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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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진 작가의 [올리앤더]를 읽었다. 올리앤더를 검색해보니 우리말로 '협죽도'라는 이름의 관목 또는 교목이라고 나온다. 왜 제목을 올리앤더로 정했을까 생각해본다. 주인공들의 전쟁터와 같은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지속된 산불로 재가 날리고 심각한 가뭄으로 정원가꾸기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황폐해진 잔디밭에서 올곧이 꽃을 피우는 굳건함 때문일까? 아니면 해솔, 클로이, 엘리와는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엄마의 목표를 비유한 것일까? 호주라는 남반구의 계절이 정반대의 땅에서 가장 예민한 고등학교 시기를 보내는 세 소녀의 이야기는 타국의 한인 이민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 DNA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를 고학력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는 어딜가서 사나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전세계에서 업무상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는 나라에 대한 동경은 대단하다. 유학을 간다고 하면 대부분 영어권의 나라가 대부분이고 이민 또한 비슷하다. 특히나 자녀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이제는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는 저 먼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렸기에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일타 강사가 있는 비싼 학원을 다녀야만 한다. 경제적 지원이 넉넉치 않다면 좋은 대학을 가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면 직장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사실 공부는 모두가 잘할 수 없고, 모두가 잘 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과 개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공부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급했듯이 학교 경비를 하던, 변호사를 하던, 다른 청소를 하던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딱히 차별을 받지 않는다면 애써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부모는 거의 없겠지만, 어쩌면 자녀의 귀에 대고 '너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는 말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은 해솔, 클로이, 엘리 이렇게 세 명의 고등학생 십대 소녀이다. 해솔은 한국에서 공부를 꽤나 잘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엄마의 재혼으로 인해 시드니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해솔은 클로이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동급생 클로이를 만나게 된다. 클로이는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릴 때 부모와 함께 호주로 이민을 온 1.5세대이다. 클로이의 부모는 다른 집 청소일을 하며 클로이가 의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뒷받침해준다. 문제아 엘리는 부모님이 유학생 비자로 머물며 호주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이렇게 호주에서 만난 세 명의 소녀는 어찌보면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호주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각 루트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생, 이민 2세대, 1.5세대. 


해마다 뉴스에서 전세계적으로 발생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다. 팬데믹 사태로 인해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도 증가하고 묻지마 폭려과도 같은 사태들이 반복되지만 마땅한 대비책은 준비되지 못한 현실이다.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아마 반드시 겪게 되는 미묘하게 기분 나쁜 그들의 표정과 행동은 타국살이의 설움을 가중시키곤 한다. 그럼에도 한 번 자리잡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각 나라별로 그룹을 만드는 것이나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유학생과 이민 세대로 또 다시 분화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숨겨지지 않는 차별과 배타적인 경계로부터 안위와 자유를 보장받기 싶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엄마들 또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해솔의 경우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재혼을 선택하고 해솔을 저 멀리 타국으로 보낸 이기적인 엄마로 그려진다. 클로이의 엄마는 클로이를 의대에 보내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고 경주마처럼 달린다. 클로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의대를 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기에 자신이 정말로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왜 의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클로이는 해솔의 등장으로 등수가 떨어지자 불안감을 느끼며 각성제를 복용하게 된다. 엘리의 엄마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주인집이 차고를 개조한 공간에 세들어 살며 엘리가 대학에 들어가 합법적인 비자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엘리의 학비와 호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엘리를 아주 어릴 시절부터 혼자 둘 수 밖에 없었던 엘리의 부모는 엘리가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알지 못한다. 극심한 외로움에 혼자인 엘리는 부유한 백인 아이들을 따르며 마약과 흡연과 음주를 일삼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학교에서 마약을 파는 셀러가 된다. 


