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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삶의 전반에서 부조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 앞에 준비된 명쾌한 조언이 있다. 분수에 맞게 살라.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에 취해 있는 우리들은 삶의 곳곳에 놓인 풍요의 파편들을 맛보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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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에 대한 욕구는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관한 증거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이 삶이다. 하다못해 연필이라도 좋은 것을 써야 한다.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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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드디어 건조기가 도착했다. 건조기가 뱉어 놓는 먼지에 감복해 버린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빨래를 돌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삶이 크게 바뀌었다고 묻는다면,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드물게 환상적인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출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빨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건조기에 대한 복음만큼은 진짜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더 이상 건조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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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주식 가격은 세계 최대 명품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와 연동성이 높다고 한다. (중략) 애플의 제품들은 명품 시계나 보석, 자동차를 구입할 생각이 없는 세대가 선택하는 사치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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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과 문양이 나에게 주었던 만능감을 떠올려 보면, 이처럼 신속한 태세 전환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다만 나는 조금 슬펐던 것 같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한 시절이 끝나감을 발견할 때,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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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조금 다른 것들을 멋지다고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요즘은 명품 가방보다 가벼운 에코백이, 고급 자동차보다 신기술이 탑재된 손바닥만 한 기어가, 럭셔리한 요트 여행보다 요가나 명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쿨하게 여겨진다. 이는 값비싼 명품을 소비할 여력이 없는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소비와 소유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유연해진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세대의 성향과 시대의 변화가 맞물려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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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이 셔츠를 갈아입거나 양말을 갈아 신는 것만큼이나 자주, 빨리,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성(또한 최소한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소비시장은 적당한 가격, 또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이렇게 문화의 요구에 복종하는 기술을 습득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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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한 해결책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케줄러를 새것으로 장만한다거나 수면 시간을 줄여 일하는 시간을 좀 더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턱 끝까지 밀고 들어오는 모든 잡무를 제쳐 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어떤 종류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지, 과연 지금 무엇을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지 말이다.
212p -시간 빈곤자
한국노동연구원의 '시간 빈곤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남녀 모두 기혼자가 미혼자에 비해 시간 빈곤율이 두 배 이상 높다고 한다.
특히 여섯 살 이하의 자녀들을 둔 일 하는 여성이 가장 취약한 시간 빈곤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을 그만둘 경우에 소득 빈곤자가 되므로, 계속해서 시간 빈곤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왜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는지 실감하게 되는 나날들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과 육아를 포기할 수 없는 시간 빈곤자가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운동을 포기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는 시간을 포기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동시에 최악의 선택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포기한 후에 남은 시간의 질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