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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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몫’, ‘일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전에 다른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들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수록된 소설들이 다 좋았다. 이런 주옥같은 단편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얼마나 긴 시간을 고뇌하며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기에 페이지가 휘리릭 빨리 넘어갈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읽으면 안되는데, 한 문장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야 하는데 주인공들의 마음이 못내 궁금해져서 한치도 머물지 못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야기는 끝이 나 있었다. 한 편의 이야기들이 끝날 때마다 뭔가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하나씩 생기는 것처럼 휑덩그렁한 느낌이 들어, 새로운 제목으로 기다리는 이야기에 선뜻 다가설 수 없었다. 분명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텐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동시대의 삶을 살아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단편들의 주인공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읽고 나면 한결같이 쓸쓸했다. 우리 내 삶이 이렇게 쓸쓸하고 안쓰럽기만 하다면 대체 다들 어떻게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다보면 서글픔이 밀려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극복하는 것이 과연 의미있을까란 무력함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단 한 발자국도 도저히 내딛을 수 없을 것만 같고, 단 하루도 더 이상 숨쉴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한 발자국을 내딛고 하루를 살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길에 몸을 웅크려 고개를 숙이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얼핏봐도 엣되보이는데, 술에 취한 것인지 조금은 위태롭게 보였다. 다가가서 괜찮냐고 물어보려다가 아직 한밤중도 아니고 외진 곳도 아니기에 별일 없겠지란 마음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걸으면서 행여나 복잡한 상황에 휘말릴까 두려워 도움을 주기를 주저한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 찰나에 노숙자에게 다가서는 젊은 두 청년을 보게 되었다. 아웃리치라는 글자가 새겨진 노란 조끼를 입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사이를 뚫고 나오는 작은 리어카가 보였다. 많지 않은 폐지와 빈 박스 몇 개를 실은 리어카를 가냘픈 몸의 할머니가 끌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초저녁 잠이 많다고들 하는데, 이미 예전에 초저녁 잠이 많은 나이에 이르렀을 분이 한낯의 더위를 피하고자 하심인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폐지를 수집하고 계셨다. 리어카를 끄는 작은 몸의 할머니는 그렇게 나를 지나쳐 갔다. 


우리는 사실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괜찮냐고? 힘들지 않냐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지나가는 말일수도 있지만 그 질문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별 생각없이 예의상 물어본 말에 오랜시간 침묵을 지켜온 이들이 봇물 터지듯이 그동안의 애환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 우리가 책을 읽고 만나지 못한 세상의 많은 이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괜찮냐’는 말을 건넬 용기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들였음에도 무심히 그들을 지나친 나의 발걸음은 과연 그동안 모아온 나의 지식과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고 따진다. 그래서 그런지 ‘몫’에서 희영의 말은 수치심을 증폭시킨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79)” 

양경언 평론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희영은 해진에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읽고 쓰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지난한 과정이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 역시 휘발되어버리기 쉽다고 전한다.(330)”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사회적 이슈들이 정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좌우의 이념적 프레임을 덧씌워 옳고 그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찌보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의식있는 척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삶이라는 긴 시간을 영위하는 몸뚱아리가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지켜볼 때 큰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조각조각의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지루할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43)”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115)”


#최은영 #아주희미한빛으로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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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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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재 작가의 [탱크]를 읽었다.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었던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고, '탱크'라는 짧은 제목이 주는 강렬함과 궁금증이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기에 충분했다. 우선 소설 속에 나오는 '탱크'는 가장 대표적인 뜻인 전쟁 중에 쓰이는 무기인 탱크와는 무관하며, 에어탱크, 물탱크처럼 무엇인가를 저장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래서 이 '탱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컨테이너를 지칭한다. '탱크'의 실질적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탱크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탱크가 컨테이너라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소설 속에 중요한 공간인 탱크를 중심으로 연결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종교와는 무관하지만 믿음이라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귀결된다. 첫 등장인물로 나오는 도선은 우연한 계기에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을 받지만 그 이후에는 이러타 할 작품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원래 그런 재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억수로 좋아서 첫 번째 시나리오가 영화화까지 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도선은 영어 학원에서 만난 제임스와 사랑에 빠지고 제임스의 나라에 가서 살며 로사까지 낳고 이혼하기까지 기나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딸 로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에 다다르자 도선의 무력한 육신은 잠에서 깨어나 실체적 고통과 마주하게 되고 어떻게든 성공해서 로사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도선의 꿈과 희망은 탱크라는 특정한 공간의 기도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하게 된다. 


