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기쁨 - 개정판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진짜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 마법은 눈속임이 전혀 없고 오직 내 안의 재료만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의 영감과 재능을 마법의 재료로 삼아 우리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예술가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분신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자신이 만든 작품 안에도 없다." 타샤 튜더는 동식물을 키우고 정원을 가꾸는 사랑의 정원사이기도 하지만, 글과 그림으로 영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이 책 《타샤의 기쁨》(윌북, 2026)은 타샤가 그린 감성적인 그림들과 더불어 타샤의 심금을 울린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넘기는 매 페이지마다 시화전 출품작을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역자 공경희는 "매 장마다 카드를 한 장씩 받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만큼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책이다. 타샤는 살면서 큰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그림으로 그렸다고 했다. 덕분에 아이들과 동물들, 꽃과 나무가 있는 총 50점의 수채화 그림이 우리 눈까지 즐겁게 한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워즈워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랄프 왈도 에머슨, 마크 트웨인 등의 글귀가 우리 귀를 즐겁게 한다. 타샤의 전원적 감성과 꿈을 키우는 데 이바지한 작가들의 글귀가 영롱하고 싱그럽다. "삶에서 달콤한 허브나 꽃 같은 향기"가 나게끔 하는, 에너지 드링크 같은 문구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초록숲의 환한 요정이 아기 사슴에게 먹이를 주는 그림이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지고 안녕감이 들면서 시나브로 행복해진다. 사랑이야말로 평화와 기쁨, 희망의 엔진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결국 생명을 먹이고 돌보고 아끼고 보살피는 일이다. 사랑 자체가 우리 삶을 살아내게 만드는 가장 강한 보호 마법이 아닐까 싶다. 위대한 마법사 해리 포터의 패트로누스 마법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 책 전체가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패트로누스 마법서다.

내가 가장 좋아한 그 그림 옆에는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사랑 시가 실려 있다. 다정한 친구들이 들려주는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한 마디가 이 그림에 더 잘 어울린다. "행복은 사소한 편린들로 이뤄져 있다. 키스, 미소, 다정한 눈빛, 진심으로 하는 칭찬, 유쾌함과 상냥함이 깃든 작은 행동 같은 곧 잊힐 소소한 것들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강경 마음공부 - 불안과 두려움을 다스리고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불경 마음공부 시리즈
페이융 지음, 허유영 옮김 / 유노북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필사가 유행이다.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경전을 필사해 본 경험이 다들 있을 텐데 특정한 종교나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무척 낯선 경험일 것이다. 만약 대중들 가운데 '나도 한번 필사의 맛에 빠져볼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금강경을 필사하는 근사한 취미를 추천하고 싶다. 금강경을 필사하면 그 자체로 복덕이 한량없다는 부처님의 든든한 보험도 있고 하니 말이다.

"부처는 무량백천억겁의 시간 동안 육신으로 보시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쓰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독송하고 남에게 해석해주는 편이 더 많은 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83, 84쪽)

아무튼 대승불전 가운데 가장 신통방통한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원제는『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보통 '금강경' 혹은 '반야경'이라 부른다. 여기서의 '금강'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빠르고 맹렬한 번개"라는 뜻과 "가장 단단한 암석인 다이아몬드"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하는 지혜'라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능히 일체 번뇌를 끊어 없애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이 책 『금강경 마음공부』(유노북스, 2023)는 중국의 불경 연구가 페이융이 자기계발서 형식을 빌어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끔 풀이한 금강경 강해서다. 부록에 '우리말 금강경 전문'을 실었다. 금강경은 불안과 두려움을 다스리고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자아를 해방시키고 모든 선입견을 떨쳐내는 길을 제시한다.

금강경의 핵심은 한마디로 '집착하지 말라'이다. 집착하지 않음이란 내려놓음이고, 내려놓음이란 '마음을 일으키되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중국 선종에서 금강경을 무척 중시했는데, 육조 혜능의 발심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의 한 대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강경을 읽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평온함을 지키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금강경을 통해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 특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자아의 형상, 타인의 형상, 중생의 형상, 생명이 존재하는 시간의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이 네 가지 상이 우리 삶에 번뇌를 만들고 생사윤회를 끊는 해탈을 방해한다.

