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정도를 다루고 있고, 근래에는 토스카나 지역이나 이탈리아 남부 지역 또는 시칠리아 섬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볼로냐’라니 정말 생소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볼로냐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제목에 붉은 길이 들어가 있고 표지 자체도 붉은 색으로 정한 것은 정말 볼로냐 도시의 첫 인상이 붉은 벽돌이 주는 강렬함 때문이다. 베로나에서 방학을 보내다 반복된 일상에 변주를 위해서 급 여행으로 결정한 곳이 유로스타를 타고 로마에서 베로나고 갈 때마다 지나쳤던 볼로냐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간이 걸려도 가격이 저렴한 표를 구매하려고 했더니 하필이면 sciopero(파업)가 있는 날이라 울며겨자먹기로 가장 비싼 표를 사고 덕분에 금방 볼로냐에 도착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당시 로마에서는 한 여름 거리의 Bar, Bistro, Ristorante 어디에서도 주홍색 빛깔의 음료가 들어간 와인잔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베네토주의 부자도시 베로나의 여름이면 어디에서든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주홍색 빛깔의 음료가 든 와인잔들 들고 있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 마주하게 된다. 그 음료의 이름은 Spritz aperol 인데 aperol 이라는 도수가 높은 술에 화이트 와인(이왕이면 탄산처럼 기포가 있는 spunmante-스파클링 와인)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의 일종이었다. 주홍색 빛깔이 난 이유는 aperol 이라는 술 때문이고, 다른 도수가 높은 술을 섞으면 색깔이 달라진다. 그런데 아마도 그 조합이 가장 맛이 괜찮았는지, 아니며 주홍색이 너무 예뻐서인지 대부분 그 술만 마신다. 나도 한 번 맛보고 나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빛깔과 맛이 주는 청량함에 푹 빠져 베로나에 오는 지인 누구에게나 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볼로냐 도착한 날 저녁에 베로나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젊은 청년들이 광장에 여기저기 모여서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Spritz aperol 이 맞기는 한데, 와인잔이 아니라 그냥 투명 플라스틱 잔에 마시고 있었다. 볼로냐가 대학의 도시라서 그런건가 싶어 나도 한 잔 주문하고 보니 역시나 평소에 마시던 가격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맛도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저자의 책에 자세히 언급된 볼로네제 파스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라구 소스가 들어간 파스타를 평소에 자주 접했음에도 볼로네제는 스파게티 면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역시나 저자의 설명처럼 이탈리아에 속한 각 주는 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주마다 도시마다 너무나도 상이한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주의 도시의 가보지 않고서는 그 지방의 특산 음식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저자의 에필로그에서 고백했듯이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렇게 강력히 볼로냐를 추천했음에도 누군가는 볼게 없다든지, 볼로네제 파스타보다 미트볼 슼파게티가 더 맛있다는 혹평을 들었다는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한식에 길들어진 입맛이 처음부터 단박에 파스타나 피자, 치즈, 프로슈토에 적응할 수는 없다. 얼죽아처럼 아메리카노만 죽도록 마시던 사람이 Bar의 banco(진열대)에 기대어 한 입에 털어넣는 에스프레소를 즐기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자의 책을 읽으며 천편일률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대도시의 관광지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탈리아를 너머 유럽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한 볼로냐라는 도시의 특색을 맛깔지게 소개한 책 덕분에 코로나에서 해방되면 첫 번째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향기의 정체인 프로슈토와 살루미를 맛보고 국물이 간절해지면 토르텔리니 만둣국을 한 사발 들이키고 볼로네제 파스타로 속을 든든하게 하여 뜨거운 햇살과 비를 가려줄 기나긴 회랑을 거쳐 산 위에 머문 성당에 가고 싶다. 해질녁이면 반드시 tagliere(도마) 한 상에 올려진 갖가지 햄과 올리브와 함께 람브루스코 와인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아침이든 오후든 Caffe terzi 에서 마로키노나 크레미노를 마셔봐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나는 볼로냐에서 이 수레바퀴의 무게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볼로냐는 제멋대로인 역사에 맞설 줄 아는 들풀처럼 강인한 사람들이 사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그 비결은 하늘의 뜻도 아니었고, 영민한 천재 혹은 어느 위대한 집단의 영도력도 아니었다. 그저 여럿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 방향을 보고 달려왔던 덕분이었다. 
그들은 역시의 수레바퀴가 자신을 짓밝고 지나가게 숨죽이며 기다리는 무른 땅이 아니라 그 수레바퀴가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도록 궤도를 놓을 줄 알았다. 가끔은 그 궤도가 짓이겨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볼로냐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궤도의 방향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놀라운 만큼 지혜로왔다. 
볼로냐는 강철된 된 무지개를 놓았다. 그 무지개는 볼로냐 대학과 에밀리아 모델로 부리는 협동조합뿐 아니라 람부르스코 와인,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 프로슈토와 모르타델라처럼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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