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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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 유명한 피에타 상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의 피에타로,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다.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주검을 조각한 작품이다.

그런데 혹시 '비탈리아니의 피에타'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20세기 초의 무척 아름다운 피에타 석상인데, 천부적 재능의 조각가 '미모' 비탈리아니의 마지막 작품이다. 처음에 피렌체의 교구에 전시됐지만, 결국 사크라 수도원 지하에 유폐된 채로 봉인되었다. 이를 지키는 수도원장 파드레 빈첸초의 눈에는, 신앙이 예술보다 중요했다.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겁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도대체 비탈리아니의 피에타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토록 은밀히 유폐되었을까. 증언을 듣자하니, 미모의 피에타는 바티칸의 회랑을 들쑤셔 놓고 추기경들의 밤을 어지럽혔다고 한다.

'미모'라 불리는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는 1904년 11월 7일 프랑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왜소증으로 태어났다. 연골 형성 저하증 탓이다. 1916년 석공인 아버지가 전쟁 중에 사망하자, 미모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보내진다. 피에트라달바에 있는 삼촌 치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동료인 별항과 지내며 석공예가 경력을 쌓아나간다. 이때 미모는 제네바 명문가인 오르시니 집안의 막내딸 비올라를 우연히 묘지에서 만나게 되고, 동갑내기인 둘은 서로를 '우주적 쌍둥이'로 부르는 절친이 된다. 비올라의 열여섯 살 생일날, 미모는 멋진 곰 조각을 선물한다.

머리가 비상한 비올라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인 실험 정신이 뛰어난 학구파다. 마리 퀴리와 같은 멋진 과학자를 꿈꾸며 비행기나 패러글라이더 같은 비행체를 발명하는 데 열중한다. 배짱이 있고 결단력이 있어서, 자신의 발명품을 갖고서 지붕에서 시험하다 추락 사고를 당한 적도 있다. 비행체 발명이 꿈인 이유는 거침 없는 자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가문과 사회의 가부장제적인 질곡에서 높이 비상하는 꿈을 꾸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과 대지진이 그 날개를 꺾는다.

"비올라는 두 세계 사이에 그어진 불안한 경계선에서 균형을 잡는 줄타기 곡예사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과 광기 사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여러 번, 가끔은 육체적으로도 싸움을 치렀다."(109쪽)

미모에겐, 사랑이 예술보다 훨씬 소중했다. 미모는 어릴 때 품은 위대한 조각가의 꿈을 이뤄냈다. 하지만 비올라가 죽자, 미모는 수도원에 칩거해 인생의 40년을 독실에서 보낸다. 이런 미모의 순애보에 눈물을 흘리는 여성 독자들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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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인텔리전스
로랑 알렉상드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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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지구 멸망설의 단골 소재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이다. 인류는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실리콘밸리 내부의 입장도 서로 갈린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통제할 수 있다는 낙관론 측에 서 있고, 반면에 일론 머스크는 통제할 수 없다는 강한 비관론 측으로, 인공지능이 핵무기보다 더 위험하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인공지능 개발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견해를 품는다. 챗GPT의 개발자 샘 올트먼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강인공지능의 장점은 최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하자는 실용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 올트먼은 이렇게 경고한다. "인공지능은 매우 높은 확률로 세상의 종말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멋진 기업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경고한다. "챗GPT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 외부, 상아탑 엘리트의 경고음은 더욱 거세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호모 사피엔스의 전멸을 보게 될 거라는 경고를 발한 바 있다. 심층 신경망의 발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제프리 힌튼은 인공지능을 통제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인공지능이 인류를 전멸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루이빌대학교 사이버보안연구소의 로만 얌폴스키는 100년 이내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멸종시킬 수 있다는 불길한 예측을 내놓았다.