사실 탱크는 어떤 면에서 종교적 공간으로도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력을 불리는 사이비적인 의식 공간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산 중턱의 어느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진 탱크라는 이름의 컨테이너는 비밀스런 조직처럼 은밀하게 방문 예약이 이루어지고 탱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정해진 규칙이 종용되며 그곳을 방문한 이들은 홀로 어둠 속에서 기도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탱크를 방문하고 기도했던 이들은 탱크가 가진 영험함을 믿게 되고, 은밀하게 퍼진 소문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에게는 탱크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탱크를 도입하고 유지 관리하는 황영경은 탱크에서는 어떤 특별한 예식도 없고 지도자도 없으며 특정한 교리도 없기에 종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탱크가 사이비 종교의 시발점이 광신도를 양산해 낼지 모른다는 우려는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탱크를 방문한 사람들은 홀로 짙은 어둠 속에서 그저 혼자 머물다 나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도선을 시작으로 탱크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가는 가운데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양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범한 공장 직원인 양우는 동료들에게 이런 사람으로 비춰진다. "그러니 너도 사람들이 큰일로 여기는 것을 큰일로 여겨라,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라, 이 작업보다 더 중요한 자신만의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도,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그만두어라(39-40)"라는 양우를 챙기는 두수 씨의 말. 이런 양우에게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온 둡둡은 마테라 라는 가보지도 못한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마을을 매개체로 가까워지고 연인이 된다. 동성 연인이라는 둡둡이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떠나서 양우와 둡둡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 


탱크라는 공간을 통해서 믿음을 키우고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이들은 머나먼 외계에 사는 희귀종이 아니라 그냥 내 옆에 있거나 때론 나일 수도 있는 부류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등장한 도선과 양우와 둡둡, 그리고 손부경과 황영경을 이해하고 그들을 응원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이들을 한 명이라도 마주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최대한의 인심을 써서, 아량을 베풀어야 두수 씨 정도의 애정어린 말을 해 주는 것이 다가 아닐까? 그렇다면 양우와 둡둡처럼 소수로 남을 그리고 탱크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옥에서까지 탱크를 되살리고자 하는 황영경은 누구에게 이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종교적 신념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도 몰락에 빠지게도 만든다. 절대적 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믿음의 항로가 이탈한 이들을 마음껏 매도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묶여진 삶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려온 감언으로 인해 익숙해진 무한 경쟁과 자본주의 틀은 누군가 도태되어야지만 내가 그 위에 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고, 소수로 지정된 이들은 언제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을 정당화 한다. 결국 탱크라는 희망의 동아줄에 목매인 사람들은 두 번이나 발생한 야산의 불로 성찰의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도선과 양우는 탱크라는 공간에서 떠나간 둡둡을 통해 서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둡둡의 아버지 강규산이 아들의 부재가 가져온 고통을 매일매일 감내하며 아들과 함께 보았던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되돌려보는 모습은 못내 안타깝고, 둡둡 또한 마테라를 가보지 않았음에도 양우에게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줄줄 읊어 댈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화를 보던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시간을 몹시도 그리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더 서글퍼진다. 


