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6월 20일에 
그곳 슈타인바흐에 도착했고, 
그런대로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지냈다. 

우리는 그가 이렇게 휴가 습관을 바꾸게 된 가장 큰 이유에 관해서는 아직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란, 
함부르크에서 보낸 최근 얼마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니 
이 도시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작곡 작업에 계획한 대로 제대로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이따금씩 밖에 나지 않으리라는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
.
.
설계동에 악루라는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는
이 소박한 건물은 이듬해인 1894년 6월
슈타인바흐에 왔을 때
말러는 곧바로 이 건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소형 그랜드 피아노가 그곳으로 운반 되었다. - P579

말러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은, 
그리고 예술가로서 음악가로서 음악적 창조자로서 
자기 자신이 지닌 재능이 바탕이 되어 
말러를 온전히 이해한 한 여인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밀덴부르크와 사귀었을 때가 필시 생새 처음이요,
아마도 생애 마지막이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 P595

말러의 함부르크 생활과 
말러, 폴리니 관계가 
더 이상 그리 오래가지는 않으리라는 것 
역시 1896년 여름에 벌써 분명해졌다. 
안나에게는 아직 구체적인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꿈꾸는 최고의 직업적 목표는 
빈에서 오페라 감독과 지휘자로 일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의 마음속에는 당연히 
그리고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빈에 대한 생각, 
"남부 지역의 신"에 대한 생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 P604

"공통적으로 원하는 바가 도출되어야만 하며,
한 작품의 가장 깊은 정신적 토대 위에서의 만남은 
비밀스러우면서도 
가장 진실한 의견 일치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 작품의 창조자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3년에 걸친광적인 사랑과 
12년에 걸친 공동 예술작업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녀 역시 자신이 여기에 기여하는 것을 
"거룩한 사명"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P613

말러는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로서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부지런했다.

그가 지휘자 생활을 하는 동안
이 시기에 치른 정도의 공연 횟수에 도달한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함부르크에서의 계약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1891년 3월부터 1897년 4월까지 
그는 대략 715회라는 
상상을 초월한 횟수의 공연을 지휘했다. 

1894/95년도 시즌에는 총 360회에 달하는 공연 
가운데 148회를 지휘했으니,
3분의 1을 훌쩍 넘어서는 횟수의 공연을 지휘한 셈이다. 

오늘날 한 오페라 극장의 전임 지휘자치고 그 정도의 지휘 횟수에 비슷하게라도 도달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한번 비교해 보자. 
독일 바이언 주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
(주빈 메타)은 2001/2002년도 시즌 동안 
총 46회의 공연을 치렀는데 
(여기에 네 차례의 교향악 연주회가 추가된다), 
이는 말러가 했던 것의 3분의 1수준이다. - P614

말러가 빈에서 이 지휘자 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 적기를 놓치지는 않았을 때 
함부르크에서 가톨릭 영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P623

문제의 핵심적인부분에서는 말러의 말이 확실히 옳았다. 

유대인이라는 점은 
그가 빈으로 초빙되는 것을 가로막는 커다란, 
아마도 극복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두드러진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빈 지역의 반유대주의는 
당시에 그 위험성이 극에 달해 있었다. - P627

기자가 여기서 ‘마우셀 말씨라는 
수상쩍은 표현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이디시어 말씨‘라고도 불리는 유대식 독일어를 
조롱하면서 지칭하는 오래된 명칭이다. - P633

루이스가 보기에 심각했던 것은 
오히려 말러가 독일 음악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서 음표 하나하나마다 
유대식 음조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 
말하자면 그런 음조의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냄새가 난다"거나
"악취가 난다"는 오래된 비난과
반유대주의자들의 편집증적 사고 체계에서
언제나 반복해서 나타나는
‘유대인의 고약한 냄새‘라는 관념이
그의 글에서는 음악에 적용되고 있다. - P6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데 쓰이게 될 덕목들, 