육조 혜능은 이 네 가지 상을 수행자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대상, 즉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고 다른 생명을 경멸하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자신은 계율을 지킬 수 있다고 자만하며 계율을 어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인상이라 하고, 이 세상의 고통과 윤회를 증오하여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을 중생상이라 하며, 이 세상에 오래 살고 싶어 복업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그것이 집착인 줄 모르는 것을 수자상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120쪽)

결국 금강경의 지혜는 나의 모습에 대한 집착, 타인의 모습에 대한 집착, 물건의 모습에 대한 집착, 영원한 시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부처와 보살은 이 네 가지 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제행무상(모든 사물은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며, 정해진 형태가 없이 수시로 변화한다), 제행개고(모든 사물의 운행에는 고통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제법무아(모든 사물의 운행에는 정해진 주체가 없다), 열반적정(생사윤회를 초월해 적정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이 최종적인 해탈)이 부처의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닝 - 끝없이 나를 타인에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잉그리드 클레이튼 지음, 최시은 옮김, 김현수 감수 / 센시오 / 2026년 5월
평점 :
예약주문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과 어린이날이 있고, 음력 사월이 생신이신 부모님 덕분에 가족행사가 또 줄줄이다. 평범한 가정에선 아비가 아들의 반면교사이고 어미가 딸의 반면교사다. 문제적 가정에선 아비를 증오한 아들이 아비처럼 늙어가고, 어미를 싫어한 딸이 지 어미 팔자를 따라간다. 자식이 '행복한 가족'이라는 서사에 집착하면 할수록, 가족관계는 점점 더 나빠진다. 가정의 달이 엄청 피곤해진다. 요즘 뉴스를 보면, 사랑과 돌봄의 순기능을 하는 가정보다 미움과 냉담의 역기능을 하는 가정이 더 많아 보인다. 그렇다, 가정은 관계성 트라우마나 복합 트라우마의 온상이며, 부모답지 않은 부모는 복합 트라우마의 원흉이다. 복합 트라우마란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잉그리드 클레이튼은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실은 문제적 집안에서 자란 트라우마 생존자다. 친부모는 둘 다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순응형 사람들이었는데, 이혼 후 각자 지배적인 성향의 파트너와 재혼했다. 저자는 엄마와 함께 새아빠와 살게 되는데, 본디 친아빠의 절친이었던 새아빠는 알고보니 집안의 폭군이자 나르시시스트였다. 새로운 가정은 독재 체제였고 이런저런 규칙들이 난무했다. 엄마는 새남편에 순종하며 눈 뜬 봉사처럼 살았고, 딸이 폭로한 새아빠의 성적인 학대를 외면했다.

그럼, 딸은 이런 새아빠에게 어떻게 반응했을까. 딸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오히려 새아빠의 기분을 맞추고 비위를 살피며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걸 '포닝(Fawning)', 즉 순응 반응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포닝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나 관계에 오히려 가까이 다가서고 환심을 사려 하는 행동을 뜻한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비상 상황에 대한 네 가지 유형의 트라우마 반응이 있다. 싸우거나(Fight) 도망치거나(Flight) 얼어붙거나(Freeze) 순응하거나(Fawning). 이른바 네 가지 'F 반응'이다. 정신적 외상 및 학대를 겪은 이들의 다양한 사례를 연구한 심리치료사 피트 워커는 순응 반응을 "위협에 대한 반응 중 하나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에게 오히려 더 매력을 호소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부당함, 수치심, 방치, 학대 등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나타나는 반응"이 바로 순응이다. 순응 반응의 최대 관심사는 안전이다. 즉 순응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타인의 소망, 필요, 요구에 자신을 동화하면서 안전을 추구한다. 문제는 안전을 빌미로 자기 자신과의 주체적인 연결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자존감 저하, 우울감, 불안, 중독, 대인관계 등의 문제는 그 부산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필사가 유행이다. 왜냐, 나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전 경전을 비롯해 각종 명문과 명언을 노트에 필사하고 있는데, 명시는 문학 필사의 단골 메뉴다. 시집 필사를 위한 전용 노트가 있고 동양시와 서양시 따로 따로다. 필사는 문해력과 표현력, 감수성을 강화하고, 정서 안정이나 집중력과 몰입 등 여러모로 효과가 좋다. 물론 시의 경우 필사에만 그쳐서는 곤란하다. 가급적 외워야 한다. 명곡이 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광섭의 '저녁에'처럼, 얼마든지 흥얼거릴 수 있어야 한다.

