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도서관 - 황경신의 이야기노트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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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 반짝반짝 변주곡 등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 황경신 작가의 신작 '국경의 도서관'은 '초콜릿 우체국'의 두 번째 이야기다. 황경신 작가의 책은 나름 여러 권 읽었는데 초콜릿 우체국은 읽지 못하고 '국경의 도서관'을 접했지만 서른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책장을 술술 넘어가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한 편 한 편이 다 인상 깊지만 그 중에서 몇 편을 이야기는 책을 덮고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 '바나나 리브즈'는 다른 사람의 여행을 대신 해주는 직업을 가진 여자가 아무 조건을 내 놓지 않은 감독의 부탁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비행기 안에서 오래전 잠깐 여행에서 만난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기른 아이가 벌써 열두 살이나 된 남자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눈다. 화자는 의뢰인으로부터 여행지의 느낌을 단어로 말해 해주기로 했는데  감독은 자신이 원한 컨셉트를 잡았다며 화자에게 자유로이 여행을 권한다. 다른 사람의 여행을 대신 해준다는 직업이 흥미롭게 느껴졌으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갑자기 자신도 모르던 열두 살 아들이 있다는 남자의 이야기에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삶도 있구나 싶다.


수시로 여행 가방을 싸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너무 많은 구두 너무 많은 계단'... 여자의 가방 안에 구두가 다섯 켤레나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의자를 ⁠만들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자가 쉴 수 있게 해주는 두 사람만의 사랑의 방식을 풀어 놓은 이야기가 흥미롭다. 떠나도 항상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다기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헌데 로미오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로렌스 신부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죽음의 묘약을 먹고 잠들어 있으려고 했던 줄리엣이 유언장을 남긴 '줄리엣의 유언'... 무엇보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을 맞는 사랑에 빠진 줄리엣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불안감에 휩싸여 약을 먹으려는 그때 혹시나 잘못되어 죽는다는 전제로 유언장을 작성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그 나이와 줄리엣이 처한 상황과 심정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어 인상 깊다.


불멸의 작가 괴테의 대표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지만 그가 죽으며 깊은 상처를 갖게 된 로테의 심정을 담은 '베르테르의 순정에 대한 로테의 입장'⁠을 읽으며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사랑이란 것이 서로 원할 때 느끼는 감정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베르테르의 죽음 후 로테와 남편은 틈이 벌어진다. 베르테르의 아기를 임신한 B양과 찾아와 함께 살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갖는다. B양이 아이를 낳고 베르테르란 이름을 붙이며 사랑을 쏟으며 진짜 행복이란 것을 느끼며 산다. B과가 로테가 마지막 의식과 같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없애는 과정에서 남편과 베르테르가 돌아온다. 무엇보다 로테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짧지만 진솔하며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무엇인지 이야기 하는 대목에 공감이 간다. 


이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딱 한 번이지만 살 수 있다면 난 어떤 마음을 살까? 생각해 보게 만들었던 '마음을 사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데미안'을 낼 때 필명인 에밀 싱클레어의 초대를 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무거운 꽃' , 간절히 경매에서 상자 하나를 낙찰 받고 싶었던 여자의 소망을 다룬 '죄송하지만 주문은 취소할게요',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이야기인 '⁠국경의 도서관'은 매년 11월 11일 밤 11시에 열리는 낭독의 밤에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가 나온다는 살짝 섬뜩하면서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도서관이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나하나의 단편이 가진 이야기는 색다르고 매력적이다.


멋진 책이다. 밤 열한 시를 읽으며 빠져들어 단숨에 읽었던 느낌을 '국경의 도서관'을 읽으며 다시 확인하게 되는 책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 문인, 음악가, 인물들을 다른 시선으로 풀어 놓는 이야기는 흥미로움을 떠나 좀 더 긴 중장편 소설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별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과 같아. 너무 성급하게 마시면 마음을 데고, 너무 천천히 마시면 이미 식어버린 마음에서 쓴맛이 나. 이별을 잘 견딜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하지만 겁먹을 필요도 없어. 지금 네가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그 마음을 다하면, 시가니 흐른 후에도 향기는 남는 거니까.   -p182-


⁠지금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지금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만 반짝이는 것, 그대가 망설이는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것,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것. 그건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않을 말.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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