즉 핵심만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간파하는 능력과 
이렇게 간파해 낸 정신을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들로 하여금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무하는 능력,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에게 신호를 줄 때의 
극한의 정확함, 
셈여림의 엄청난 세분화, 
뉘앙스를 부여하고 
악절을 맺고 끊을 때의 최대한의 신중함, 
리듬을 더없이 명료하게 윤곽 짓는 능력, 
절정을 향해 음악이 고양될 때의 압도적인 극적 형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연주를 들려주게 만드는 신기에
가까운 정신적, 예술적 에너지 등의 덕목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 P535

그는 생계 수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거의 평생을 시달렸고, 
이러한 불안은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 지급되는 
연금과 뉴욕 측으로부터 받는 풍족한 사례비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라졌다.
.
.
.
벌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있는 네 명의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 P540

당시 말러가 갖고 있던 이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함부르크 시절 초기에 그의 기분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뢰어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지금 내 마음속은 온통 겨울뿐이다. 
어서 다시 봄이 왔으면"
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말러의 심정은 에밀 프로인트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이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말러가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일종의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30대 초반이면 당시의 기대 수명에 비추어 볼 때 
사실 인생의 절반을 산 셈이었다. 

그가 실제로는 일생의 절반을 넘어선 지 
한참이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별개의 문제이고, 
그의 사후에나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 P545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거둔 
대성공이 그의 기분을 밝게 해 줄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명확해지는 사실이 있다. 
그가 지휘 활동을 자신의 인생 본연의 과제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더없이 위대한 걸작들을 돌보는) 오락이요 

(자신과 가족을,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라는) 부담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가 여름 몇 달 동안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지휘 활동으로 고정 수입을 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가지만은 함부르크 시절 당시에 이미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작곡으로 벌어들인 소득만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그가 옳았다. 

어찌되었든 말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은 
브람스와 차이콥스키,뵐로의 반응이나 
함부르크의 주요 신문들에 속한 
모든 평론가들의 반응만이 아니다. 

함부르크에서 말러는 
무엇보다 바그너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 P547

말러는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되고 
남을 달랠 줄 알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있어 
한결같은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소란스럽고, 
질풍 같고,
과도하고, 
지나치고, 
무절제하다. - P561

뉴욕 시절 당시에는 말러가 
좀 더 온화한 사람이 되어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힘들을 종종 
쓸데없이 싸움으로 허비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563

그가 의도했던 바가 십분 이행되고 
그의 불같은 열정이 옮겨붙어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연들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했고, 
그런 공연들 덕분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은 
독일 음악계에서 최고의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P566

말러는 날카로운 위트와 좋은 발상들을 즐겼고, 
스스로 그런 위트와 발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가 혐오한 것은 외설스러운 농담과 
유대인을 소재로 한 농담이었다. - P568

함부르크 시절
1893년 여름에 말러는 
처음으로 휴가를 정해진 거처에서 보내면서 
그곳에서의 일과와 작곡의 진행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던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절해 나갔고

(그 방식은 아터제 호숫가의 마을 슈타인비흐에서 시작되었다), 

안나 폰 밀덴부르크와의 사이에서는 
그때까지의 삶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을 체험했으며, 
마지막으로 함부르크 시절이 끝나기 얼마 전에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영세를 받았다.  - P5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휘하는 동안에는 
지휘자가 연주회장에 모인 군중의 영도자다. 
그는 맨 앞에 서서 앞장서 나아간다. 
다만 지휘자는 발이 아닌 손을 쳐들 뿐이다.

"그의 시선은 가능한 한 강렬하게 
오케스트라 전체를 휘어잡는다. 
단원들은 저마다 자기를 지휘자가 보고 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가 내는 소리를 지휘자가 듣고 있다고 느낀다. 

그가 가장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이는 단원들의 
의견과 신념은 바로 악기 성부들의 소리다. 

그는 전지하다. 

