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워즈 라임 어린이 문학 47
킴벌리 브루베이커 브래들리 지음, 이계순 옮김 / 라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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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살다간 아프리카 흑인 쿤타킨테의 고통과 눈물에는 쉽게 공감하면서도, 막상 갱들이 출몰하는 무법지대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미국 흑인 가족의 고통과 눈물에는 좀처럼 좁히기 힘든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낯선 위화감이 언제나 모래 앙금처럼 가슴에 남는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심각한 중독자도 없고, 총에 맞아 죽은 이도 없다.

적지 않은 흑인 문학을 접했지만, 내겐 그렇게 생생한 날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음침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거나 가해자가 되거나 혹은 구제불능의 약쟁이가 되거나 하는 스토리가 내겐 얼마간 인스턴트 감미료와 같은 가공의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가령 뉴베리 아너 상을 수상한 제이슨 레이놀즈의 『롱 웨이 다운』을 읽었을 때, 형이 갱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복수하겠다는 흑인 소년의 목소리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더랬다.

이번에 역시 뉴베리 아너 상을 수상한 킴벌리 브루베이커 브래들리의 『파이팅 워즈』(라임, 2024)를 읽었지만, 성추행을 당한 흑인 자매인 델라와 수키의 용기 있는 증언에 공감은 가지만서도 공명까진 아니었다. 작가가 수키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끝내 손목을 그은 이유, 즉 트라우마의 원인인 성범죄를 가급적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전개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루밍 성범죄자와 관계된 묘사나 설명을 극도로 배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살벌한 이야기의 살벌함을 최대한 덜어내는 중화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성폭력, 자살 시도, 필로폰, 문신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폭력적인 단어나 거친 표현이 거의 나오지 않는 연유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녹아든 이야기지만, 틀에 박힌 인권 교과서적인 전개에 다소 답답한 구석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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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지구 산책 - 제15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 부문 우수상 수상작 웅진책마을 120
정현혜 지음, 김상욱 그림 / 웅진주니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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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은 영혼의 학교다. 뉴에이지스러운 발언이지만, 지구별이 영혼의 수련장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 지구별이 일종의 감옥소, 즉 죄를 지은 외계인이 유배되는 장소라고 보는 시각은 어떨까. 나는 어릴 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친척 어르신의 말에, 즉 내가 고아 출신이라는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상태에서 언젠가 내 친부모가 나를 찾아 데리러 올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곤 했다. 꽤나 외롭고 우울한 환상이었다.

뭐, 행복한 아이라면 그런 쓰잘 데 없는 환상을 품진 않겠지만, 문득 엄습하는 소년기의 우울감은 충분히 그런 환상을 품게 만들었다. 특히 부모에게 맞은 날엔,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또한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의 지구 침공을 다룬 공상과학소설이나 녹색 피를 흘리는 파충류 외계인이 나오는 미드를 보고선, 부모님이 실은 통통한 생쥐에 입맛을 다시는 그런 외계인이 아닐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특히 단식투쟁하는 나를 냅두고, 자기들끼리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모습에 어떤 커다란 검은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환상은 이불킥을 차게 만드는 확신이 되었다.

