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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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을 읽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이기에 신비롭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무엇인가에 독창적인 힘을 불어넣는 것이기도 하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의 소설에 붙은 제목이 주는 힘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도 그렇고 이 소설집의 제목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한 번 듣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매력적인 제목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아이들', '너의 도큐먼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집으로 돌아오는 밤', '당신의 나라에서', '차이니스 위스퍼', '우리 집에 왜 왔니',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릴리', '사북(舍北)' 이렇게 10편이 실려 있다. [경애의 마음]을 읽고 저자가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첫 번째 소설집에 담긴 단편에도 인천을 배경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경애의 마음]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몰래 다니던 2층 호프집에서 불이나 많은 학생들이 죽은 사건이 나온다. 실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호프집 주인이 불이나 학생들이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봐 문을 걸어 잠궜다는 말에 광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에는 역시나 인천에서 유명한 사학재단 비리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금은 거주자 수가 많이 줄었고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지만 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열개의 학교가 몰려 있고 도시 학생 중 절반은 거쳐가던 거대한 왕국이었다.(219)"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한 곳에 많은 학교를 모아놓을 수 있었는지 설립초기의 배경부터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배경이나 소재에 실제로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나오면 잊고 지냈던 분노와 정의와 같은 낱말들이 떠오른다. 어째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그러한 사건들을 다시 접하면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시대를 관통하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가는 형이상학적 체증 때문일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이 되다보니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모호해지고 언제든 나 또한 그런 피해자가 될지 모르다는 두려움은 일상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혈연, 지연, 학연의 고리가 철퇴를 맞아도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러한 강력한 고리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구차한 일이 되고 주류를 이루는 계급에 편승되지 못하면 낙오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면에서 저자의 소설에 등장한 인생의 나락을 발 밑에 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소소히 견디며 구석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완전히 폭망하지도 그렇다고 재기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보이는 그런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공하고 주류를 이루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사는 삶이 비루해 보일지 몰라도 곳곳에 떨어진 작은 폭탄 파편 같은 위협들이 산재해도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내기에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김의 말은 내 뺨을 한대 올려붙이듯 지나갔다. 말투는 따뜻한 것도 차가울 것도 없었지만 센티멘털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무심하게 붙은 듯한 '하루' 이틀'에도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간의 날들과 결별은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크게 좋아질 건 없을 거라는 닳고 닳은 냉소였다. 나는 연민에서 센티멘털까지 말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86)"


""만화가들한테 사람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근육이란 주름이에요. 그게 표정을 만들거든요. 얼굴에는 슬픔의 근육이랑 기쁨의 근육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코의 옆부분에서 입의 가장자리를 지나 턱까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슬픔을 나타내는 근육이에요. 양치할 때 입을 벌리게 하는 근육이기도 하고요. 기쁨의 근육은 광대뼈 밑에 있는데 옆이 아니라 위로 움직여요. 이렇게 위로, 위로." M이 스케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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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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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현 사진작가의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어느 사진작가의 참전용사 기록 프로젝트]이다. 올해 초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에 출연한 라미 작가의 사연을 보게 되었다. 지난 몇 년 간 사비를 들여 전세계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사진 액자를 선물로 받은 어떤 참전용사가 비용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저자의 책 제목이기도 한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내용에는 눈물방울이 맺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의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읽게 되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의 시기를 보낸 세대는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표어와 포스터를 학기마다 제출해야 했고,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기념식 같은 것을 해마다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6월이 되어도, 6.25 당일이 되어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나 방송은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이제 전쟁을 겪은 세대는 대부분 고령의 어르신이 되셨다. 아직도 남과 북이 대치중이고 징병제가 지속되어 엄청난 국방비가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우리와는 아주 먼 일처럼 느끼고 살고 있다. 실제로 외국에 나가서 살다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굉장히 위험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곤 한다.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가 드물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시중으로 보이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은 너무나도 자주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심지어 북한의 도발이 일부 정치인들과의 협잡으로 악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연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잊을만 하면 선거때마다 등장하는 빨갱이 프레임은 남과 북의 교류에 커다란 장애물로 남아 있다. 이런 악순환의 연속으로 국정농단 사건 이후로 태극기 부대가 극단적인 시위에 태극기를 흔들며 군복을 입고 행진하는 어르신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세대의 갈등은 얄팍한 수를 가진 이들에게 농락당하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라미 작가님이 만나 전해주는 참전용사들의 각각의 사연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에게 자유의 시대를 열어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참전 용사분들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PTSD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한국 전쟁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저자와 같이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와 영국, 호주, 네덜란드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군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보며 저자가 말하려 했던 그들의 눈빛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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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 - 책상생활자의 최신유행 아포칼립스
심너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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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너울 작가의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를 읽었다. 저자의 이전 작품을 하나도 읽지 못했지만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에세이만 써온 무명의 작가가 아니라 소설을 발표했던 아주 젊은 소설가가 스스로 이런 제목을 용납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표지 그림은 꽤나 현실감 있게 절묘해 이야기 속 내용의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글쓰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처절한 자기 투쟁의 역사를 낱낱이 고백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것인가란 우려의 마음 또한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전해주는 꼰대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의 업데이트를 아주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기에 오히려 저자의 솔직함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칼럼에나 에세이 혹은 발표문을 작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 같은데, 바로 PC 화면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멍을 때리는 순간이다. 그러한 순간은 순백의 MS워드와 한글 프로그램의 화면에 글자로 가득 채워 프린터 명령어를 누르거나 첨부파일 메일을 보내는 시간이 닥쳐오기까지 나의 목을 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더군다나 글을 쓰는 사람인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소수의 천재적인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뇌의 시간을 충분히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닥달하고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워 한 방울의 수분까지 짜내어 나온 한 페이지가 쌓인 책이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동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연봉 2,500원 정도의 벌이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연봉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며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저 월세로 자신의 한 몸을 돌볼 정도 되는 수준이다. 