왜냐하면 연주자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자신의 연주자용 성부 악보뿐이지만, 
반면 지휘자에게는 완전한 홍보가 머릿속에 있거나
눈앞의 보면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휘자는 각각의 순간에 
각각의 연주자에게 무엇이 허용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에게 편재의 명망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단원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그는 모두가 저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모두가 저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법의 살아 있는 총체인 그는 도덕적 세계의 양면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는 일어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지시함으로써 
지정하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저지한다. 

그의 귀는 금지된 것을 지향하는 공기를 잡아낸다. 

그래서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사실 작품 전체를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하고 차근차근 연속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세상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작품뿐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동안만큼은 세상의 지배자다."
- P485

그가 원했고 끝없이 추구했던 것은
언제나 완전함이었다.

여기서 그는 세상에 완전함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래, 물론 그 자신의 상상 속에서라면
확실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관현악단이 한낱 80명
혹은 100명의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자기와 같은 천재가 아니라 
단지 솜씨 좋은 기능공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는 이들 때문에 종종 너무나 지독히 격앙되어 
도저히 참기 힘든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음악 독재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도, 
너그럽게 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왜 그토록 냉혹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서든 오해를 받았다. 

그에게는 이 점이 근본적으로 비극이었던 것이 
왜냐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그는 박애정신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누구보다도 친절한 인간이었다.

단 지휘를 할 때만 아니라면 말이다. 
지휘봉을 손에 들자마자 그는 폭군이 되었다." - P486

말러가 당대의 가장 특이한 지휘자였던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그가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목표로한 것인지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런 사람들이대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거친 몸짓 언어에 당혹해 했지만, 
그러면서도 매혹되었다. 

묵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반유대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러한 특징을 장악하고서 

"이것이 유대인 지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말을 할 때면 바로 그렇게 격렬한 제스처를 해 대니까, 지휘대에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에도 이와 똑같이 격렬한 제스처를 한다는 것이다. 

말러가 지휘대에서 
"마우셀 말씨로 말한다"는 주장은
그가 빈 궁정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빈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라이히스포스트Reickspost("제국통신)』 
1897년 4월 14일 자에서 말러에 대한 ‘환영사로 나왔다.

즉, 말러는 올바른 독일어를 구사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유대 언어의 특징을 지휘자의 몸짓 언어로
옮겨 놓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프리츠 가라이스의 것과 같은 풍자화는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켜
그야말로 지휘대 위에서 
무도병 환자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시밭의 유대인"을 그려 낸다.  - P498

즉, 사방에 눈이 달려 있는 듯 오케스트라 속에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던 
말러는 자신이 지휘하는 작품들을 완벽하게 
머릿속에 넣고 있어서 가수들이 부르는 가사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함께 부를 수 있을 정도였고, 
최소한 중요한 배역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P501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던 것도 
바로 이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아무리 심한 타격을 입어도 
이러한 확신을 잃지 않았으며, 

"나의 시대가 올 것이야"라는 그의 명언은 
이러한 확신을 근거로 해서 설명할 수 있다. - P502

그는 자신이 여러 차례 조금씩 변형시켜서 표현했던 생각

즉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하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 작품(교향곡 제2번)에서 처음 실현시키려고 시도했다. - P516

이 침실에서 방문객은 초라한 침대와 
먼지가 살짝 앉은 월계관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거기에 달린 리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피그말리온에게 한스 폰 뷜로." 

그것은 함부르크에 사는 대지휘자가 
이 도시의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소생시키고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애써온 
말러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준 선물이었다.  - P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년 반 말러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한 극장, 한 도시에서 그 정도의 세월을 버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견디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였고, 너무나도 빨리 그렇게 되는 바람에 후자의 경우가 될 틈도 없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시절은 말러가 
지휘자 생활과 극장 감독 생활을 하면서 
그때까지 겪은 시절 가운데 최고의 격동기였다. 

이 시절이 그토록 격동적이고 의미심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절이 나중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의 활약을 위한 
총리허설과도 같은 시절로 보이기 때문이다. - P451

이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작곡에서 손을 놓지 않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말러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와 뚝심을 지니고 있었다.

