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은 그가 스물일곱 살에 낸 첫 장편소설이다. 삶과 기억에 대해 이처럼 흥미로운 소설을 쓴 나이가 고작 스물여섯이란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야기라 저자의 나이를 알고 많이 놀란 작품이다.


귀를 기울이면, 들린다. 도시가, 노래를 한다. 정원 끝에서, 길 가운데서, 지붕 위에서 가만히 들어 보면 말이다. 밤엔 아주 분명하게, 사물의 표면을 스치는 소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노래는 우리 내면을 파고든다. 노랫말은 없다고 해도, 버젓한 노래고, 다들 듣지 못한다고 해서 도시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음 하나하나를 알아듣게 되면 노랫소리는 아주 크게 들린다.          -p11-


위의 글처럼 처음 초반부에 시작하는 글들부터 상당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장면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어 처음에 읽을 때는 무심히 지나치던 장면들을 다시 돌이켜 앞으로 돌아가게 할 정도로 일상의 모습들이 자꾸만 만지고 싶고 기억하고 싶게 하는 오래된 골동품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슬로우무비처럼 흘러가는 스토리 전개방식이 독특하면서도 읽을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소설은 여주인공의 현재의 이야기와 어린시절 과거 속 사건의 시간 속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여기서는 한 가족을 지칭할 때 누구네 집 아들이나 딸이, 부부가 아니라 18호, 19호, 20호 등과 같은 호수를 통해 가족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여주인공은 가족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일이 생긴다.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어머니는 딸의 말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제대로 된 말씀 없이 전화를 끊는다. 이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이 예전에 그녀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헌데 여자는 그의 형에 대한 큰 틀에서 기억되는 부분은 있지만 정작 자신을 좋아한 소년의 이름은 모른다. 그녀가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에 남자는 실망한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잘 알고 있을까? 솔직히 나는 나 자신을 모를 때도 있어 타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책 속에 그들 역시 이웃으로 살고 있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이웃은 고사하고 부부조차도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20호의 노부부의 경우 남자는 전쟁이야기나 암에 걸린 사연을 아내에게조차 말하기를 꺼린다. 이런 남편의 모습에 아내 역시 자신이 남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이렇듯 살을 맞대고 살고 있는 부부, 자식조차 잘 모르는데 타인이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네 인생.. 삶이 멋지고 대단한 일은 별로 생기지 않지만 느리고 평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정 소중한 것들을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을 읽으며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솔직히 이 책에 뛰어난 재미가 막 느껴진다는 말은 못하겠다. 어찌 보면 조금 느슨하고 지루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저자의 처녀작이 흥미롭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저자의 다음 작품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들게 한다.


이상한 시절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인파 속에서 길을 잃듯이, 사람들이 돌연 도시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며, 임시 주소와 연락하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곤 떠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빠져 달아나는 느낌, 여유를 잃어버리고, 기회를 놓쳐 버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길고 뜨거운 여름,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하루하루가 세상을 활짝 들어내며 터져 나왔지만, 즐기기는 어려웠던 것이, 막다른 시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p53-


오늘, 그는 생각한다. 그녀에게 가서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저기 혹시 얘기 좀 해도 될까, 너 저번 날 밤, 그 파티 기억하니? 혹은 저기 말이야, 실은 나 정말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됐어. 그는 이 불가능한 장면을 생각하며 미소 짓고, 눈을 깜박거리고, 손등을 긁는다.                    -p77-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제목에 딱 부합되는 이야기를 주인공의 아버지가 한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내 딸아, 언제나 네 두 눈으로 보고 네 두 귀로 들어야 해. 세상은 아주 넓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 버리는 것들이 아주아주 많단다. 늘 놀라운 것들이. 바로 우리 앞에 있지만, 우리 눈에 태양을 가리는 구름 같은 게 있어서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삶이 초라하고 지루해진다. 만일 아무도 놀라운 것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겠니?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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