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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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기자의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이다.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인터넷이 요즘처럼 상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종이 신문을 읽는 것이 지성인의 필수요건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당일 신문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를 논평한 사설을 읽는 것을 권장시켰다. 지금도 한자가 게재된 지면 신문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겨례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면 무척이나 반갑고 편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조사를 제외한 거의 중요한 단어들은 거의 다 한자로 병기했기에 옥편을 옆에 두지 않고는 사설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주제를 어렵게 서술한 깨알같은 글을 읽기 싫었는데 한자까지 찾아야 하니 그야말로 양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인터넷의 발달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니 보니, 지면으로 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희박해졌다. 예전에는 신문사에서 정한 순서에 따라 그날의 쟁점의 우선 순위가 정해졌다면, 이제는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이가 눈에 띄는 것을 클릭한 순서에 따라 중요도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때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 순위가 항상 메인 화면에 떠 있을 때에는 상위에 올라간 주제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어도 기하급수적으로 관심도가 올라가 버렸다. 지면으로 된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읽는 사람이 적었던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뉴스 접속은 더욱 산발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보니 대체 뭐가 중요한 뉴스인지, 오늘 내가 읽은 기사가 정말로 정확하고 신뢰한 만한 것인지 의구심이 커져만 갔다. 


지면으로 된 신문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때에는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같은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어느 한 쪽의 의견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보다는 왜 이렇게 상반된 시각이 나온 것인지 견주어 볼 수 있었고,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신문사들은 좀 더 완성되고 수준 높은 기사를 게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포털 사이트에서 클릭한 기사가 어느 신문사에 속한 기자의 기사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오타가 심하거나(심지어 머릿말에서도) 비문을 접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이 들어 댓글을 확인해본다. 그런 여지없이 그 글을 쓴 기자에 대한 인신공격과 안 좋은 말들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오타와 비문들은 수정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야 지금처럼 변질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행간에 떠도는 말에 이제는 정규 방송의 뉴스나 신문보다는 유튜브를 봐야 제대로 된 뉴스를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유튜버의 실력과 노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과 동시에 회사처럼 정식으로 구성된 방송사와 신문사가 제대로 된 취재와 기사작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오늘도 몇 번이나 클릭했던 기사의 내용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이 기사는 또 어디에서 우라까이를 한 것일까란 의심부터 들었다. 어차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많은 품을 들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요즘 시대의 소모품처럼 소비되는 행태를 더욱 자극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분명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기사를 옳곧은 마음으로 쓰려는 분들이 있기에 기레기라는 말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우리나라 언론사의 심각한 병폐와 저널리즘의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지만, 저자가 취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읽다보니 소수와 약자들의 사연을 애써 외면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이목을 집중할 거대한 사건이 아닌 경우에 사람들의 시선은 금방 사그러들고 피해자들은 홀로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게 된다. 그들의 고독한 싸움과 투쟁은 그들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자신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들의 투쟁을 손쉽게 말한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해진 삶이라고 하지만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 구조 속에서 비참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되' 혹은 '그건 난 모르겠고' 라는 냉소적인 시선은 소외된 사람들을 패배감에 빠지도록 만들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마음은 자긍심을 놓치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의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으니 그대로 주저앉지 말라는 마음이 이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고 있다. 


"세상엔 억울함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매일 아침 메일함을 열 때마다 확인하는 제보들 중에서도 그런 억울함이 적지 않았지요. 억울함이란 위험한 감정입니다. 스스로 보기엔 부당한데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래서 해소할 수 없게 된 감정이 묵어서 억울함이 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억울함은 점점 단단해지다가 뜨거워집니다. 따로 해소할 방도가 없으니 파괴적으로 분출되기 쉽습니다. 상대를 부수지 못하면 나를 부수고, 끝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이 떠다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대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요. 

기자는 남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돌을 던질 수는 있지요. 그런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이란 얼마나 귀한가요.(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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