"결국 떠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회자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그뿐이다.(162)"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261)"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267)"


#김희재 #탱크 #제28회한겨레문학상수상작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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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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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식물적 낙관]을 읽었다. 이전의 에세이를 통해서 그리고 SNS를 통해서 저자가 식물 집사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식물을 돌보는 이야기의 책까지 낼 정도로 매니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식물이라는 명사에 형용사형인 접미어를 붙인 제목은 이 에세이에 담긴 식물의 생태를 통해 관조한 인간 삶의 낙관적 자세를 이끌어내고 있다. 지금 앉아 있는 책상의 한 귀퉁이에도 선물 받은지 1년이 넘은 그래서 이름도 까먹은 식물 하나가 물이 가득한 유리 화분에서 신기하게도 잘 견디고 있지만, 화초나 꽃을 키우는 데에는 영 관심이 없던 나에게 저자의 에세이는 새로운 환기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장군이를 떠나보내고 저자의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토로한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잠시 눈을 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중한 존재의 상실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과 실제로 겪어 보는 거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아무리 설명하고 대체하려고 해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갑자기 눈 주위의 열기가 느껴지며 시야가 흐릿해지며 요통치는 감정이 밀려올 때면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란 무력함과 더불어 염세적인 생각에만 머물게 만든다.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시간의 연속은 그동안 부단히 쌓아왔던 일과 관계들의 모라또리움을 선언하며 자꾸만 빈 구석으로 나를 몰아가는 것만 같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진다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라지만 아주 짙은 슬픔의 물감에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지며 옅어지도록 만드는 희망과 낙관의 시간들이 과연 나에게도 올 것인지 아직은 두렵기만 하다. 마음이 몹시도 힘들고 울쩍한 밤을 보내다 애써 페이지를 넘기며 집중하던 차에 '우리들의 세컨드 스텝' 부분을 읽게 되었다.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삼촌을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에 무슨 감정이 일었다 사라지는지, 완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의사로부터 매번 확인하고 내려가는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없이 슬프고 아프기만 한지, 아니면 엄마가 살아온 세월 동안 반복된 그 무수한 내일들 덕분에 실버 라이닝 같은 희망과 낙관이 빛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엄마를 지켜보며 나 역시 맞게 될 몇십 년 후의 일상에 대해 어렴풋이 배워갈 뿐이다.(95-96)"

그리고 저자가 장군에게 씌워주고 싶은 작은 화관을 찾다가 뭐에 쓸거냐는 말에 주저하는 가운데 엄마는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의도를 설명한다. 

"내가 아는 한 식물들의 세컨드 스템은 아주 적절한 거리 속에 유지된다. 순 하나가 올라왔다고 원줄기가 도태되지 않고 원줄기가 새로 나온 순을 경계하여 고사시키는 일도 없다. 그렇게 조용히 각자의 다음 스텝에만 충실한 식물들은 때론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진행 방향을 알고 있는 듯 느껴지곤 한다. 그다음에 대해 숙고하고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자 영역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자라난다. 

내일부터 엄마에 대한 걱정은 조금씩 덜기로 한다.(97)" 


상실의 경험은 마치 트라우마처럼 남아 또 다시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낸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것을 내가 조율하고 싶은 전에 없던 욕구가 강렬히 밀려오고,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위기가 감지될 때에는 불안함에 휩싸여 어서 빨리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내가 아무리 바둥거려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깨다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세컨드 스텝'에 나온 내용들은 마치 하느님이 내 마음을 그동안 쉼없이 지켜보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삶에서 겪어내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은 결국은 소멸이라는 귀결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에 각자가 짊어져야 할 몫과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나의 세컨드 스텝은 소중한 나의 또 다른 줄기를 향해 지속적인 응원과 애정어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희망과 낙관으로 나의 슬픔은 어느덧 엿어지고 비슷한 일을 겪게 될 누군가에게 새로운 스텝을 밝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원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이란 생활의 잔류물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기억의 톤, 감정, 의미를 환기하며 글을 쓰는 게 내 일이고 그 환기의 힘으로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나가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기억 모두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혹시 어느 면에서는 그 역시 '호더적' 패턴이 아닐까. 마침내 기억과 추억은 구분해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추억하는 것은 좀더 주체적인, 단순한 환기에서 더 나아간 의지적 행위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식물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147)"