작가 정현혜의 동화 《모리와 지구 산책》(웅진주니어, 2024)에도 지구인과 외계인이라는 이중 신분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소녀가 등장한다.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예리는 실은 고향별 '스카우르나'에서 죄를 지어 지구살이 10년 형을 선고 받은 외계인 '아뜨레토리모'다. 죄수가 있으면 당연히 간수도 있는 법. 예리에게는 변신술에 능하고 지혜로운 멘토 '리스토'가 있다. 예리는 조만간 형 집행이 정지된다. 형벌이 끝나면 그동안 관계를 맺었던 모든 지구인의 기억에서 예리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 '지구 탈출' 100일 카운트가 막 시작된 예리에게 리스토는 혹시 지구에 남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는지 묻는다. 학교에선 왕따를 당하고, 집에선 밤새 싫은 공부를 해야하는 초등학생의 삶이 지긋지긋한 예리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삶이 고달프면 누구나 환상을 찾게 된다. 초등학생 예리처럼, 지구별의 삶이 실은 형벌이고 자신은 죄를 지은 외계인이라는 환상 자체는 범천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선녀 전설처럼 자극적이고 달콤한 구석이 있다. 더구나 이런 환상의 이면에는 언제나 이미, 마음을 다친 지구인이 매우 잊기 쉬운 너무나 극명한 아름다운 진실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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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과학 - 세상을 움직이는 인간 행동의 법칙
피터 H. 킴 지음, 강유리 옮김 / 심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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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실망시키지 않을 거란 믿음이다. 신뢰의 기본은 동질성과 유사성이다. 유유상종이라고, 나이, 성별, 사회적 계층, 세대, 고향, 취향 등이 같으면 기본적인 대인 신뢰감이 대폭 상승한다. 소조직의 신뢰도는 끈끈한 '끼리끼리 문화'를 낳는다. 인싸는 인싸끼리, 아싸는 아싸끼리. 일반적으로 타인에 대한 우리의 신뢰 판단은 합리적이거나 치밀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편향이나 엉성한 고정관념, '카더라 평판'에 쉽게 좌우되곤 한다. 가령 정치 성향, 직업, 거주 지역, 출신 학교처럼 속해 있는 집단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해 매우 성급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한국계 미국인 출신의 조직행동학자 피터 H. 킴은 신뢰를 결정짓는 두 개의 강력한 요소로 '역량'과 '도덕성'을 크게 강조한다. 역량은 "누군가에게 과제 수행에 필요한 전문적인 기술과 대인관계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고, 도덕성은 "누군가가 용납할 만한 일련의 원칙을 지키리라는 믿음"이다. 정치판이든 스포츠판이든, 아님 방송연예계든, 한국 사회에서 학연과 지연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가 바로 사회적 평판과 신뢰도를 좌우하는 이 두 요소의 검증이 용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신뢰도를 평가할 때 최대 열 가지 특성을 고려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시간적 여유, 역량, 일관성, 신중함, 공정함, 도덕성, 신의, 열린 마음, 약속 이행, 수용력이다. 이중에서 역량과 도덕성이 신뢰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신뢰 위반과 불신의 문제, 그리고 신뢰 회복의 여부 역시 이 두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역량에는 긍정적인 편향이 개입된다. 신뢰 위반이 역량 문제로 인지되면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열 번 잘하던 사람이 한두 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능력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심 어린 사과가 신뢰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덕성은 부정적인 편향이 개입한다. 신뢰 위반이 도덕성 문제로 인지되면 땅에 떨어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가령 유명인사에게 들이대는 우리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떠올려보라. 평소 '바른 생활 사나이'나 '유교걸'의 이미지를 지닌 공인이 한 번이라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비도덕적인 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이 경우 위반자의 사과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명심하라, 도덕성 문제는 사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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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레임 - 발상의 전환을 위한 28가지 생각 도구
네이선 퍼.수재너 하몬 퍼 지음, 한정훈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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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이 아닌 이상, 현상은 해석이 좌우한다. '위기'가 '기회'의 다른 말인 것처럼, '불확실성'은 '새로운 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을 습관화, 패턴화하려는 경향이 있고, 예측가능한 확실성은 선호하지만 애매모호한 불확실성은 꺼리고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확실하고 예측가능한 것은 권태와 싫증을 부르기도 한다. 단언컨대, 변화와 기회, 희망과 창조, 도약과 혁신은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확실성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이 탁월한 성과를 낳는 주요 촉진제라는 말이다.

