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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자유의 브로맨스 - J.R.R. 톨킨과 C.S. 루이스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4년 5월
평점 :
판타지 소설의 정점은 무소유와 무권력이 아닐까 싶다. 물론 판타지 소설 가운데 권력과 재물을 지향하는 제국주의/식민주의적 버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서구 판타지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톨킨과 루이스의 대작을 보면, 권력과 소유에 저항하는 이상적 메시지와 뉘앙스가 드러난다. 법학자 출신의 아나키스트 저술가 박홍규는 자유, 자율, 자연, 자치를 지향하는 아나키즘 전도사답게, 톨킨의 『호빗』 과 『반지의 제왕』, 그리고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기존의 기독종교적 세계관 외에도 자유롭고 평등한 자율적 관계를 추구한 아나키즘적 가치관을 찾아낸다. 아울러, 실제로 톨킨과 루이스 두 작가의 오랜 우정을 아나키스트적인 우정 관계로 해석한다.
나는 '이즘'이 붙은 사조 가운데 낭만적 환상의 정점이 아나키즘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아나키즘을 '공상 사회주의'의 아류라고 했겠는가. 아나키즘은 상아탑 책상물림의 판타지물 같은 구석이 있는데, 거꾸로 보면, 좋은 판타지 소설은 바로 그런 초현실적 이상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적 관점을 내보일 때가 있다. 가령 철학자 그레고리 베스헴은 '호빗의 인생관'을 다음 여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단순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누릴 것, 근심을 털어버릴 것,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질 것, 선한 성품을 기를 것, 미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창조할 것, 경이를 재발견할 것" 등이다.
잘 알다시피, 판타지의 기본은 선과 악, 순수와 불순의 투쟁이다. 판타지 소설은 요정과 괴물, 마법사, 마녀 등이 등장해 권선징악, 파사현정의 테마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톨킨의 호빗'과 '루이스의 아이들'이 선과 순수를 상징한다면, 반지의 제왕은 권력과 자본이라는 거대 악의 상징이다. 저자에 따르면, 『반지의 제왕』은 "인간은 악을 부정할 수 없으나 악으로부터 선을 결과할 수 있다"는 선과 악의 상호의존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톨킨은 『반지의 제왕』이 타자의 자유의지를 지배하려는 의도나 행위가 가장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판타지 소설은 진리와 정의의 테마를 다루고, 진리와 정의의 문제는 어김없이 정치적 노선과 결부된다. 정치적으로 톨킨은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군주제를 찬양했다. 루이스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경멸하고 세계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
저자는 루이스의 저서들 가운데 『네 가지 사랑』을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루이스는 책에서 사랑을 필요의 사랑(바라는 사랑), 선물의 사랑(주는 사랑), 감사의 사랑(고마워하는 사랑)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고, 또한 사랑의 종류를 크게 애착, 에로스, 우정, 자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애착, 우정, 에로스는 자연적인 사랑으로, 자비는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구별된다.
저자는 줄곧 '우정'을 강조하는데, '반지원정대'를 '반지우정연대'로 바꿔 부르고, 프로도와 샘의 우정을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 아나키즘적 우정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특히 반지우정연대에서 유일한 평민 출신인 샘이 "가장 중요한 우정 캐릭터"로 강조된다. 참고로, 반지 원정대 아홉 명 가운데, 간달프는 천상계 출신의 착한 마법사이고, 아라곤, 보로미르, 레골라스, 김리는 모두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며, 호빗 친구인 피핀, 메리, 프로도는 샤이어의 명문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