"우리가 이미 인공지능에 바둑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둑은 속이고, 포위하고, 교묘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게임이다. 적대적인 인공지능은 언젠가는 인류를 상대로 바둑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게임의 도구로 흑백의 바둑알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 항공관제 센터, 수력발전 댐, 자율 주행 자동차, 천연두 바이러스 보관소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이다."(487쪽)

프랑스의 미래학자 로랑 알렉상드르는 인류의 인공지능 개발이 현재 기회와 위기가 병존하는 '개와 늑대 사이'의 해질녘에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개는 확실성과 안전을, 늑대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의미한다. 저자는 진화냐 전멸이냐,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의 이분법 대신에, 범용 인공지능이 교육, 노동, 정치, 권력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초래할 변화를 탐구한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봄날이 왔다. 인공지능은 '인지 자본주의'의 엔진이다. 인지 자본주의란 "지식, 정보, 문화적 내용과 같은 인지적 자원이 주요 경제적 가치와 성장 동력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말한다. 딥 러닝 알고리즘, 엄청난 컴퓨팅 파워, 그리고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인공지능은 호모 데우스, 즉 인간-신이라는 경지와 트랜스휴먼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혔다. 즉, "생명을 창조하고, 우리의 유전자를 수정하고, 두뇌를 재프로그래밍하고, 우주를 정복하고, 죽음을 종식시키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찬미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전도사들은 강인공지능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인류는 초지능의 힘을 빌려 호모 데우스의 차원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호모 데우스는 트랜스휴머니스트가 꿈꾸는 궁극의 시나리오다. 저자는 기계와 인간의 융합 혹은 공진화를 지지하는 편이지만, 핵심은 절대적인 마지노선이 어디까지냐다.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선 '육체, 정신의 개별화, 우연'이라는 세 기둥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초지능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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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LIT, 완전한 몰입 - 성공의 불을 밝히는 하버드 몰입 혁명
제프 카프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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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창조적 사고를 논할 때 '몰입'은 핵심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창조적 사고가 확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의 순환적 융합이라면, 몰입은 창조적 사고의 질을 확보하는 핵심 비결이다. 기억과 재생에 기반한 수렴적 사고가 꼼꼼한 정리와 정답에 집착한다면, 상상과 오독에 기반한 확산적 사고는 우연과 창의적인 오답을 지향한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다면 창의적인 혁신과 발명은 불가능하다. 수렴적 사고의 일류가 척척박사라면, 그 아류는 남의 것을 베끼는 카피캣이다. 확산적 사고의 일류가 천재 예술가라면, 그 아류는 전통과 상식을 위반하는 미친 또라이다. 전통과 혁신의 틀에서 본다면, 전통은 수렴적 사고와 통하고, 혁신은 확산적 사고와 통한다.

오늘날은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정보사회다. 정보 과잉의 시대이기에 유용한 정보와 쓰레기 정보를 판별하는 선택과 집중이 그 무엇보다 관건이다. 쉽게 말해서 '단순화', 유식하게 말해서 '활성화 에너지 낮추기'가 창의적 사고의 기본 사양인 것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활성화 에너지는 "다른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데 드는 최소 에너지"를 말한다. 지식이든 정보든 과잉으로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새로운 사고, 독자적인 사고, 혁신적인 사고를 하려면 선택적 망각이 중요하다.

여기, 나름의 몰입 기술로 학습장애를 극복하고 과학과 의학 분야의 대학교수가 된 제프 카프가 있다. 저자는 고도의 몰입 상태를 마치 뇌에 불이 켜진 것과 같은 상태에 비유해 '릿'(lit)이라고 부르고, 그런 릿 상태에 들어서게 하는 열두 가지 몰입 도구를 '삶에 불을 지피는 도구들'의 대문자 약어를 써서 '릿 도구'(LIT, Life Ignition Tools)로 명명한다. 릿 도구들은 스위치 바꾸기, 질문에서 의미 찾기, 성가신 문제에서 실마리 찾기, 능동적인 기회주의자 되기, 나의 뇌를 자극하기, 움직임에 매료되기, 연습과 사랑에 빠지기, 새롭게 다르게 하기, 실패 너머에 초점 두기, 인간다움 발휘하기, 멈춤 버튼 누르기, 자연과 포옹하기다.