자,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게임판에서 살아가는 플레이어다. 게임판의 규칙과 역할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따라 두 유형의 플레이어로 나뉜다. 유한 플레이어와 무한 플레이어. '놀이와 가능성으로서의 삶'을 중시한 종교학자 제임스 카스에 따르면, 유한 플레이어는 인생이 부여한 역할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규칙에 따라 승리하기 위해 경기를 하지만, 무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역할과 규칙을 바꾸면서 경기를 한다. 다시 말해서, 무한 플레이어는 불확실성을 기회와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혁신가 유형이다. 유한 플레이어가 게임의 고정된 프레임에 갇혀 있을 때, 무한 플레이어는 게임의 프레임을 바꾸고 변형시킨다.

프랑스의 비즈니스 컨설턴트 네이선 퍼와 수재너 하몬 퍼 부부는 《리프레임》(포레스트북스, 2024)에서 불확실성을 삶의 무기로 전환시키는 무한 플레이어의 구체적인 기술과 도구를 소개한다. 두 저자는 예측가능한 인생이 실패의 지름길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변혁 가능성이나 조직의 혁신 가능성은 불확실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불확실성을 능숙하게 다루는 네 가지 도구를 소개하는데, 재구성(reframe), 준비(prime), 실행(do), 지속성(sustain)이다. 이 네 가지 도구는 십자가 모양의 이미지로 재배치되는데, 각각 나침반, 배낭, 돛단배, 파리의 상징인 떠 있는 배로 상징화된다. 저자는 이를 '불확실성 구급 십자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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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4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외 옮김 / 동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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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그게 바로 '자기 서사'의 출발점이다. 자서전, 일기, 편지, 구술사, 사소설 등이 대표적인 자기 서사 장르인데, 자기 서사의 출발점이 자기에 대한 진실 말하기/글쓰기라면, 그 종착지는 주체적인 실존 윤리 및 생활 미학의 완성이다. 자기 서사는 말과 글을 기반으로 한 자기변형의 기예를 선보인다. 나는 자기 서사가 궁극적으로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윤리적 실험실이라고 생각한다.

걸출한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의 이론은 진실, 권력, 윤리라는 세 개의 꼭짓점이 있다. 진실과 권력이 푸코 전기 사유의 축이라면, 윤리와 자기 배려는 푸코 후기 사유의 핵심 테마다. 자기 배려 윤리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문헌으로 《성의 역사》《주체의 해석학》《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동녁, 2024)는 1982년 5월 31일부터 6월 26일까지 토론토 빅토리아대학교에서 개최된 '기호학 및 구조 연구회 제3회 국제하계학교'에서 푸코가 행한 일련의 강연과 세미나의 녹취록본이다. 토론토 강연의 주제는 자기 배려의 기예, 더 넓게 말한다면, '자기 수양'과 '자기해석학'과 결부된 주체화의 문제다.

"푸코는 주체의 계보학, 주체와 진실의 관계,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라는 세 차원에 힘입어 토론토 강연의 주제를 정할 수 있었다."(16쪽)

주체성의 수레를 굴리는 두 바퀴가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이며, 두 바퀴가 굴러가는 길은 권력-지식의 시스템으로 포장된 길이다. 푸코 후기 사유의 문제의식은 자율적인 주체성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율과 타율, 인식과 배려, 권력과 지식의 나선적 순환을 두루 거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주체화다. 푸코는 주체화의 측면 가운데 자기 배려 주체의 형성 과정을 중시했지만,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의 상호의존적 대화를 통한 새로운 윤리 주체의 형성이라는 전반적인 청사진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푸코는 서구 역사에서 진실 말하기를 축으로 하는 자기 배려 윤리의 세 가지 모델을 소개한다. 바로 소크라테스-플라톤 모델, 로마제국 초기 모델, 그리스도교 모델이다. 플라톤의 문헌 《알키비아데스》에 근거한 소크라테스-플라톤 모델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배려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한다. 로마 제국 초기 모델은 푸코가 간주하는 자기 배려 윤리의 황금기였다. 스토아학파의 자기 수양 담론은 교육적 기능보다는 자기 배려의 비판적 기능, 투쟁적 기능, 의학적 기능을 더욱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모델은 주체 내면의 탐색과 해석으로 간주되는 '자기해석학'의 기반인데, 자기 배려보다 다시 자기 인식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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