풋풋한 청소년 시절에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헤르만 헷세를 몹시 좋아했다. 전혜린의 영향력도 있었고 당시 독어가 제2외국어였기에, 시집을 사면 독일어 원문이 병기된 시집을 애써 사곤 했다. 1988년 세계출판사에서 펴낸 《헷세의 명시》는 아직도 건재하다. 《릴케의 명시》는 왜 안 샀는지 모르겠다. 아마 청하출판사의 릴케 책이 이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의 시나 헷세의 시나 다들 고독과 자유를 노래했고, 러브레터에 쓰기에 좋은 표현들도 많았다.

오랜만에 릴케의 서정시를 접했다. 이번엔 독어 원문이 없는 필사집이다. 배명자 번역이고 보라빛 하드커버가 아름답다. 통필사를 감행하는 분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필사 분량이 너무 많으면 지치기 쉽다. 특히 손목과 손가락 관절이 아파온다. 이 책은 필사 입문자를 위해 릴케의 짧은 서정시들을 모아놓았다.

필사면은 줄과 무지 두 종류다. 종이가 만년필을 견딜 수 있는지 보았는데 견딜 순 있으나 비침이 있는 편이다. 나는 시의 경우, 세촉이 아닌 스텁닙으로 필사하길 즐긴다. 세일러의 캘리그라피펜 1.0 밀리와 1.5밀리, 트위스비 에코 로즈골드 1.1밀리를 썼다. 세촉이라면 뒷비침이 심하진 않을 것이다. 형광펜은 아무런 비침도 없고 색조가 자연스럽다.


릴케의 서정시들 가운데 제일 맘에 들었던 건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다. 평범한 인생을 소중한 축제로 바라본 시인의 긍정의 정서가 가슴에 와닿았다.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을 느끼며, 그것을 관조하라"는 시인 장석주의 감상처럼 말이다.

심지어 스위스 라롱에 있는 릴케 무덤의 묘비명조차 생명과 실존에 대한 긍정이 엿보인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되지 않겠다는 갈망이여"라는 유명한 싯구인데, 인간이란 실존은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꽃피울 수 있고, 과일의 완숙을 재촉하는 창조적인 소수의 문학혼은 언제나 이미 불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
박영택 지음 / 심통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한국의 근대 예술은 불우한 시대를 거울 삼아 건너왔다. 가장 척박하고 치열했던 시대를 실험실 삼아 성장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1910년부터 1958년까지 한국의 다양한 시각이미지를 대상으로 삼아 근대미술 지형을 조감하고 있다. '40인 40선'인데, 순수미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신문만평과 책 표지, 조각과 사진 등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순수미술가라면 내 머릿속은 곧장 세 사람이 떠오른다. 「맷돌질하는 여인」의 박수근, 「통영 들소」의 이중섭, 그리고 「백자와 꽃」의 김환기다. 여기에 다시 페미니즘적 시각을 더한다면, 「수원서호」의 나혜석과 「생태」의 천경자를 꼽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내 교양의 한계다. 이 책은 그런 한계, 교과서식 이해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국화'나 '동양화' 하면 거개가 산수화를 떠올린다. 그렇다, '조선의 그림', '조선의 색' 하면 산수화가 우선이다. 18세기 전반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처럼 말이다. 이런 조선 산수화의 맥은 근대미술에 이르면 누구한테 이어졌을까. 바로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이다. 이상범은 한국적 실경산수의 거장으로, 근대 한국화 6대가의 한 사람이다. 근대 한국화 6대가란 이상범을 비롯해 허백련, 김은호, 변관식, 노수현, 장우성을 가리킨다. 이 책은 한국화 거장들 가운데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세 사람을 소개한다.