▶스위치 바꾸기ㅡ일상적인 패턴을 깨고, 단순하면서도 의도적인 변화를 만들자

▶질문에서 의미 찾기ㅡ탐구의 활력을 활용하자

▶성가신 문제에서 실마리 찾기ㅡ나에게 의욕을 불어넣는 '왜?'를 파악하자

▶능동적인 기회주의자 되기ㅡ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며 기회를 포착하도록 뇌를 훈련하자

▶나의 뇌를 자극하기ㅡ의도적인 주의력으로 마음이 표류하고 산만해지는 것을 차단하자

▶움직임에 매료되기ㅡ모든 일에서 한 발짝 내디뎌 신선한 에너지를 활성화하자

▶연습과 사랑에 빠지기ㅡ반복이 주는 보상과 점진적인 향상의 기쁨을 즐기자

▶새롭게, 다르게 하기ㅡ미묘한 차이와 참신함을 추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자

▶실패 너머에 초점 두기ㅡ실패에 대한 감정적 충격을 활용해 목적의식을 갖고 노력을 기울일 대상을 조정하자

▶인간다움 발휘하기ㅡ경외심을 단초로 삼아 공익을 위한 영감과 능력을 얻자

▶'멈춤' 버튼 누르기ㅡ마음을 충전하는 느긋한 놀이, 고독, 침묵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

▶자연과 포옹하기ㅡ생명의 강력한 원천과 연결되어 번영을 누리자

저자는 릿을 다음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릿은 "생태계와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교류하는 자연적인 에너지 흐름으로,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다." 둘째, 릿은 "자연적으로 고조된 뇌 상태. 유동적이고 계속 진화하며, 활발한 호기심, 창의적이고 지적인 각성, 집중된 정서적 참여를 특징으로 한다." 셋째, 릿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프로세스이자 원리 체계. 릿 도구들을 활용하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이 프로세스에 시동을 걸고 유지할 수 있다."

저자는 릿 도구들을 활용해 여러 혁신적인 의료 해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가령 민달팽이와 모래성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한 수술용 접착제, 해파리의 촉수를 기반으로 한 암 진단법, 고슴도치의 가시를 기반으로 한 수술용 스테이플, 구두충의 주둥이를 기반으로 한 미세한 니들 베드 등이 그러하다. 또한 저자는 노벨상 수상자들, 암기력 챔피언, 올림픽 메달리스트 등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소개하면서, 이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창조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비결로 릿과 릿 도구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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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일기장 - 백문백답으로 읽는 인간 다산과 천주교에 얽힌 속내
정민 지음 / 김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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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는 인생을 '영혼 만들기의 골짜기'로 바라본다. 고난과 시련을 우리의 영혼을 담금질하는 과정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서학을 믿었던 다산 정약용 역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가령 작가 한승원은 소설 《다산》에서 결국 천주교 신앙이 다산의 삶을 구원했다고 본다. "하느님과 늘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며, 절망과 허무 속에 빠지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올바르게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다산의 일기를 읽고 나면 생각이 또 바뀔 수 있다.

다산이 정조대왕의 울타리 안에서 벼슬 생활을 하던 사환기는 28세 때부터 38세 형조 참의를 시작할 때까지다. 삼십 대 초반이던 다산은 총 네 편의 일기를 남겼다. 〈금정일록〉(1795년 7월 26일~12월 25일), 〈죽란일기(1796년 1월 17일~3월 30일), 〈규영일기〉(1796년 11월 16일~11월 17일), 〈함주일록〉(1797년 6월 20일~윤6월 6일)이다. 모두 정식 문집에서 누락되어 있는 기록이다. 시기적으로는 1795년 7월 금정찰방 부임으로부터 1797년 윤 6월 초 곡산부사 부임 직전까지 근 2년간이다. 다산이 33~35세에 해당하는 시기다.

다산 일기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실만 나열한 건조한 문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문건이라는 점이다. 수첩처럼 객관적 사실 기술만 있고 일기 특유의 내밀한 술회나 심경 고백이 거의 없다.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훗날의 증빙으로 삼기 위한 비망록의 성격이 강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정말 다산의 일기에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노론은 물론 남인 내부의 공서파로부터 이가환, 이승훈과 더불어 '사학삼흉'으로 지목되어 벼랑 끝에 내몰린 다산이었기에, 그의 일기는 철저한 자기검열과 추후 편집이 들어간 정치적 텍스트였다. 가령 매부 이승훈의 이름을 직접 호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늘 '이형'으로만 표현하는 등 글의 표현이나 호칭을 다듬었고, 편지나 시문 등 참고할 만한 자료를 나중에 추가해서 실었다.

그동안 다산을 유학자, 사상가, 교육자, 예술가 등으로만 알고 있었던 일반인이라면, 네 편의 일기에 투영된 노련한 정치적 수완가의 모습에 위화감을 가질 수도 있다. 젊은 시절의 다산은 남인 권력 실세의 비서진이자 행동대장이었다.