"<내 정원의 붉은 열매>의 '나'는 서로에 대한 열정적 오해 속에 결국 사이가 멀어진 사람들에 대해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203)"


#김금희 #식물적낙관 #문학동네 #0759번째저자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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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3 세트 - 전3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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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 1-3]를 읽었다. 띠지에 적힌 ‘필생을 건 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닐까 선뜻 2권에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사료를 연구하고 인터뷰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익명으로 존재했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시름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사멸했을 것이라는 결말로 지나온 공동체의 삶을 치부해버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억울함과 같은 슬픔을 토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익명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야기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되고 외국여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는 조금은 뻔뻔한 말이다. 해외여행이 원활해지기 전까지는 신혼여행지로 그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그리고 이제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잠깐 가서 쉬다 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어쩌면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고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는 얄미운 상대처럼 ’외국 못가니까 제주도라도 가야지’ 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대로 말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제2공항 건설, 비자림 2차 공사와 같은 찬반 논쟁을 방관자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제주도우다]는 단지 제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되었을 때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제주의 4.3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하지 않는 영미의 할아버지 창세를 설득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창세는 손주 부부에게 왜 그 사건을 말하기를 거부하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자신은 4.3사건에 묶여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전의 제주도의 설화와 조선 후기에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 금지의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민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준다. 영미 할아버지의 진술은 1부 부터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뀌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제주도민들의 팍팍한 삶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추천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아마도 2권에서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자세히 묘사될 것 같은데, 1권에서는 일제치하의 제주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일본 순사와 지도층에 빌붙은 친일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지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중요한 시기를 미군정으로 인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창세와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소학교 동기인 행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유쾌한 장면들로 배치해 마음이 너무 가라앉지 않고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행필이 짝사랑하는 두 살의 연상인 해녀 숙희를 향한 순애보는 창세가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무리에서 행필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독하는 장면에서 일본의 압제로 경직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억지스러운 공출과 공납으로 제대로 배를 채울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마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곳에 뗏장을 나르는 일로 차출되고, 언제 어디서든 쥐새끼 같은 밀정이 들을까 험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창세와 행필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된 청년들은 일본 본토의 여러 지역과 전쟁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곳으로 강제 징용과 징병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커다란 여객선마저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게 된다. 


분명 지옥같은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어느덧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지금처럼 연락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이기에 몇날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이 패망하였을 알고 조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생각같아서는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 쿠데타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 일본군과 친일을 일삼던 이들을 단숨에 처단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몇십년 동안 지속된 일제의 폭압의 공포에 짓눌린 많은 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뜻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기에 당시에 지식인층이었던 이들이 일본군과 친일파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당시 지역의 관습법으로 추방하는 것에 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징벌이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칠만이나 되었다고 나오는데 패망 이후에도 미국이 올 때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은 미군에 의해 무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폐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뭔가 개운치 않은 제대로 된 판정이 아닌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이 패망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군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도민들에게 빼앗은 군량미를 놔두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에서는 불에 타는 곡식을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와 허탈함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성공에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성취가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장에 모인 조천리 주민들은 항일 운동을 했던 청장년들의 감격스러운 인사말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자는 말로 ‘조선 해방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된다. 몇 백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1권의 말미에 창세와 행필이 아무 이유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서 ‘조선 해방 만세’라는 말을 반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니는 행복한 장면은 그냥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창세 할아버지는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후부터 만옥은 그 웅변 내용 중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대목만 빼내어 또래와 애기할 때 버릇처럼 /끼워넣곤 했다. ‘야, 염숙아,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물때가 되었져! 어서 바당에 가자.’ ‘야, 따알리아야, 오늘 밤 우리 집에 안 올래?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나와 같이 뜨개질하기 어떠냐?’ 하는 식이었다.(62)”


