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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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피로 이루어졌든 법으로 이루어졌든 가정은 험악한 개미지옥이 되기도 한다. 개미지옥과 다를 바 없는 은밀한 가정폭력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쓴 자전적 이야기를 접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작가 네주 시노는 어릴 적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적인 학대와 강간을 당해왔다. 이 책 《슬픈 호랑이》(열린책들, 2026)는 생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심리와 소아성애적 기질 그리고 강간과 성폭행이라는 범죄 상황을 역추적한 범죄심리학 에세이이자 사회면 보도 기사와 편지 스크랩 등을 수록하며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증언문학이다.

법의 심판은 과연 죄질에 따라 공정하게 선고되는 것일까. 흉악한 범죄일수록 공소시효가 없어야 한다. 성년이 된 저자는 비밀을 털어놓았고 그녀 어머니가 고소장을 제출했다. 가해자인 의붓아버지는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아이를 강간한 죄로 받는 벌이 통상 징역 5년 이내인 점에 비하면 8년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7년 동안 어린 몸과 영혼에 가해진 야만적인 폭력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더 큰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회고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내밀한 관계 역학을 토대로 친밀한 학대자에 의한 성범죄와 악의 근원에 관해 밀도 있는 윤리적 성찰을 전개한다.

"우리의 문화에서, 터부로 되어 있는 것은 강간 그 자체가 아니다. 그 행위는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가. 터부로 되어 있는 것은 강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강간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 강간을 분석하는 것이다."(32쪽)

책 제목은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에서 비롯했다. "그분은 어린 양을 만들고도 그대를 만들었는가?"라는 시구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텍스트를 참조한다. 가령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가해자의 시각으로 서술하는 소아성애자의 심리와 궤변이라면, 이 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도착자인 가해자의 변태 심리를 파고든다.

여름철에 등반 안내인을 하던 의붓아버지는 가정을 지배 영토로 삼아 군림하려 들었다. 그는 권위주의 성격의 사내로, 키가 크고 힘이 세며 난폭하기까지 했고 늘 소리를 지르고 명령하고 지시했다. 반면에 친아버지 사미는 "예수의 아버지 성 요섭을 생각나게" 하는 인상의 착한 남자였고, 네주가 사미와 함께 살았을 때는 보헤미안처럼 히피족처럼 자유로웠다. 열네 살 때 네주는 친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지만 사미가 거절했다. 사미는 네주와 로즈 자매를 돌볼 능력이 없었고, 딸의 피해 사실을 알았을 땐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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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스, 이건 사랑 이야기야 I LOVE 스토리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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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미국의 아동문학가 케이트 디카밀로의 이야기는 마른 눈가를 촉촉하게 하고 굳은 가슴을 몽글몽글 녹인다. 책을 덮고 나면 행복한 순간이 으레 선사하는 화사한 느낌의 물결이 심장을 동심원 삼아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어린 소녀 '페리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번 이야기도 물론 그러했다. 페리스의 이야기는 가족, 이웃, 친구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진중한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대비하는 인생 성장 스토리다.

페리스(엠마 피니어스 윌키)는 예비 5학년인 열 살 소녀로, 현재 아빠, 엄마, 여동생, 할머니, 반려견 부머와 살고 있다. 페리스는 식구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할머니 셰리스와 매우 한올진 사이다. 페리스가 태어난 날 본 인생 첫 장면이 바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셰리스 할머니였다. 북적북적한 축제장의 페리스 휠 아래에서 페리스를 받는 산파 노릇을 멋지게 해주었다.

할머니는 페리스가 태어난 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야"라고 말해준다. 사랑 이야기는 결국 아름다운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청춘의 사랑도 황혼의 사랑도, 심지어 유령의 사랑까지도 그러하다.

셰리스 할머니가 이른바 '유령'을 보기 시작하자 페리스의 고민이 시작된다. 할머니가 심부전을 앓고 있는 환자이기에 유령의 출몰은 불길했다. 할머니가 유령과 소통을 했는데 유령에겐 소원이 하나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이 헤매지 않고 집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샹들리에에 불을 밝히는 일이다. 페리스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마흔 개의 양초에 불이 켜진다. 샹들리에에 불이 환히 켜진 날,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모든 이들이 따스한 위안을 얻게 된다. 그때의 마법 같은 광경은 책 표지 그림에 등장한다.