이 세 소녀의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까? 부모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그리고 타국에 와서 고생을 하며 자식의 성공만을 위해서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뒷바라지를 하며 자식에게 성공이라는 부담을 지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빈번한 이러한 클리셰는 호주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조명되며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마약도 쉽게 구입이 가능한 곳에서 극도로 고조된 긴장을 탈피하기 위한 일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해솔과 클로이처럼 누가 입에 넣어줘도 절대로 마약을 할 수 없다고 거부할 것 같은 이들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한계에 이르렀을 때 결국은 스스로를 파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해솔과 클로이와 엘리는 저 먼 나라에 머무는 한정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종차별을 혐오하면서도 극심한 직업차별을 일삼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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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사라질 말들의 이야기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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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 작가의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사라질 말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의 첫머리를 읽을 때만 해도 요즘 많이 사용되는 신조어와 유행어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겠구나라는 기대와 더불어 나도 줄임말을 많이 알게되어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말아야지라는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유행어와 신조어가 생겨난 배경과 이런 말들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니 점점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대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존버, 금수저 흙수저, 플렉스, 취준생, 홧김비용, 가성비와 가심비, 비혼, 국룰, 뉴트로, 스불재, 밈, 워라밸, 인싸와 아싸, 사회적 거리두기, 손절, 많관부, 가짜뉴스, 뇌피셜, 틀딱, 맘충, 노키즈존, 휴거 엘사 빌거, 민식이법 놀이, 한남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도 많았지만 어설프게 알고 있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고, 전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처음 보는 말들도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이내 뜻을 알고 나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유행어와 신조어는 어쩌면 생존기간이 짧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라 없어질 말이기도 하다. 지금 젊은 세대를 칭하는 MZ가 사용하는 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지거나 촌스러운 말이 될 것이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어릴 때 썼던 말이 그랬듯이 말이다. 한때는 아재개그가 잘 통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라고 아재개그가 엄청난 반전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그런 식의 개그가 없었다면 그것 또한 신선함을 주었기 때문에 유행한 것이다. 책에는 없지만 지금은 소위 뭔가 놀랄만한 일을 듣거나 접했을 때 '대박'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대박이라는 말을 대체할 단어, 지금의 나의 놀란 감정을 대신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대박을 연신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듯 애 어린 할 것 없이 모두가 대박을 외친다. 이렇게 단어와 말의 다양성을 감퇴시키는 유행어는 그렇다 하더라도 책에 나온 유행어와 신조어들 중에 우리사회의 심각함을 드러내는 말들이 꽤나 많았다. 


존버, 금수저 흙수저, 플렉스, 홧김비용은 쳅터의 제목에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 시대의 자화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어가는 우리의 현실은 기존의 가치들을 붕괴시키고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을 돈으로 환원시키며, 경제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실패자로 내몰고 있다.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로 유명인들의 삶을 손쉽게 엿볼 수 있는 SNS가 있기에, 그들이 누리는 여유와 낭만을 맹목적으로 쫓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휴거, 엘사, 빌거에 담긴 뜻이 초등학생 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유명 메이커의 아파트인지, 아니면 임대 주택인지를 구별하며 원색적인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의 폭력은 우리사회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책에서 예로 든 유행어와 신조어 가운데 공통적인 문제점이자 이 시대의 큰 화두로 떠오른 주제가 있으니 바로 '차별'이다. 저자도 가장 마음 아파하며 심각함을 제시한 단어들은 틀딱, 맘충, 노키즈존 같은 말이다. 노인과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이 말들은 한 마디로 약자에 대한 군림의 뜻을 담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비하의 뜻이 담긴 말들의 강도가 세지는 것 같다. 틀니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담거나 '벌레 충'자를 덧붙이는 것은 새롭게 생겨난 신조어에 강렬함을 부과함과 동시에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선사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비상식적인 생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문을 갖지만 결론은 슬프게도 그들이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것은 자신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공감의 생겨날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린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의 유형을 아웃사이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명명하며 '아웃사이더 열풍'을 불러온 영국의 소설가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에서 아웃사이더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무도 병에 걸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이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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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일지도 몰라 - 배우 최희서의 진화하는 마음
최희서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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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서 배우의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읽었다. 부제는 "배우 최희서의 진화하는 마음"이다. 저자의 책이 나온지도 몰랐었는데, 얼마 전 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의 감상과 인용된 구절을 읽고 접하게 되었다.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이렇게 누군가 먼저 읽고 가이드를 해주니 너무 좋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분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내용이 좋았다. 많은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고 특히나 영화 [박열]의 일본 상영 후 관객들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은 덩달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다. 배우로서의 출발과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순간 그리고 연극의 연출과 배역과 영화의 단역을 거쳐 주연에 캐스팅 되기까지의 여정과 더불어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자신에 대하여 솔직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배우와 같은 연예인들의 책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더불어 에세이, 산문집을 출판하는 유명인들 또한 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그냥 어느 유명인의 성공담을 본 것 것에 그칠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산문집이지만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여정 중간에 주인공이 내뱉는 한계에 다다른 독백은 읽는 이로 하여금 나와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있던 곳에 나보다 먼저 혹은 조금 뒤늦게 머물렀던 이의 고백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했다.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에 올라오는 잊혀진 연예인의 생활고나 어려운 사정 등에 대한 뉴스에 흔히 ㅏ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고, 그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일반 사람들보다 형편이 나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 그렇게 유명이 된 사람은 일반 사람들과 계층이 달라진 계급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배우이자 유명인이라는 생각이 앞서지 않았다. 그저 연극과 영화를 사랑하고 어느 배역을 맡게 되면 극중 인물의 삶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 부단히 온 몸을 다해 노력하는 한 인간의 모습만 보였다. '이러 이러한 역경을 딛고 운 좋게 따낸 배역이 대박이 나서 월드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꿈을 쫓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달려갑시다'라는 상투적인 스토리가 없다. 그녀에게 닥친 행운과 우연이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행운과 우연을 통해서 영화란 결과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 만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나 영화 [아워바디]를 찍는 과정에 대한 내용 중에 7년이란 시간 동안 시험에 낙방하여 좌절감에 빠진 주인공이 우연히 달리는 사람을 발견하고 따라서 뛰게 되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어려움을 토로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일정부분 타고난 끼가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내가 전혀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애써 헤아려보려 한 들 가족의 짐이 된 듯한 열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용돈을 받지 않고서는 생활이 불가능한 고시생의 헛헛한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저자는 주인공이 시험 낙방으로 좌절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작정 달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그리고 저자가 가장 어려워했던 대목으로 묘사된 남산을 뛰어 오르다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11차례나 다시 촬영하며 지문에 설명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아쉽게 이전에 촬영된 컷으로 편집되었음을 소상히 알려준다. 자신 때문에 연장된 촬영 시간과 자기만을 바라보는 그 수많은 스태프들의 시선의 압박을 이겨내고 11테이크 만에 토할듯이 숨을 내쉬며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원하는 장면을 얻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 가장 빼어난 이 구절이 탄생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내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218-219)"


