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 말러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한 극장, 한 도시에서 그 정도의 세월을 버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견디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였고, 너무나도 빨리 그렇게 되는 바람에 후자의 경우가 될 틈도 없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시절은 말러가 
지휘자 생활과 극장 감독 생활을 하면서 
그때까지 겪은 시절 가운데 최고의 격동기였다. 

이 시절이 그토록 격동적이고 의미심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절이 나중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의 활약을 위한 
총리허설과도 같은 시절로 보이기 때문이다. - P451

이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작곡에서 손을 놓지 않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말러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와 뚝심을 지니고 있었다.

22년 동안 거의 부업 삼아,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한 아홉 곡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를 쓰고 
열 번째 교향곡을 시작하는 것을가능케 했던 것도,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관리자와 지휘자로서 일했고 
여름휴가 동안에만 작곡을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을 가능케 했던 것도 
바로 그 에너지와 뚝심이었다.  - P452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실패한 이유는 
특히 그가 독일어를 쓰는 보헤미아인인데다 
아직 너무 어렸고 (당시 그는 만 28세였다) 
거기다 유대인이기까지 했으므로 (당시에는 부다페스트에도 열렬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도시의 문화적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마자르적 성향을 지닌 부류가 바라는 후보가 
결코 아닌 탓에 취임할 때부터 
이미 고래싸움에 끼게 된 새우 꼴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마자르 계열의 인사들이 
헝가리인 오페라 감독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P455

헝가리에서는 한 공연에 두 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쓰는 일이 매우 잦다는 것은 
2중 군주국의 오페라 공연 업계에서는 
비밀거리도 아니었음에도불구하고, 

말러는 짐짓 그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폐단은 예술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작곡자의 의도가 실현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이유에서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저는 그렇기 때문에, 
이 오페라 극장을 헝가리의 진정한 민족 기관으로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을 
저의 첫 번째이자 가장 아름다운 의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 P463

환자 구스타프 말러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병력이 근본적으로 보면 
부다페스트 시절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 P475

1891년 3월 16일에는 말러가 사임을 발표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로엔그린」 공연의 
(이것은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일구어 놓은 신연출작들 가운데 확실히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지휘가 샨도르 에르켈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친말러파들은 
몇몇 독일어 일간지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독일 민족이라는 이유로 극장 지배인에게 쫓겨난" 
오페라 감독을 잃은 것을 슬퍼했으며, 
제1막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말러를 연호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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