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자기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말러가 (거의 예외 없이) 지켜 나간 좌우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프라하 시절부터 이미 보상을 받았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중요한 비평문들을 보면 이 글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말러가 오페라 지휘자로서 이미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다.
이 점은 말러가 한 자선 연주회에서 칼 묵을 대신하여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하게 된 1886년 2월 21일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 P376
이렇게 몰아 쓴 1번 교향곡은 질풍노도와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이 곡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처녀작이며, 확실히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한 교향곡이다.
"폭발적으로 작품을 써 내려간 시기"라고 말러가 묘사했던 기간은 나탈리의 말에 따르면 6주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기간은 말러가 마리온 폰 베버와 사랑에 빠졌던 일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P382
1889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세계 초연 때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지휘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던 말러에게 사람들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나 하라는,
다시 말해 작곡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을 해석하는 일에나 전념하라는 식의 충고를 했다. - P401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니키쉬를 좋아했고, 말러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는 하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말러가 지휘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타나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을 금방 얻을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지휘자는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언제나 말러에게 애정을 가지기보다는 존경했고, 또한 두려워했다. - P411
어쨌든 니키쉬와 말러는 1890년에서 1911년 사이에 당대 지휘계의 양대 거목이었다. 경쟁의 중압감이 이에 대한 깨달음보다 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 P413
말러는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음악언어를 혁명적으로 확대하거나 음악언어에 과부하를 건 작곡가가아니었다.
이 점은 이제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분명하다.
그는대체로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어휘를 가지고서 그때까지는 표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낯선 문장을 지어냈다.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현존하는 기법이 제공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라는 그의 유명한 문장은 읽는 사람이 ‘현존하는‘이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고 유의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말러의 가곡 세계는 말러의 교향곡 세계보다 더 제한적이고, 더 작고, 더 일목요연하며, 그에 따라 기법도 당연히 더 제한적이다. - P431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말러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가곡 분야의 창작물과 교향곡 분야의 창작물이 때로는 수면 밑에서, 때로는 수면 위에서 긴밀하게 얽히고 관련을 맺어 가는 모습은 음악사상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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