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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5
허먼 멜빌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약자가 강자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다. 순종, 저항, 도주. 약자의 저항은 으레 냉혹한 보복을 부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항 가운데 어떠한 맞대응도 전부 무장 해제시키는 그런 조용한 저항이 있다. 그런 조용한 저항의 대명사가 바로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창조한 '필경사 바틀비'다.
이야기의 무대는 금융 경제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한 변호사 사무실이다. 총 네 명의 직원이 있는데, 터키(칠면조), 니퍼스(핀셋), 바틀비는 복사기가 없던 시절, 공정한 계약서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고용한 필경사들이다. 그리고 사무실 소년 사환으로 진저 너트(생강과자)가 있다. 사무실 주인장인 변호사는 이야기의 화자이면서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신조 하에 직원들과의 화합을 중시하는 나름 인간적인 보스다. 야망과는 거리가 멀고, "더없이 신중한 안전제일주의자"라서, 자본주의 질서에 매우 잘 길들여진 그런 인물이다.
직원들의 개성이 더 뚜렷하다. 가령 터키는 정오 이전까지는 정상적이지만 정오 이후에는 ADHD 환자처럼 변해버린다. 너무 혈기 왕성해져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다. 니퍼스는 일 처리도 빠르고 단정한 매무새를 가진 나름 야심이 있는 청년이지만, 소화불량 탓인지 툭하면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투덜꾼이 된다. 다만 니퍼스는 터키와는 반대로 오전에는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삼지만 오후에는 비교적 얌전한 편이다. 그러니깐 터키와 니퍼스는 오전과 오후 번갈아가며 말썽을 일으키는 톰과 제리 같은 짝꿍이랄 수 있다. 진저 너트는 열두 살 정도 된 어린 소년으로, 터키와 니퍼스에게 과자와 사과를 사다 주는 심부름꾼이다.
마지막으로 고용된 바틀비는 처음엔 무척 깜냥 있는 필경사였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부터 필사본 대조 작업을 거부하더니 나중에는 주요 업무인 필사까지 작폐하고 만다. 바틀비의 거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할 뿐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소통과 대화를 통해 바틀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중에 변호사에게 해고당하고, 사무실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을 때에도, 바틀비는 텅 빈 그 원래 사무실에서 유령처럼 살아간다.
「필경사 바틀비」는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를 그린 명작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바틀비를 탈예속적 주체 혹은 자기 배려의 주체라고 높이 평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틀비의 저항은 결국 불통과 단절의 저항이기에,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올바른 저항법인지는 의문이다. 바틀비의 비극적인 결말을 놓고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의지 발현 운운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바틀비식 삶의 태도가 현대인의 소외와 허무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과연 그런 식의 저항법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을까. 윤리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삶의 지혜 혹은 삶의 기술이다. 그런 면에서 바틀비는 바로 '공존과 연대의 윤리'가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