근래에 들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활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4.3으로 희생된 분들의 발자취를 하얗게 내린 눈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거둬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한없는 무력함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제주도의 4.3사건을 알게 된 후 정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당시의 상황이 담긴 몇 권의 소설을 읽었었다. 잔혹한 처형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고 그들의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는지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보려 했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서청이라는 불한당 같은 단체와 미군정의 용인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욕심으로 벌어진 참혹한 일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서술된 조천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양민 학살의 전모를 따라가다보니 악마와도 같았던 친일파의 무리들과 서북청년단의 모습은 인간 본성에 담긴 추악한 면모를 단 하나의 얇은 장막도 없이 완전히 드러낸 것이기에, 언제든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쳐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염치와 양심을 내버린 채 얼마나 더 이기적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작품은 비단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뼈아픈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독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발생되면 단순히 군인들이 총과 칼로 서로를 죽이는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이요, 민간인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은데 그것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의 광기가 극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팔렴치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데, 바로 점령한 곳의 주민들을 잔혹하게 처형해 본을 보이거나 여성과 아이들을 전리품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점령을 당한 이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고 시간이 아무리 흐린다 해도 그때의 모욕과 치욕스러운 과거는 지워지지 않고 또 다른 재앙의 사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제주도의 4.3 사건을 들여다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아니 지들이 뭔데 남에 나라에 와서 3.8선을 마음대로 그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심지어 일제치하에 부역했던 기회주의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혼란을 가중시키며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도록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일제치하와 동일한 강제공출과 양과자 강매와도 같은 사건들은 자유 민주주의를 토대로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대의 명분을 삼았던 미국에게 우리나라는 그저 힘없고 수탈하기 좋은 대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앞으로도 지속될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되는데,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웹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면 4.3 사건과 관련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설명 첫 줄에 독립운동가라는 설명이 부제처럼 붙어있다. 제주도의 양민을 폭도로, 빨갱이로 치부하고 무조건 척결할 것을 명령한 이들이 어떻게 독립운동가이고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말인가? 


읽는 내내 가장 크게 의문이 들었던 것은 서북청년단과 내륙에서 파견된 경찰들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고 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란 점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북에서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다 고향 땅을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상에 물든 이들이 제주도에 가득하다는 말에 넘어가 그들을 숙청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을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바보가 아니고서는 막상 마주한 제주도의 그 수많은 양민들을 빨갱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에 물든 이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게 되고 자기들이 무슨 절대권력을 가진 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도취되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도 묘사되지만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토벌대 중의 한 명은 학살의 참혹함에 몸서리치다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4.3 사건을 계기로 학살된 수많은 제주도의 젊은 청년들과 그의 가족들과 관련된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끔찍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혹시 가해자에 해당되는 토벌대의 이들 중에도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불우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나중에는 생과 사를 결정짓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잔혹하게 죽이는 야만성을 드러냈던 순간 때문에 괴로워하다 삶을 마감했을까? 


전세계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졌던 장소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역사관을 조성하고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면 당시의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이들조차 생을 마감하고 그저 과거 역사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철저한 교육과 반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시금 그런 과오를 반복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이다. 요즘 들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인다. 사실 전세계의 유명한 고적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냥 태평성대를 이룬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어딜 가던지 인간이 머물던 장소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본성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금 조명하고 가슴 아프게 재생시키며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얼마전 제주를 방문했을 때 함덕 해수욕장의 한가로운 풍경이 떠오르며 소설의 주인공 창세가 레포로서 산군의 지도부에 비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달래게 뛰었을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견뎌낸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제주의 비경을 즐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어떤 진실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은 누군가의 한숨이 되고 슬픔이 되고 한이 되어 대대손손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제주 사람 현기영은 제주의 입이다. 제주의 말이다. 1978년, 그의 소설을 통해 누구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4.3의 한순간이 세상에 드러났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할 줄, 그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제주의 한을 더는 참을 수 없었으리라. 제주 인구 십 분의 일 이상이 죽음을 당한 4.3 사건의 토벌대 최고 지휘관 로스웰 브라운은 말했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혹은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로, 귀 막고 입 닫은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죽은 자의 아우성이 바람이 되어 휩쓸고 다니는 제주에서 살아남았어도 이미 죽은 제주 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을 여행자의 들뜬 웃음으로 짓밟았던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3권 표지 뒷면-정지아 소설가)”