[아워바디]의 주인공처럼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모두 실패자와 낙오자로 부를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삶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무슨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우리 삶에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아무리 달려도 가닿을 수 없는 결승선을 바라봐야만 할 때 그럼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한계를 가진 나 자신을 단련하고 그 나약한 나를 감당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단련하고 감당해 낼 때 저자의 말처럼 아주 조금씩 조금씩 기적의 날과 순간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모든 성장과 변화에는 모슨과 불편함이 따른다. 가끔은 그 불편함 따위 모르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빗방울에 체육복이 젖어서 팔뚝에 달라붙어도 아랑곳하지 않던 시절이. 불편함이 아무렇지도 않던. 아니, 그저 노느라 비도 햇살도 바람도 변하는 계절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던 무구하던 시절이.(62)"


"들여다보고 싶어도 영영 볼 수 없을 뿌리에 막걸리를 콸콸 붓는다. 삽을 들어 두세 줌의 흙을 뿌린 후, 토닥토닥 삽 머리로 보듬는다. 무럭무럭 자라라. 가끔 떠올릴 거야, 어두운 곳에서 홀로 버티는 힘에 대해서. 

어둠은 차고 바람은 억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딘가에서 그 누군가는 지금도 버티고 서 있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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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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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사인스 보르고의 [스페인 여자의 딸]을 읽었다.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서 남미의 특이하고 고유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자주 접하곤 했다. 그곳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막연한 로망이 있지만 남미를 여행지로 택하기에는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여러가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 멀고 불안정한 치안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특히나 마약과 마피아에 얽힌 영화를 보게 되면 그러한 두려움은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남미의 문학을 접한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처음 읽는 베네수엘라 작가의 소설을 통해 뉴스를 통해서만 들어왔던 그곳의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따름이다.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너무 먼 사람들의 고통받는 이야기는 즉각적인 공감을 자아내기 힘든 것 같다. 특히나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그냥 혀를 차는 정도의 안타까움만 자아낼 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렇게 소설을 통해 나와 동시대의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떻게 지옥같은 나날들을 버티고 있는지 몰입해보는 시간은 공감의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요즘처럼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넘쳐나는 개인주의의 시대에 타인에 대한 생각과 배려를 마땅히 받아들이는 내면의 여유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억지로라도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머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내 이웃의 고통도 외면하는 매몰찬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은 1980년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배경으로 주인공 아델라이다 팔콘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베네수엘라가 전세계 원유 매장량 1위로 엄청난 부를 양산해 낼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을 갖고 있음에도 독재 정권의 무분별한 정책과 인센티브 남발로 엄청난 하이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아주 간단한 생필품조차도 몇 뭉치의 돈다발을 지불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상황이 극심해졌을 때에는 아예 지폐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해 물물교환과 같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달러나 유로와 같은 해외 화폐를 통해서만 몇배에서 몇십배의 가격 상승에 이른 생필품을 구입할 수 밖에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지옥불이 펼쳐진게 아닌가 싶다.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저자가 비유적으로 지명한 혁명의 아이들과 보안관과 같은 부류의 등장은 당시의 국민들이 아무런 공권력에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불한당 같은 무리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팔콘이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귀하게 여기던 스페인 산 식기를 쓰다듬으며 해가 진 이후에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거의 '나를 잡아잡수셔'와 같은 위험천만한 일임을 묘사한다. 밤이 되면 들려오는 총소리와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더불어 끊이지 않고 스며들어오는 최루탄 가스 냄새와 불에 탄 냄새는 어머니를 잃고 애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팔콘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보안관과 그의 명령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녀의 집을 버젓이 불법점거하고 있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팔콘은 이웃 사람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항거하려다 우연히 옆 집에 살던 아우로라 페랄타의 문을 열어보게 된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우로라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아델라이다는 그곳에서 보안관 무리의 동태를 살핀다. 아우로라의 시신을 옮기려다 포기하고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밖으로 내던지는 장면은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긴장감을 자아내며 도대체 시신을 그렇게 밖으로 내던지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광란의 상황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지상에 떨어진 아우로라의 시신을 불에 태우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아델라이다는 극적으로 상황을 마무리하지만 그곳에서 친구 아나의 동생 산티아고를 만나게 되고 정부에 끌려갔던 산티아고는 모진 고문을 받았던 이야기를 젆해준다. 