셰리스 할머니에게 사랑을 고백한 '황혼의 로맨티시스트' 부이 할아버지는 악당이 되고픈 천방지축 여동생 핑키(엘리노어 로즈 윌키)에게 남다른 조언을 해준다. "마법이라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을 굳세게 믿는 데서 시작하는 거란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너를 믿게 되거든." 사랑과 성장에는 모두 마법이 필요한 법이다. 고난과 시련만큼이나 말이다. 여섯 살 핑키도 엉뚱한 말썽을 저지르며 나름 성장을 하게 된다.

페리스의 절친은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피아노 신동 빌리 잭슨이다. 목에 거는 줄이 달린 안경을 쓴 빌리는 '신비한 장벽'이라는 곡을 치고 또 치는데, 이 오래된 노래는 돌아가신 엄마의 사랑과 결부된다. 빌리 엄마가 태교로 불러 주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빌리의 아빠 빅 빌리 아저씨는 왕년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는데 지금은 스테이크하우스 사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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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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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엄마와 딸 사이는 애증 관계다. 특히 엄마가 고주망태 알코올중독자에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어버렸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다는 엄마 냄새가 남아있는 집을 뛰쳐 나온다. 어차피 집 계약 해지로 삼 개월 안에 말끔히 비워줘야 할 곳이다. 이다에게 엄마 냄새란 "달콤한 향수와 살짝 풍기는 땀 냄새, 알코올 냄새"다. 이다는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매일 알코올로 정신줄을 놓았던 엄마를 혐오했다. "엄마 방에 엄마 냄새가 과하게 가득해서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다." 엄마의 망가진 모습에서 자신의 못난 점, 찌질한 면을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다는 엄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거부감, 상실감, 죄책감, 박탈감, 무력감 때문이다. 그런 이다를 언니 틸다는 너그러이 이해했다. 싸늘하게 침대 위에 퍼져 있던 엄마를 발견한 것도 이다다. "엄마가 죽고 두 달 동안 나는 매일 죽어갔다."

이다가 엄마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어땠을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까. 내면의 안개가 좀 가셨을까. 글쎄다. 적어도 장례식에서 누군가 다음의 지혜로운 성경 구절을 이다에게 들려주진 않았을까.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랑하는 이와 작별할 때 전도서 3장 1-8절만큼 위안이 되는 구절도 없다. 상실 이후의 애도의 시간에 정말 잘 어울리는 문구다.

결국 언니 틸다의 관심도, '좋은 친구' 사마라의 친절한 배려도 이다의 깊은 상실감을 덮기엔 무리였다. 그래서 이다는 무작정 떠났고 잠수를 탔다. 이다가 정처없이 방황하며 찾던 건 어쩌면 적절한 애도의 방식 아닐까 싶다. 마치 거울처럼 엄마에게서 자신의 약하고 추한 면을 본 이다는 자신의 불안한 영혼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겁쟁이처럼 패잔병처럼 도망쳤다. 짙은 내면의 안개에 휩싸인채 말이다.

몽유병자처럼 괴롭게 아파하며 방황하던 이다에게 따스한 배려의 손길을 내민 낯선 이가 있다. '물개'라는 바를 운영하는 크누트와 그의 아내 마리안네다. 덕분에 이다는 상실의 아픔이 서서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새로운 친구 라이프도 한몫한다. 라이프는 아침마다 발트해에서 수영하는 이다의 모양새를 보고 '자살 시도 수영'이라고 평한다. 이다에게 전투적인 바다 수영은 고난을 당당히 마주하고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성한 시합 같은 것이었다.

"바다에서 수영할 때면 나는 매번 바다에게 나를 휩쓸어가서 죽일 기회를 주지만, 바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고, 가끔 거칠게 춤을 추고, 내가 무례하게 굴어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바다가 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느낌이다. 바다는 때때로 내가 물고기나 인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152,153쪽)

그래도 역시 상실의 슬픔을 치유하는 길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랑, 만남의 기쁨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다. 다만 좋은 시작이라서 다행이다. 또다른 상실감을 마주할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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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행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 우리 삶에 우여곡절이 필요하다는 과학적 증명
오이시 시게히로 지음, 신소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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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삶을 논할 때 꼭 거론되는 것이 '행복'과 '의미'다. 희랍의 철학자는 행복을 삶의 목표로 제시한 바 있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는 행복보다 의미에 방점을 찍은 바 있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신앙 활동이 삶의 행복과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끔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철학과 심리학에서 '행복 대 의미' 논쟁은 생물학의 '유전 대 환경' 논쟁처럼 악명이 높다. 이런 오래된 논쟁을 타개하는 제3의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행복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오이시 시게히로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좋은 삶을 위한 제3의 길로 제시한다.

