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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별밤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_9
할머니에게 나는 손녀라기보다는 대하기 어려운 삼십대 초반의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역성들어줄 손녀라기보다는 사이 안 좋은 딸의 나이든 자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이의 난감함, 어색함, 어려움이 나쁘지 않았고 그런 감정들의 바닥에 깔린 엷디엷은 우애가 신기했다. _23
개인적으로 2021년 베스트 중 하나였던 「쇼코의 미소」로 최은영 작가님이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소식에 반가워 예약 주문을 넣고 기다린 기억이 남는다.
묵혀두었다 12월 연말에 꺼내 읽었는데, 읽으면서도 왠지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 몇 일동안 아껴 읽었다.
이정선 - 박영옥 - 길미선 - 이지연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에 절로 빠져 들어간다.
22년 만에 만난 할머니와 지연의 엷디엷은 우애가 나도 덩달아 신기했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증조모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백정의 표식 따위는 집어 던져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던(p.42) 정선이 가슴에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연의 이야기에서는 지연에게 묻어나고, 영옥의 이야기에서는 영옥에게, 미선의 이야기에서는 미선에게 묻어져갔다.
그 길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달팠던 여성의 삶에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고,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미선과 명희, 지연과 지우. 그들의 우정과
영옥과 지연. 삼천과 미선. 새비와 영옥. 영옥과 명숙할머니의 뛰어넘는 관계 속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버팀목이 되었던 관계.
읽으면서 엄마의 삶을, 할머니의 삶을, 나는 모르는 증조할머니의 삶을 생각해본다.
희령. 소설의 첫 문장에 돌아와 여름 냄새가 자욱했던 그 곳의 냄새가 나에게로 전해져온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 이어 「밝은 밤」도 개인적으로 뽑은 #2021올해의책 이다!
책을 덮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좋은데, 너무 좋아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자꾸 미루고 미루니, 이러다 글을 남기지 못할까 이렇게나마 올린다.
책 전체에 기억하고 싶은, 가슴에 남는 문장, 아니, 단락들이 너무나 넘쳐난다.
많은 분들이 읽었겠지만, 더 많은 분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왠지 매 년 생각나서 다시, 또 다시 읽을 것 같다.
올해는 「내게 무해한 사람」을 꼭 읽어봐야겠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_14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_130