그러니 저자의 목표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우리가 아무리 작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입에 발린 칭찬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쉽게 궁핍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효율성을 따지고 좀 더 생산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될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쉽게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오래 현인들의 가르침인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전통적인 이론을 가볍게 건너 뛰고 멀티태스킹을 즐기며 글쓰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는 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성인 ADHD를 극복해나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수단으로만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치유할 길로, 그리고 그 솔직한 고백을 읽는 이들에게 남들과는 다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자신감을 갖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특히나 저자가 전해주는 핫한 이슈거리들에 대한 해석은 좀처럼 포털뉴스 기사를 통해서도 접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소재들을 재미있으면서도 분석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곽재식 작가가 추천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SNS의 알고리즘 광고에 대한 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선을 일깨워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실력만 오르는 게 아니라 작품을 즐기는 식견, 감식안도 성장한다. 그 성장의 방시근 판이하게 다르다. 감식안은 전문적인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연속적으로 꾸준히 상승하는 듯하다. 반면에 실려근 불연속적인 계단형 그래프를 그리면서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온갖 고뇌를 곱씹다 보면 갑자기 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5년에 한 번쯤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감식안과 실력의 차이, 그 면적이 오롯한 질투와 고통으로 화한다. 나는 정말 훌륭한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데, 정작 그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물론 감식안은 항상 실력보다 더 높은 선을 유지하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40-41)"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고 혀는 몸을 토막 내는 칼'이라는 유명한 문구에서 틀린 구석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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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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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우리가 쓴 것]을 읽었다. ‘매화 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 이렇게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예전에 다른 단편집에 읽었던 소설이 몇 개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롭기도 하고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역시나 술술 잘 읽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꽝 울리는 부분들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을 당시만 해도 나중에 그렇게 큰 논쟁의 화두가 될지는 전혀 몰랐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온 재미있는 부분을 강론 시간에 전해주었을 때에 중년의 어머니들은 격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사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 뿐만 아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누릴 무렵,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만화로 더욱 신랄하게 젠더 문제에 대해 비판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보다 [며느라기]를 읽을 때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맞이하는 명절에는 더 이상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오기’에 나온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주 오랜시간이 관습처럼 지속되어 온 행위들에 대한 옳고 그름은 쉽사리 판단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양심에 털이 났냐?’,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라는 비난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아주 이상한 교육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단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함께 고민해왔었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론]이라는 책에서 양심의 양성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양심을 갖고 태어났지만 올바른 양심이 형성되도록 교육받지 못하다면 우리는 양심에 털난 행동을 하고도 뻔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근간으로 여성이 무산계급처럼 남성이라는 유산계급의 소유물처럼 인식된 헤게모니를 철폐하고자 시작된 것이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고, 계집아이라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소박을 맞고 살아온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를 내자는 당연한 목소리가 역차별이라는 맞대응을 소환해내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새로운 대립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첨예한 논쟁거리에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 수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이 모인 어느 공동체에서든 동성과 이성으로, 여러 세대를 걸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진심어린 환대만이 각 개개인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246)”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는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25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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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
손미나 지음 / 토네이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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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작가의 [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을 읽었다. 부제는 ‘언어적 자유를 위한 100일 프로젝트’이다. 그동안 저자가 써온 여행기를 모두 읽고 팬이 되었기에,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다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저자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고 싶어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학창시절부터 영어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지내왔기에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사람은 무조건 부러웠던 것 같다. 더군다나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해도 놀라운데, 서너개의 다른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나랑 뭐가 다를까 라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작년에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저자가 우리나라가 방역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스페인의 공영방송에서 인터뷰 하는 내용이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 저자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저자가 남모르게 외국어를 익히느라 보냈을 오랜 시간들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학원 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몇 번의 경험 밖에 되지 않지만, 그 몇 번의 경험이 모두 외국어를 위한 학원이었다. 제대를 하고 자발적으로 새벽 같이 일어나서 영어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다니다가 회화 시간만 되면 말을 걸까봐 두려워 그만 두게 되었다. 역시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말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오죽하면 예능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영어 울렁증일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나도 한 번 다시 도전해볼까라는 용기가 저 밑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책 날개에는 “결국 외국어 능력자가 된 사람들의 마인드셋을 이렇게 규정한다. 
1.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2. 외국어 공부에 필요한 연료는 폭발력이아니라 지속성임을 잊지 않는다.
3. 외국어를 배울 때 ‘듣기’와 ‘말하기’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다.
4. 외국어 능력자가 된 멋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5. 슬럼프가 올 때마다 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떠올린다. 

특히나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피헤갈 수 없는 딜레마들’ 부분에 나온 외국어 공부에 대한 슬럼프에 대한 설명이다.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느낌이다. 전과 다름없이 혹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실력이 좋아진 상태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거나 심지어 후퇴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아 신이 날라 치면, 그 타이밍을 노렸다는 듯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 하는 일이 생긴다. 갑자기 실력이 제자리에 멈추어 선 느낌이 들고, 대개의 경우 그 답답한 느낌이 적지 않은 시간이 지속되다가 도리어 실력이 퇴보하는 것 같은 짧은 침체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희한한 일은 바로 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면서 공부를 지속하면 거짓말처럼 눈에 띄게 실력이 급향상된다는 것이다.(84-85)”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는 명쾌한 설명이다. 유학 중에 수없이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들 중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언급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선생님과 원어민 친구와 교재가 있다 하더라고 결국은 꾸준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또 다른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저자 또한 가장 강조하고 있다. 외국어에 대한 로망이 나이가 들어도 사그러들지 않고, 작심삼일이 되어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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