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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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해마다 노벨문학상을 누가 탈지 궁금하다. 몇년째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과 많은 독자층을 차지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늘 거론되는 두세 명이 있는데 올해 역시 전혀 듣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인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선정되었다. 솔직히 저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함께 문학책을 읽는 모임에서 선정하지 않았다면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전쟁을 담은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세계2차대전에 참여했던 러시아 여성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항상 전쟁은 남자들 중심으로 쓰여진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사실 그동안 읽은 문학작품 중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책은 없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항상 남자지만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늘 어린아이와 여자들이다. 허나 그들의 아픔을 들려주는 책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가치 있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자들도 전쟁터로 향하는 일이 쉽지 않다. 허나 러시아 여성들은 자신의 아버지, 오빠, 남동생들처럼 전쟁터로 향하는데 두려움보다는 함께하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더 강했다는 느낌을 준다. 전쟁터에 있으면서도 그녀들은 남자처럼 위험을 무릎쓴 일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여성이란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전쟁터에서 겪은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순간순간 섬뜩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녀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터의 모습을 수시로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게 다가온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훌륭한 귀족 집안의 젊은 아가씨는 정든 집을 등지고 자신의 여성성도 포기한 채, 남자들도 꺼리는 힘든 노동과 의무를 선택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 그녀를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그것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모르는 은밀한 마음의 번민? 불타는 상상력?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기질? 애끊는 사랑?"     정말이지 대체 무얼까?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p90~91-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서 감출 수가 없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소.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의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p199-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남편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병든 몸으로, 우리는 아이도 없죠. 나는 전쟁을회상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도 내 모든 삶은 전쟁중이니까.....    -p230-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 나직하면서도 자주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앞에 섰을 때 놀라고 당황한다.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p255-


여자가 살짝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조개로 된 아름다운 분통을 내밀었어. 모르긴 몰라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인 것 같더라고. 분통을 열었지. 그러자 사방에 총탄이 날아다니고 포성이 울리는 그 한밤에 분 향기가 퍼지는데..... 아, 그건 특별한 무엇이었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나려고 해..... 그 분 향기, 그 조개 뚜껑...... 그 작은 생명..... 여자아기...... 집에 와 있는 것 같고...... 진짜 여자의 삶인 것 같은 느낌......     -p360-


너무나 많은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져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모든 사람들의 인터뷰 속에는 여자... 온전히 여자이면서 군인으로서의 그녀들이 담겨져 있다. 전쟁터에 있게 된 그녀들은 남자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몇몇 이야기들은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젊은 여자라면 달마다 찾아오는 마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 피에 얽겨붙은 바지를 떼어내지 못한다. 이런 모습을 남자들은 알면서도 외면한다. 행군하는 그녀들이 강을 만났을 때 남자들은 당장 적에게 들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숨을 곳을 찾지만 여성들은 강물속으로 들어간다. 몸을 완전히 물에 적시는 그녀들의 모습... 그녀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며 전쟁은 결코 여자에게 친절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알려준다.


러시아 여성들이 예쁘다고 한다. 책에도 너무나 예쁜 여성들이 많이 나온다. 허나 전쟁터에서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많은 여군들의 인기를 받는 장교는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똑같은 군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에 장교의 마음, 여자들의 마음이 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이와 반대로 아버지와 같은 지휘관은 내일 당장 죽음의 위기에 놓인 것을 알기에 여성들을 위해 특별히 미용사를 불러 한껏 꾸밀 수 있는 하루동안의 시간을 선물한다.


전쟁이 가진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책에 담겨진 인터뷰의 여성들처럼 같은 여자로서 그녀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전쟁이 가진 잔혹함, 삶과 죽음, 불편하지만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고 공감이 간다. 현재의 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안겨주는 책으로 읽기 편한 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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