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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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한 권씩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몰랐던 즐거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어릴 때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는 작품이다. 만화로도 만들어지고 워낙에 유명해져서 커서는 읽지는 않았다. 무인도에 살게 된 로빈슨 크루소가 주인공이 아니고 아라우칸 족 원주민이 로빈슨 크루소와 만난 금요일의 이름으로 지어주며 그의 이름 '방드르디 (금요일)를 전면에 내세운 책 제목이 독특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물 두 살의 로빈슨 크루소는 '버지니아호'의 선장과 어쩔 수 없이 타로 카드를 앞에 두고 있다. 자신이 뽑은 카드를 보고 선장이 떠드는 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가 열린다. 갑자기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서 선체를 흔들리고 순식간에 사람과 배의 모든 것이 휩싸인다.


눈을 뜬 로빈슨은 자신이 낯선 장소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그는 할 말을 잃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지만 무엇인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섬에서 살기 위해 버지니아호에 갔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찾아 돌아온 로빈슨은 살기 위해 이 섬의 이름을 '스페란차'라고 짓고 진흙에서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함을 느낀다.


젊은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가진 애정은 사랑이다. 그가 이 섬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붓는다. 농사를 짓고 염소를 기르며 생활하던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스페렌차가 어머니처럼 품어주었기에 그는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남자를 향한 총구가 기르던 개로 인해 생각지도 못하게 남자를 구하게 된다. 섬에 살고 있는 아라우칸 족 원주민인 그에게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방그르디'란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노예처럼 부린다. 방그르디를 구해줄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되어 버렸다. 절대복종을 하는 방그르디... 로빈슨은 우연히 방그르디가 어머니의 자궁인 스페렌차를 더럽힌다고 여겨 무차별 폭행을 자행한다. 머리로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화를 참지 못하는 로빈슨... 헌데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순간에 동등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모든 것을 잃고 대등한 관계가 되면서 방그르디는 자신의 힘과 목소리를 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인간대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친구처럼, 연인처럼 잘 지낼 수 있었다. '화이트버드호'이란 이름의 가진 배가 28년 만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스페렌차에 살지 않았다면, 방그르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로빈슨 크루소도 '화이트버드호' 사람들의 모습처럼 노예를 부리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권리를 행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허나 스페렌타에서 28년이 넘는 시간과 방그르디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세상은 변화했고 사람들이 악취 나고 타락했다고 느낀다. 로빈슨은 스물두 살의 그가 아니기에, 돌아갈 고향에 자신을 기다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방그르디가 있는 스페렌차에 남기로 한다. 기쁜 마음으로 방그르디의 해먹을 본 그는 망연자실해진다. 방그르디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친구이며 동료인 방그르디를 찾아다니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로빈슨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화이트버드호의 어린 노예 소년이다. 다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그에게 목요일이란 '죄디'라 정한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p50-


그가 달려간 것은 그의 영혼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혼은 백인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그 후 방그르디는 몸과 넋이 다 백인의 소유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나 선이요. 그가 금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악이다. 까다롭고도 의미 없는 조직이 기능을 발휘하도록 밤낮 할 것 없이 일을 하는 것은 선이요. 주인이 정해 준 몫보다 더 많이 먹는 것은 악이다.     -p182-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간 염소들은 이제 인간들에게 강제로 사육되는 동안 강요받았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힘세고 똑똑한 숫염소들이 지배하는, 계통과 서열이 확실한 무리로 나누어졌다.   -p241-


로빈슨은 자기도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탐욕, 긍지, 폭력 따위의 똑같은 동기로 움직이는 존재였으며, 지금도 어느 커다란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297-


그는, 그 내부에 부패와 쇠퇴를 향한 어떤 충동을 내포한 생리학적 젊음으로 젊은 것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렌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p307-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소설과 철학이 결합되어 있어 쉽게 느껴지는 소설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란 것은 누리는 사람에게는 분명 혜택이지만 아닌 사람에게는 지옥일 수 있다. 로빈슨이 가진 백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인간에 대한 차별, 종교에 대한 맹신과 믿음을 가진 인물이지만 방그르디와 스페렌차에 살게 되면서 그는 자연과 사람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로빈슨이 문명의 세계로 돌아갔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른다.


철학적인 이야기로 되어 있어 어렵게 느끼게 되는 면이 있지만 로빈슨이 느끼는 감정들이 독특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버지니아호'의 선장이 로빈슨이 뽑은 타로카드를 풀어주는 대로 로빈슨의 인생이 흘러간다는 것도 재밌게 느껴졌으며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아 조금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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