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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
박영택 지음 / 심통 / 2026년 3월
평점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한국의 근대 예술은 불우한 시대를 거울 삼아 건너왔다. 가장 척박하고 치열했던 시대를 실험실 삼아 성장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1910년부터 1958년까지 한국의 다양한 시각이미지를 대상으로 삼아 근대미술 지형을 조감하고 있다. '40인 40선'인데, 순수미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신문만평과 책 표지, 조각과 사진 등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순수미술가라면 내 머릿속은 곧장 세 사람이 떠오른다. 「맷돌질하는 여인」의 박수근, 「통영 들소」의 이중섭, 그리고 「백자와 꽃」의 김환기다. 여기에 다시 페미니즘적 시각을 더한다면, 「수원서호」의 나혜석과 「생태」의 천경자를 꼽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내 교양의 한계다. 이 책은 그런 한계, 교과서식 이해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국화'나 '동양화' 하면 거개가 산수화를 떠올린다. 그렇다, '조선의 그림', '조선의 색' 하면 산수화가 우선이다. 18세기 전반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처럼 말이다. 이런 조선 산수화의 맥은 근대미술에 이르면 누구한테 이어졌을까. 바로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이다. 이상범은 한국적 실경산수의 거장으로, 근대 한국화 6대가의 한 사람이다. 근대 한국화 6대가란 이상범을 비롯해 허백련, 김은호, 변관식, 노수현, 장우성을 가리킨다. 이 책은 한국화 거장들 가운데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세 사람을 소개한다.
이상범과 노수현 모두 조선 시대 마지막 화원인 안중식이 운영한 경묵헌(1917년 6월 개설)에서 그림을 배웠고, 동연사(1923년 3월 출범)의 핵심 멤버였다. 동연사는 중국회화와 일본화풍과는 다른 "한국의 풍경, 흙냄새 그리고 그것들을 에워싸고 흐르는 한국적인 향토시를" 그리고자 했던 단체다. 청전의 초기 대표작 「잔추」는 1930년 제9회 조선미전 특선작으로, "치밀한 붓질과 건조한 먹의 흔적으로 적적하고 고요한 농가와 헐벗은 민둥산을 보여"준 수묵산수화다. 청전은 한국적 풍경의 정서를 쓸쓸함과 스산함으로 재현해냈다.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의 산수화는 실경이 아닌 전통적인 관념 산수화를 계승했다. 특정 장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상상된 자연풍경, 즉 "대부분 기이한 절경과 암산, 굳건한 바위와 커다란 나무가 적막하게 자리하고 있는 비의적인 공간"을 선보인다. 심산의 산수화는 "정형적인 화면의 구도 위에 골격미 넘치는 필세와 창윤하면서도 유현한 공간감, 고고한 정신미를 추구"했다. 그의 대표작 「송하관월도」는 웅장하고 막힘 없는 자연의 기상이 있다.
"아득한 거리에서 출현하는 거대한 산과 바위, 기세 좋게 솟은 소나무, 몽환적이기까지 한 달밤의 산속 분위기, 고개를 들어 허공의 달을 바라보는 선비의 멋이 깃든 매력적인 그림이다."(213쪽)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은 안중식, 조석진 문하에서 전통적인 동양화를 배운 수묵 산수화의 대가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의 우에노 미술학교에서 3년 동안 청강을 했다. 한국적 산수 풍류의 이상향을 구현한 작품이 바로 「농가의 만추」다. 나무 줄기와 언덕, 논과 논두렁, 초가집과 마당 등 한국 농촌의 늦가을 풍경을 담았고, 길을 걸어가는 갓 쓴 노인이 등장한다.
청전과 소정과는 결이 다르게, 인상주의 화풍으로 조선의 자연과 조선의 색을 화폭에 담은 거장도 있다. 바로 화가 오지호(1905~1982)다. 청전과 소정에게 스승 안중식이 있었다면, 오지호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있었다. 오지호가 다닌 휘문고보의 미술 선생이 고희동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지만, 오지호는 환하고 밝고 맑은 조선의 자연환경을 강조했다. 대표작 「남향집」은 1935년부터 1944년까지 화가가 살았던 개성의 초가집을 그린 그림으로, 초가와 흙벽, 고목과 삽살개, 단발머리 소녀 같은 가장 향토적인 소재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초겨울 정경을 한국적인 인상파 기법으로 담아냈는데, 원제는 「사양(斜陽)」이었다. 오지호는 서양의 인상주의를 한국의 풍토에 맞게 토착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미술 철학이 유달리 맘에 와닿는다.
"어떤 미술의 특질이란 그 미술이 산출되는 지역의 자연환경(풍토)의 특질에 유래되는 것, 예술 중에서도 가장 예민하게 자연을 반영하는 것이 회화다. 시각적 세계에 있어 사람, 특히 조선 사람의 감정이 요구하는 것은 명랑하고 찬란한 색채인 것, 조선의 자연은 공기가 청정하고 색채가 선명하고 기온이 쾌적한 것이다."(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