이상범과 노수현 모두 조선 시대 마지막 화원인 안중식이 운영한 경묵헌(1917년 6월 개설)에서 그림을 배웠고, 동연사(1923년 3월 출범)의 핵심 멤버였다. 동연사는 중국회화와 일본화풍과는 다른 "한국의 풍경, 흙냄새 그리고 그것들을 에워싸고 흐르는 한국적인 향토시를" 그리고자 했던 단체다. 청전의 초기 대표작 「잔추」는 1930년 제9회 조선미전 특선작으로, "치밀한 붓질과 건조한 먹의 흔적으로 적적하고 고요한 농가와 헐벗은 민둥산을 보여"준 수묵산수화다. 청전은 한국적 풍경의 정서를 쓸쓸함과 스산함으로 재현해냈다.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의 산수화는 실경이 아닌 전통적인 관념 산수화를 계승했다. 특정 장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상상된 자연풍경, 즉 "대부분 기이한 절경과 암산, 굳건한 바위와 커다란 나무가 적막하게 자리하고 있는 비의적인 공간"을 선보인다. 심산의 산수화는 "정형적인 화면의 구도 위에 골격미 넘치는 필세와 창윤하면서도 유현한 공간감, 고고한 정신미를 추구"했다. 그의 대표작 「송하관월도」는 웅장하고 막힘 없는 자연의 기상이 있다.

"아득한 거리에서 출현하는 거대한 산과 바위, 기세 좋게 솟은 소나무, 몽환적이기까지 한 달밤의 산속 분위기, 고개를 들어 허공의 달을 바라보는 선비의 멋이 깃든 매력적인 그림이다."(213쪽)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은 안중식, 조석진 문하에서 전통적인 동양화를 배운 수묵 산수화의 대가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의 우에노 미술학교에서 3년 동안 청강을 했다. 한국적 산수 풍류의 이상향을 구현한 작품이 바로 「농가의 만추」다. 나무 줄기와 언덕, 논과 논두렁, 초가집과 마당 등 한국 농촌의 늦가을 풍경을 담았고, 길을 걸어가는 갓 쓴 노인이 등장한다.

청전과 소정과는 결이 다르게, 인상주의 화풍으로 조선의 자연과 조선의 색을 화폭에 담은 거장도 있다. 바로 화가 오지호(1905~1982)다. 청전과 소정에게 스승 안중식이 있었다면, 오지호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있었다. 오지호가 다닌 휘문고보의 미술 선생이 고희동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지만, 오지호는 환하고 밝고 맑은 조선의 자연환경을 강조했다. 대표작 「남향집」은 1935년부터 1944년까지 화가가 살았던 개성의 초가집을 그린 그림으로, 초가와 흙벽, 고목과 삽살개, 단발머리 소녀 같은 가장 향토적인 소재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초겨울 정경을 한국적인 인상파 기법으로 담아냈는데, 원제는 「사양(斜陽)」이었다. 오지호는 서양의 인상주의를 한국의 풍토에 맞게 토착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미술 철학이 유달리 맘에 와닿는다.

"어떤 미술의 특질이란 그 미술이 산출되는 지역의 자연환경(풍토)의 특질에 유래되는 것, 예술 중에서도 가장 예민하게 자연을 반영하는 것이 회화다. 시각적 세계에 있어 사람, 특히 조선 사람의 감정이 요구하는 것은 명랑하고 찬란한 색채인 것, 조선의 자연은 공기가 청정하고 색채가 선명하고 기온이 쾌적한 것이다."(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