#현기영 #제주도우다1-3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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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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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1]을 읽었다. 띠지에 적힌 ‘필생을 건 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닐까 선뜻 2권에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사료를 연구하고 인터뷰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익명으로 존재했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시름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사멸했을 것이라는 결말로 지나온 공동체의 삶을 치부해버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억울함과 같은 슬픔을 토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익명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야기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되고 외국여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는 조금은 뻔뻔한 말이다. 해외여행이 원활해지기 전까지는 신혼여행지로 그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그리고 이제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잠깐 가서 쉬다 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어쩌면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고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는 얄미운 상대처럼 ’외국 못가니까 제주도라도 가야지’ 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대로 말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제2공항 건설, 비자림 2차 공사와 같은 찬반 논쟁을 방관자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제주도우다]는 단지 제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되었을 때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제주의 4.3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하지 않는 영미의 할아버지 창세를 설득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창세는 손주 부부에게 왜 그 사건을 말하기를 거부하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자신은 4.3사건에 묶여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전의 제주도의 설화와 조선 후기에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 금지의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민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준다. 영미 할아버지의 진술은 1부 부터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뀌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제주도민들의 팍팍한 삶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추천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아마도 2권에서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자세히 묘사될 것 같은데, 1권에서는 일제치하의 제주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일본 순사와 지도층에 빌붙은 친일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지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중요한 시기를 미군정으로 인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창세와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소학교 동기인 행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유쾌한 장면들로 배치해 마음이 너무 가라앉지 않고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행필이 짝사랑하는 두 살의 연상인 해녀 숙희를 향한 순애보는 창세가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무리에서 행필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독하는 장면에서 일본의 압제로 경직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억지스러운 공출과 공납으로 제대로 배를 채울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마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곳에 뗏장을 나르는 일로 차출되고, 언제 어디서든 쥐새끼 같은 밀정이 들을까 험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창세와 행필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된 청년들은 일본 본토의 여러 지역과 전쟁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곳으로 강제 징용과 징병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커다란 여객선마저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게 된다. 


분명 지옥같은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어느덧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지금처럼 연락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이기에 몇날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이 패망하였을 알고 조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생각같아서는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 쿠데타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 일본군과 친일을 일삼던 이들을 단숨에 처단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몇십년 동안 지속된 일제의 폭압의 공포에 짓눌린 많은 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뜻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기에 당시에 지식인층이었던 이들이 일본군과 친일파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당시 지역의 관습법으로 추방하는 것에 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징벌이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칠만이나 되었다고 나오는데 패망 이후에도 미국이 올 때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은 미군에 의해 무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폐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뭔가 개운치 않은 제대로 된 판정이 아닌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이 패망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군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도민들에게 빼앗은 군량미를 놔두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에서는 불에 타는 곡식을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와 허탈함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성공에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성취가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장에 모인 조천리 주민들은 항일 운동을 했던 청장년들의 감격스러운 인사말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자는 말로 ‘조선 해방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된다. 몇 백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1권의 말미에 창세와 행필이 아무 이유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서 ‘조선 해방 만세’라는 말을 반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니는 행복한 장면은 그냥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창세 할아버지는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후부터 만옥은 그 웅변 내용 중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대목만 빼내어 또래와 애기할 때 버릇처럼 /끼워넣곤 했다. ‘야, 염숙아,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물때가 되었져! 어서 바당에 가자.’ ‘야, 따알리아야, 오늘 밤 우리 집에 안 올래?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나와 같이 뜨개질하기 어떠냐?’ 하는 식이었다.(62)”


#현기영 #제주도우다1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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