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적일지도 몰라 - 배우 최희서의 진화하는 마음
최희서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최희서 배우의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읽었다. 부제는 "배우 최희서의 진화하는 마음"이다. 저자의 책이 나온지도 몰랐었는데, 얼마 전 김소영 작가의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의 감상과 인용된 구절을 읽고 접하게 되었다.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이렇게 누군가 먼저 읽고 가이드를 해주니 너무 좋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분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내용이 좋았다. 많은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고 특히나 영화 [박열]의 일본 상영 후 관객들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은 덩달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다. 배우로서의 출발과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순간 그리고 연극의 연출과 배역과 영화의 단역을 거쳐 주연에 캐스팅 되기까지의 여정과 더불어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자신에 대하여 솔직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배우와 같은 연예인들의 책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더불어 에세이, 산문집을 출판하는 유명인들 또한 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그냥 어느 유명인의 성공담을 본 것 것에 그칠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산문집이지만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여정 중간에 주인공이 내뱉는 한계에 다다른 독백은 읽는 이로 하여금 나와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있던 곳에 나보다 먼저 혹은 조금 뒤늦게 머물렀던 이의 고백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했다.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에 올라오는 잊혀진 연예인의 생활고나 어려운 사정 등에 대한 뉴스에 흔히 ㅏ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고, 그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일반 사람들보다 형편이 나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 그렇게 유명이 된 사람은 일반 사람들과 계층이 달라진 계급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배우이자 유명인이라는 생각이 앞서지 않았다. 그저 연극과 영화를 사랑하고 어느 배역을 맡게 되면 극중 인물의 삶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 부단히 온 몸을 다해 노력하는 한 인간의 모습만 보였다. '이러 이러한 역경을 딛고 운 좋게 따낸 배역이 대박이 나서 월드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꿈을 쫓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달려갑시다'라는 상투적인 스토리가 없다. 그녀에게 닥친 행운과 우연이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행운과 우연을 통해서 영화란 결과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 만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나 영화 [아워바디]를 찍는 과정에 대한 내용 중에 7년이란 시간 동안 시험에 낙방하여 좌절감에 빠진 주인공이 우연히 달리는 사람을 발견하고 따라서 뛰게 되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어려움을 토로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일정부분 타고난 끼가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내가 전혀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애써 헤아려보려 한 들 가족의 짐이 된 듯한 열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용돈을 받지 않고서는 생활이 불가능한 고시생의 헛헛한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저자는 주인공이 시험 낙방으로 좌절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작정 달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그리고 저자가 가장 어려워했던 대목으로 묘사된 남산을 뛰어 오르다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11차례나 다시 촬영하며 지문에 설명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아쉽게 이전에 촬영된 컷으로 편집되었음을 소상히 알려준다. 자신 때문에 연장된 촬영 시간과 자기만을 바라보는 그 수많은 스태프들의 시선의 압박을 이겨내고 11테이크 만에 토할듯이 숨을 내쉬며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원하는 장면을 얻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 가장 빼어난 이 구절이 탄생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내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218-219)"
[아워바디]의 주인공처럼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모두 실패자와 낙오자로 부를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삶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무슨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우리 삶에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아무리 달려도 가닿을 수 없는 결승선을 바라봐야만 할 때 그럼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한계를 가진 나 자신을 단련하고 그 나약한 나를 감당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단련하고 감당해 낼 때 저자의 말처럼 아주 조금씩 조금씩 기적의 날과 순간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모든 성장과 변화에는 모슨과 불편함이 따른다. 가끔은 그 불편함 따위 모르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빗방울에 체육복이 젖어서 팔뚝에 달라붙어도 아랑곳하지 않던 시절이. 불편함이 아무렇지도 않던. 아니, 그저 노느라 비도 햇살도 바람도 변하는 계절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던 무구하던 시절이.(62)"
"들여다보고 싶어도 영영 볼 수 없을 뿌리에 막걸리를 콸콸 붓는다. 삽을 들어 두세 줌의 흙을 뿌린 후, 토닥토닥 삽 머리로 보듬는다. 무럭무럭 자라라. 가끔 떠올릴 거야, 어두운 곳에서 홀로 버티는 힘에 대해서.
어둠은 차고 바람은 억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딘가에서 그 누군가는 지금도 버티고 서 있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