저자는 일기의 건조한 서술 맥락과 행간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문헌을 참조했다. 가령 《다산시문집》과 〈변방소〉〈도산사숙록〉〈서암강학기〉 같은 다산의 글은 물론, 반대 진영인 반서학파의 문집인 이재기의 《눌암기략》과 강세정의 《송담유록》, 그리고 《정조실록》《일성록》《승정원일기》 등이 일기의 암호를 풀기 위한 참고자료로 쓰였다. 책 말미엔 부록으로 〈변방소〉와 〈도산사숙록〉의 원문 전체를 번역과 더불어 첨부했다.

〈금정일록〉을 독해하면 다산에게 주어진 세 가지 과제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바로 천주교도 검거, 서암 봉곡사 강학회, 그리고 〈도산사숙록〉 정리다. 셋 모두 면죄부를 얻기 위한 철저한 계획의 일부였다. 열흘간 지속된 서암강학회는 성호 이익의 방대한 유고 뭉텅이 가운데 관혼상제의 예법을 다룬 《가례질서》를 콕 집어 정리했다.

"다산은 금정 시절 그 지역 천주교도의 중간 리더인 김복성 등을 체포하고, 지도자 이존창을 직접 검거하는 등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고, 이도명 등 지역 선비들의 강한 반발과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서암 강학 모임을 추진했다. 또 〈도산사숙록〉을 통해 퇴계에 대한 존모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정학 회귀를 천명하는 등 안팎으로 줄곧 서학 관련 혐의 세탁에 온통 힘을 쏟았다."(35쪽)

다산은 정말 온몸으로 삼중고를 치렀다. 노론과 남인의 극심한 당쟁 대립이 하나요, 성리학 신념과 천주교 신앙의 갈등이 둘이요, 정조대왕과 서학 지도층 사이를 오간 비밀 요원(이중스파이) 노릇이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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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 지음, 손화수 옮김 / 레디투다이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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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는 행복을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닫힌 행복'과 '열린 행복'이다. 요리에 비유하면, 닫힌 행복은 레시피대로 잘 나온 요리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맛이 특색이다. 반면에 열린 행복은 레시피가 아니라 방송프로 '냉장고를 부탁해'처럼 다소 불확실한 식재료를 사용해 맛있게 만든 요리에 해당한다. 예상하기 힘든 반전의 맛이 특색이다.

다시, 여행에 비유해 본다면, 닫힌 행복은 여행 스케줄대로 착오 없이 매끄럽게 진행된 편안한 여행을 말한다. 반면에, 열린 행복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인연 따라 기분 따라 발길 따라 조우하게 된 뜻밖의 설렘과 긴장이 있는 그런 여행을 말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행시킨 '소확행'도, 만약 모닝커피나 오후의 밀크티처럼 매일 의례처럼 진행되는 소확행이라면 닫힌 행복에 해당하고, 우연성에 기댄 돌발적인 소확행이라면 열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지속성에 따라 구분한다면, 닫힌 행복은 잔잔히 지속되는 가벼운 즐거움과 편안함이라면, 열린 행복은 짧고 강렬한 쾌락이나 희열감이라고 하겠다.

노르웨이의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이 행복을 화두로 잡았다.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은 직후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대폭 줄어든다. 저자는 행복의 본질을 탐구한 방대한 문헌을 두루 참조하는데, 나는 왜 저자가 자신이 일상에서 만끽하는 행복한 순간에 대한 감상이나 신변잡기적 에피소드가 적은지 좀 의아해했다.

행복의 정의엔 객관적인 조건보다 주관적인 해석이 더욱 중요하다. 이기주의자의 행복과 이타주의자의 행복이 결이 다른 것처럼, 개인주의자의 행복과 공동체주의자의 행복도 당연히 다르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진화생물학자의 행복과 사회인류학자의 행복도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생물학적 기본 욕망의 충족에 기댄 행복론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자의 단순한 양적인 행복론에 반대한다. 하지만 저자가 내세우는 행복론은 여전히 부정신학의 경우처럼 불명확하다. 책의 맨 마지막 장이 그나마 진지한 행복 연구의 합리적 결론처럼 다가오지만, 그것 역시 '그런 건 진짜 행복이 아니야' 수준의 거친 마무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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