산티아고와의 함께 머무는 동안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의 방에 남겨진 앨범과 서류를 통해 자신이 이 불구덩이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이한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 불리던 아우로라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멀쩡했던 시기에 많은 유럽이민자들이 몰려왔고 아우로아의 어머니 또한 그렇게 카라카스에서 식당을 열어 스페인 음식과 베네수엘라 음식을 만들며 자리잡게 된다. 소설 속에서는 아우로라가 어떻게 사망한 것인지 나오지 않는다. 열살 차이가 나지만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의 신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아주 오래전에 방문하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마주하지 못한 마드리드의 친척들과 연락을 취해 베네수엘라를 탈출하고자 한다. 여권을 만들고 서류를 조작하는데 꽤 많은 돈을 쓰고 비행기표까지 예약한 아델라이다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간다. 대체 얼마나 열악하고 질서가 무너진 것인지 도둑이 도둑의 것을 훔치고 강도가 강도의 것을 빼앗는 상황이니, 묘지를 파헤쳐 시신과 함께 묻어둔 것을 훔치고 비석에 새겨진 것마저 떼어갔다는 것을 발견한다. 설마했던 일을 눈으로 확인한 아델라이다는 비참한 슬픔에 젖어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여자와 아이들 같이 약자를 유독 심하게 검문하는 이들은 오히려 코카인을 배달하는 이들이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고 뒷돈을 바라는 것처럼 행동한다. 여러가지 질문으로 긴장감에 휩싸인 아델라이다는 스페인 여권을 보여주고 검문하는 이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도와주어 가까스로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출발을 앞두고 아나에게 걸려온 전화는 산티아고가 마약을 소지한 채 총에 맞아 숨졌다는 비보를 전하며 끊긴다. 더 이상 연결이 되지 않는 통화는 아델라이다와 베네수엘라의 연결점이 끊기고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음을 알린다. 아델라이다가 아우로라의 시신을 유기하고 불에 태우고 신분증을 위조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아델라이다가 처한 상황이라면 그녀의 선택이 과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불한당에게 점령당하고 언제 어디서 폭행당할지, 가진 것을 다 빼앗길지, 혹은 팔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발견했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아델라이다가 아우로라의 집에서 유로를 찾는 순간부터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여권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엑스레이 검사를 하겠다는 말에 절대로 걸리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읽는 어느 독자라도 아델라이다를 응원하고 지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산다는 것, 아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자 죄책감이라는 이빨로 나를 물어뜯는 기적, 생존한다는 것은 도망치는 사람과 동행하는 공포의 일부이다. 누군가 당신보다 더 살 가치가 있었음을 알려주겠다고, 우리가 건강할 때 무너뜨릴 틈을 노리는 해충이다.(31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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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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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기자의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이다.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인터넷이 요즘처럼 상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종이 신문을 읽는 것이 지성인의 필수요건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당일 신문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를 논평한 사설을 읽는 것을 권장시켰다. 지금도 한자가 게재된 지면 신문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겨례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면 무척이나 반갑고 편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조사를 제외한 거의 중요한 단어들은 거의 다 한자로 병기했기에 옥편을 옆에 두지 않고는 사설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주제를 어렵게 서술한 깨알같은 글을 읽기 싫었는데 한자까지 찾아야 하니 그야말로 양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인터넷의 발달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니 보니, 지면으로 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희박해졌다. 예전에는 신문사에서 정한 순서에 따라 그날의 쟁점의 우선 순위가 정해졌다면, 이제는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이가 눈에 띄는 것을 클릭한 순서에 따라 중요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때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 순위가 항상 메인 화면에 떠 있을 때에는 상위에 올라간 주제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어도 기하급수적으로 관심도가 올라가 버렸다. 지면으로 된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읽는 사람이 적었던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뉴스 접속은 더욱 산발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보니 대체 뭐가 중요한 뉴스인지, 오늘 내가 읽은 기사가 정말로 정확하고 신뢰한 만한 것인지 의구심이 커져만 갔다. 


