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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일기 - 조선의 미래를 고민한 실천적 지성의 기록 ㅣ 클래식 아고라 4
이이 지음, 유성선.유정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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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학문은 이학으로서의 성리학과 기학으로서의 경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율곡은 학문을 통해 인간의 변화를 시도한 성리학자이면서, 정치를 통해 사회개혁에 매진한 경세가였다. 다시 말해서, 율곡은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조선 유학의 거두이면서,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기반해 개혁을 주장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율곡의 정신을 이은 후대의 학자들, 즉 율곡학파는 외적인 실천규범과 질서를 중시한 도문학을 강조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 율곡의 생강처럼 매운 기풍을 맛보려면 『경연일기』(아르테, 2023)를 펼쳐보면 된다.
『경연일기』는 율곡이 정치의 현장에서 쓴 17년의 일기다. 율곡의 나이 30세 때인 1565년(명종 20년) 7월에 시작하여 46세 때인 1581년(선조 14년) 11월에 끝나는 약 17년간의 방대한 기록이다. 경연이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을 말한다. 강론이 끝난 뒤에는 국왕과 신하가 함께 고금의 도의를 논하고, 정치와 국정 현안 등을 토론하기도 했다. 『경연일기』는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왕과 여러 대신들의 정사 집행 내용과 함께 인물에 대한 평론, 그리고 율곡의 생각도 사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경세서이면서 수양서이기도 하다. 율곡은 『경연일기』를 『금상실록』이라고 했는데, 이는 본인이 사관의 자의식을 갖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율곡은 투철한 우환 의식을 갖고 16세기 조선을 걱정한 실천적 지성이었다. 유학은 본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우환 의식을 근본으로 한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경장기(更張期)로 진단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지금 나랏일을 하려는 이들의 계획은 틀렸다. 무슨 일을 하려면 마땅히 개혁이 있어야 한다. 지금 140년 동안 설치해 놓은 위패조차도 옮길 수 없는데, 하물며 140년 동안 시행해 온 제도를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궁색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하는 법인데, 지금은 궁색해도 변화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나는 알 수 없다."(75쪽)
이러한 율곡의 우환 의식은 105편에 달하는 상소와 차자로 임금에게 올려졌다. 그는 당시 세도가의 처벌을 기탄없이 주장했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함을 주장했으며, 동서 분당의 조짐이 보이자 이를 조화하고 화합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연일기』에는 율곡이 선조에게 건의한 국정 전 분야의 구체적 개혁안이 수록되어 있다. 향약 시행은 물론 군정개혁과 공납개혁은 지속적인 정치 의제였다. 공납 문제는 이이가 제안한 수미법으로 개선되었고, 수미법은 후에 큰 변화 없이 대동법으로 정착되었다.
율곡은 경연일기에 당대 문사나 정치인 등 23명에 대한 솔직한 인물평을 남겼다. 선조 2년(1569년), 왕이 퇴계에게 인물 천거를 청하자 퇴계는 이준경과 기대승을 추천했다. 기대승이 누군가. 당대의 거유 이황과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펼치며 퇴계를 압도했던 걸출한 학자다. 그런데 당시 홍문관 교리 율곡은 이렇게 썼다.
“이준경은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을 도학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인재들을 널리 불러들이지 못했다. 또 그는 뻣뻣하게 자기만 잘난 체했으며,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고 단지 근래의 규칙만을 준수하여 사람들의 논의를 막아버렸으니, 숫자만 채우는 신하에 불과할 뿐이다. 기대승은 재주는 뛰어났지만 기질이 거칠어서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만 잘난 체하며 다른 선비들을 가볍게 여겼다. 또한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만 좋아하였다. 만약 그가 임금의 신임을 얻는다면 그의 비뚤어지고 고집스러운 병폐로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이황 같은 현명함을 가지고서도 그 추천하는 인물이 이와 같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