저자가 보기에, 행복은 취약하고 의미는 부질없다. 대체적으로 행복하거나 의미 있는 삶에는 평안과 안정이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행복을 원대한 목표로 삼으면 오히려 좌절과 우울의 늪에 빠지기 쉽다. 살면서 사사건건 의미에 집착하면 오히려 불안과 자기혐오의 수렁에 빠지기 쉽다. 행복은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고, 의미는 남달라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오직 정신적인 풍요로움만이 인생을 건실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비록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에 불확실한 부분이 많고 종종 불안정하더라도 말이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지향하면 인생의 역풍과 우여곡절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바람을 거슬러야 잘 돌아가는 바람개비처럼 말이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일까? 어떤 인물들이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았을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은 행복한 삶이나 의미 있는 삶과 어떻게 다를까? 직접경험만이 축적될 수 있을까 아니면 간접경험도 유효할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은 어떤 점에서 이로울까? 어떻게 하면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32쪽)

삶의 행복과 의미에 대한 담론은 차고 넘친다. 미국의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은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라고 했다. 그렇다, 행복은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오후 세 시의 차 한 잔 같은 인생의 소소한 기쁨이다. "행복한 사람이란 내일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란 말도 있다. 그렇다, 장기적인 행복은 대체로 직업적인 성공이 아니라 대인관계의 성공에 달려 있다. 실제로 내일 아침을 기다리며 설레며 잠자리에 드는 이는 행복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야구 경기를 할 때마다 변하는 타율과 같다면, 정신적 풍요로움은 통산 홈런 기록처럼 합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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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인간의 태도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동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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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세계적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아낙시만드로스라는 고대 그리스인을 주연으로 삼아 과학 탄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2,600년 전 고대 그리스 항구도시 밀레토스에서 살았던 철학자인데, 신화나 종교적 차원에서 벗어나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과학자'로 평가된다. 가령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2권에서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가 자연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서양에서 과학적 세계관은 아낙시만드로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는 플라톤이 활동하던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보다 200년 정도 앞서 있다.

저자는 아낙시만드로스를 "현대 물리학과 지리학, 기상학, 생물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과학 혁명은 '아낙시만드로스의 혁명'이며, 다윈과 아인슈타인은 그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윈과 아인슈타인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견실한 어깨 위에서 세상을 달리 바라본 셈이다.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세계관의 오류를 인식하고, 그 너머의 가능성을 내다보며 지식을 계속 발전시킨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쓴 자연과학서 《자연에 관하여》는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일부가 다른 텍스트에 인용되어 전해진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땅이라고 주장했고, 비는 태양의 힘으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증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최초의 동물은 물고기 또는 그와 유사한 생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인간은 물고기와 유사한 생물에서 진화한 결과다." 21세기 현대인들도 소름 돋게 만드는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과학적 사고의 본질이 "세상을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바라보려는 열정"이라고 말하면서 과학의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사고가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는 조건으로 민주주의와 권위에 대항하는 정신을 꼽는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선 과학적 사고를 "전복적이고, 선구적이며, 진화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엿보이는데, 이런 태도는 오늘날 지배적인 기존의 실증주의 철학과는 결이 다르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세계관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개선하고, 그 바탕이 되는 가정과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더 나은 개선책을 찾는 과정이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탐구하고 재구성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선물한다. 과학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그것은 새로운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끝없는 과정이다."(175쪽)

최초의 과학 혁명이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에서 일어난 이유가 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나고 자란 밀레토스는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를 잇는 활기찬 항구도시였다. 밀레토스에서 중국 비단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상품 교역과 사상 교류가 활발했다. 밀레토스는 기원전 6세기 경에 번영을 누렸으며, 주로 흑해 연안에 수십 개의 식민지를 거느린 작지만 강한 해양 제국이었다. 식민지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창출할 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사상, 견해를 받아들였던 덕분에, 범세계적 문화의 중심지이자 자유 시민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한마디로 밀레토스는 세계 최초로 인문주의가 꽃핀 중심지였다."

나는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과학적 지식의 표준으로 여긴다. 칼 포퍼 역시 아낙시만드로스의 과학 혁명을 긍정한 바 있다. 오늘날 과학 지식은 여전히 최선의 지식이지만 결코 완전한 지식은 아니다. "만나는 어려움 하나하나 작은 기념물을 세울 것. 각 문제마다 작은 사원을 세울 것. 풀기 힘든 수수께끼마다 비석을 세울 것." 이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인데,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과학자의 지적인 탐구 태도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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