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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 가죽의 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구병모 작가의 [바늘과 가죽의 시]를 읽었다. 몇년 전 보았던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의 김희성 역을 맡은 변요한 배우가 유진 초이에게도, 고애신에게도, 구동매에게도 같은 말을 반복하곤 했다. "나는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봄, 꽃 달." 실용주의, 유용성이 우세함은 심지어 가상 세계에서 만들어낸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실의에 빠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허세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봄날의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이라니, 달무리에 취해 쉼없이 걷는 밤산보라니 이런 것들로 우리 삶이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드라마의 희성 역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설정으로 더욱 더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 배우가 내뱉는 무용한 것들에 대한 사랑은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들려왔고,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은 무용한 것들을 직접 마주하고 싶은 열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동화의, 기담에서 유사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정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던 얀과 미아는 어느 순간 인간의 몸을 입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생이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다름 아닌 인간의 발을 감싸는 구두를 만드는 일이다. 수제화를 만드는 전문 용어들의 범람으로 간간히 검색을 통하느라 이야기의 진행이 더디기는 했지만, 얀이 이안의 이름으로 최후의 1인이 되어 명품 구두 가겪의 구두를 만드는 모습은 영생을 가진 이안의 신비로움에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안이 미아를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 안은 그저 전통을 고수하는 고집스러운 수제화를 만드는 장인이려니 생각되지만, 미아가 결혼을 앞둔 상태로 유진을 데리고 오자 안과 미아의 과거가 그려진다.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 처럼 저주인지 축복인지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을 갖게 된 이안은 10년에서 15년간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다가 소리없이 사라지거나 이주를 통해 유한한 인간과의 이별을 맞게 된다. 이안이 공방에서 연 교실의 수강생으로 만난 시인의 어머니가 이안이 오래 전 사랑의 고백을 듣고도 떠나야 했던 여인임을 기억해내는 모습은 못내 가슴아프게 그려진다.
"그녀 역시 그의 얼굴만 희미하게 남았을 뿐 이름은 알지 못하더라도, 이제는 안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괜찮다. 이 생에서 두 번을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녀의 사라져가는 시간을, 닳아져가는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주어야 한다는. 물을 머금어본 적 없이 방치되어 말라비틀어진 씨앗 같은 기억에, 이제라도 솜을 깔고 현재를 분무해주어야 한다는. 그 행위가 비록 무용하더라도, 씨앗을 간직해온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일이, 자신의 몫인 것만 같다.(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