지면으로 된 신문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때에는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같은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어느 한 쪽의 의견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보다는 왜 이렇게 상반된 시각이 나온 것인지 견주어 볼 수 있었고,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신문사들은 좀 더 완성되고 수준 높은 기사를 게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포털 사이트에서 클릭한 기사가 어느 신문사에 속한 기자의 기사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오타가 심하거나(심지어 머릿말에서도) 비문을 접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이 들어 댓글을 확인해본다. 그런 여지없이 그 글을 쓴 기자에 대한 인신공격과 안 좋은 말들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오타와 비문들은 수정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야 지금처럼 변질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행간에 떠도는 말에 이제는 정규 방송의 뉴스나 신문보다는 유튜브를 봐야 제대로 된 뉴스를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유튜버의 실력과 노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과 동시에 회사처럼 정식으로 구성된 방송사와 신문사가 제대로 된 취재와 기사작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오늘도 몇 번이나 클릭했던 기사의 내용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이 기사는 또 어디에서 우라까이를 한 것일까란 의심부터 들었다. 어차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많은 품을 들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요즘 시대의 소모품처럼 소비되는 행태를 더욱 자극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분명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기사를 옳곧은 마음으로 쓰려는 분들이 있기에 기레기라는 말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우리나라 언론사의 심각한 병폐와 저널리즘의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지만, 저자가 취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읽다보니 소수와 약자들의 사연을 애써 외면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이목을 집중할 거대한 사건이 아닌 경우에 사람들의 시선은 금방 사그러들고 피해자들은 홀로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게 된다. 그들의 고독한 싸움과 투쟁은 그들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자신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들의 투쟁을 손쉽게 말한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해진 삶이라고 하지만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 구조 속에서 비참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되' 혹은 '그건 난 모르겠고' 라는 냉소적인 시선은 소외된 사람들을 패배감에 빠지도록 만들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마음은 자긍심을 놓치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의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으니 그대로 주저앉지 말라는 마음이 이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고 있다. 


"세상엔 억울함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매일 아침 메일함을 열 때마다 확인하는 제보들 중에서도 그런 억울함이 적지 않았지요. 억울함이란 위험한 감정입니다. 스스로 보기엔 부당한데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래서 해소할 수 없게 된 감정이 묵어서 억울함이 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억울함은 점점 단단해지다가 뜨거워집니다. 따로 해소할 방도가 없으니 파괴적으로 분출되기 쉽습니다. 상대를 부수지 못하면 나를 부수고, 끝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이 떠다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대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요. 

기자는 남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돌을 던질 수는 있지요. 그런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이란 얼마나 귀한가요.(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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