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데 쓰이게 될 덕목들, 

즉 핵심만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간파하는 능력과 
이렇게 간파해 낸 정신을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들로 하여금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무하는 능력,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에게 신호를 줄 때의 
극한의 정확함, 
셈여림의 엄청난 세분화, 
뉘앙스를 부여하고 
악절을 맺고 끊을 때의 최대한의 신중함, 
리듬을 더없이 명료하게 윤곽 짓는 능력, 
절정을 향해 음악이 고양될 때의 압도적인 극적 형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연주를 들려주게 만드는 신기에
가까운 정신적, 예술적 에너지 등의 덕목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 P535

그는 생계 수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거의 평생을 시달렸고, 
이러한 불안은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 지급되는 
연금과 뉴욕 측으로부터 받는 풍족한 사례비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라졌다.
.
.
.
벌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있는 네 명의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 P540

당시 말러가 갖고 있던 이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함부르크 시절 초기에 그의 기분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뢰어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지금 내 마음속은 온통 겨울뿐이다. 
어서 다시 봄이 왔으면"
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말러의 심정은 에밀 프로인트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이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말러가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일종의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30대 초반이면 당시의 기대 수명에 비추어 볼 때 
사실 인생의 절반을 산 셈이었다. 

그가 실제로는 일생의 절반을 넘어선 지 
한참이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별개의 문제이고, 
그의 사후에나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 P545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거둔 
대성공이 그의 기분을 밝게 해 줄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명확해지는 사실이 있다. 
그가 지휘 활동을 자신의 인생 본연의 과제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더없이 위대한 걸작들을 돌보는) 오락이요 

(자신과 가족을,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라는) 부담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가 여름 몇 달 동안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지휘 활동으로 고정 수입을 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가지만은 함부르크 시절 당시에 이미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작곡으로 벌어들인 소득만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그가 옳았다. 

어찌되었든 말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은 
브람스와 차이콥스키,뵐로의 반응이나 
함부르크의 주요 신문들에 속한 
모든 평론가들의 반응만이 아니다. 

함부르크에서 말러는 
무엇보다 바그너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 P547

말러는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되고 
남을 달랠 줄 알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있어 
한결같은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소란스럽고, 
질풍 같고,
과도하고, 
지나치고, 
무절제하다. - P561

뉴욕 시절 당시에는 말러가 
좀 더 온화한 사람이 되어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힘들을 종종 
쓸데없이 싸움으로 허비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563

그가 의도했던 바가 십분 이행되고 
그의 불같은 열정이 옮겨붙어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연들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했고, 
그런 공연들 덕분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은 
독일 음악계에서 최고의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P566

말러는 날카로운 위트와 좋은 발상들을 즐겼고, 
스스로 그런 위트와 발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가 혐오한 것은 외설스러운 농담과 
유대인을 소재로 한 농담이었다. - P568

함부르크 시절
1893년 여름에 말러는 
처음으로 휴가를 정해진 거처에서 보내면서 
그곳에서의 일과와 작곡의 진행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던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절해 나갔고

(그 방식은 아터제 호숫가의 마을 슈타인비흐에서 시작되었다), 

안나 폰 밀덴부르크와의 사이에서는 
그때까지의 삶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을 체험했으며, 
마지막으로 함부르크 시절이 끝나기 얼마 전에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영세를 받았다.  - P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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