22년 동안 거의 부업 삼아,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한 아홉 곡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를 쓰고 
열 번째 교향곡을 시작하는 것을가능케 했던 것도,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관리자와 지휘자로서 일했고 
여름휴가 동안에만 작곡을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을 가능케 했던 것도 
바로 그 에너지와 뚝심이었다.  - P452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실패한 이유는 
특히 그가 독일어를 쓰는 보헤미아인인데다 
아직 너무 어렸고 (당시 그는 만 28세였다) 
거기다 유대인이기까지 했으므로 (당시에는 부다페스트에도 열렬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도시의 문화적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마자르적 성향을 지닌 부류가 바라는 후보가 
결코 아닌 탓에 취임할 때부터 
이미 고래싸움에 끼게 된 새우 꼴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마자르 계열의 인사들이 
헝가리인 오페라 감독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P455

헝가리에서는 한 공연에 두 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쓰는 일이 매우 잦다는 것은 
2중 군주국의 오페라 공연 업계에서는 
비밀거리도 아니었음에도불구하고, 

말러는 짐짓 그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폐단은 예술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작곡자의 의도가 실현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이유에서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저는 그렇기 때문에, 
이 오페라 극장을 헝가리의 진정한 민족 기관으로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을 
저의 첫 번째이자 가장 아름다운 의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 P463

환자 구스타프 말러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병력이 근본적으로 보면 
부다페스트 시절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 P475

1891년 3월 16일에는 말러가 사임을 발표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로엔그린」 공연의 
(이것은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일구어 놓은 신연출작들 가운데 확실히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지휘가 샨도르 에르켈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친말러파들은 
몇몇 독일어 일간지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독일 민족이라는 이유로 극장 지배인에게 쫓겨난" 
오페라 감독을 잃은 것을 슬퍼했으며, 
제1막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말러를 연호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 P4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용히 자기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말러가 
(거의 예외 없이) 지켜 나간 좌우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프라하 시절부터 이미 보상을 받았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중요한 비평문들을 보면 이 글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말러가 
오페라 지휘자로서 이미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다. 

이 점은 말러가 한 자선 연주회에서 칼 묵을 대신하여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하게 된 
1886년 2월 21일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 P376

이렇게 몰아 쓴 1번 교향곡은 
질풍노도와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이 곡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처녀작이며, 
확실히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한 교향곡이다. 

"폭발적으로 작품을 써 내려간 시기"라고 
말러가 묘사했던 기간은 나탈리의 말에 따르면 
6주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기간은 말러가 마리온 폰 베버와 사랑에 빠졌던 일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P382

1889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세계 초연 때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지휘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던 말러에게 사람들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나 하라는, 

다시 말해 작곡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을 해석하는 일에나 전념하라는 
식의 충고를 했다. - P401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니키쉬를 좋아했고, 
말러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는 하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말러가 지휘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타나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을 금방 얻을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지휘자는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언제나 말러에게 애정을 가지기보다는 
존경했고, 또한 두려워했다.  - P411

어쨌든 니키쉬와 말러는 
1890년에서 1911년 사이에 당대 지휘계의 
양대 거목이었다. 
경쟁의 중압감이 이에 대한 깨달음보다 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 P413

말러는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음악언어를 혁명적으로 확대하거나 
음악언어에 과부하를 건 작곡가가아니었다. 

이 점은 이제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분명하다. 

그는대체로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어휘를 가지고서 
그때까지는 표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낯선 문장을 지어냈다.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현존하는 기법이 제공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라는 그의 유명한 문장은 
읽는 사람이 ‘현존하는‘이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고 유의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말러의 가곡 세계는 
말러의 교향곡 세계보다 
더 제한적이고, 
더 작고, 
더 일목요연하며,
그에 따라 기법도 당연히 더 제한적이다.  - P431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말러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가곡 분야의 창작물과 교향곡 분야의 창작물이 
때로는 수면 밑에서, 때로는 수면 위에서 긴밀하게 얽히고 관련을 맺어 가는 모습은 음악사상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 P4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